■특별기획 -천방 유호인의 학맥 연구
■특별기획 -천방 유호인의 학맥 연구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8.2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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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

 

위성/ 향토사학자, 방촌유물관 관장

▶…이 글은 <2017년 장흥문화(제39호)>에 ‘장흥 사족(士族)들의 학맥 연구‘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글(245p-252p)의 요지이다. 이 글의 주제가 ’천방 유호인’의 학맥과 성리학에 대한 글이어서 편집자 임의로 ‘천방 유호인의 학맥 연구’라는 제목을 붙였으며, 이 사실은 필자의 양해를 구한 바 있다. 이 글에서 편집상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이 쓴 천방선생 행장(行狀)“과 ‘정명렬이 쓴 행장’은 제외하였다. -편집자 주

1. 머리말

성리학(性理學)이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유입된 후로 조선이 건국되고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여 사회제도로 삼고 온 신민(臣民)에게 교육하였다. 유입초기에는 성리학의 연구가 학파(學派)를 이룰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 율곡(栗谷) 이이(李珥) 때에 와서 학문의 꽃을 피웠던 것으로 보인다. 기대승(奇大升)은 만남과 서면을 통해 치열하게 퇴계와 토론하였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이렇듯 철학적(哲學的) 사고를 통하여 달리한 사상체계(思想體系)를 퇴계와 율곡도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주장하였다. 이 천지현상(天地現象)의 연구에 의한 사상들의 다툼 속에 장흥사족(長興士族)들의 학맥(學脈)은 어떤 영향을 받고 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교육되었는가가 이 연구의 목적이다.

필자는 인문학(人文學)의 정통적인 공부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각 집안의 가풍 즉 사상(思想)과 예법(禮法)이 대대로 전해지며 행해지는 것이 늘 의문이었고,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치열(熾熱)하게 관찰하고 사색하며 세상의 도(道)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전통을 잇고 지키는 일들은 늘 왜? 라는 의문이 따랐다. 이런 의문은 꼬리를 물었으나 누구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과정에 정말 우연하게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선생의 유고집(遺稿集)을 보게 되었고 이제까지의 혼란스러움이 안개가 거치 듯 하여 이를 정리하여 본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얼마나 뜨겁게 학문을 받아들이고 자연섭리에 대한 관찰과 사색(격물치지:格物致知)으로 통렬히 반문하며 천하의 도(道)를 깨쳐 전통을 이어가며 살았나를 짐작 할 수 있었다.

2. 천방 유호인의 학문

선생(先生)의 자(字)는 극기(克己)며 호(號)는 천방(天放)이고 본관(本貫)은 강릉(江陵)이다. 1502년에 장흥(長興) 건산(巾山)에서 출생하여 1534년에 진사에 급제 후 과거 보는 것을 폐하고 처사(處士)로써의 삶을 살며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배움의 길을 찾아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 학문의 길을 물었고 그들의 문객들과도 토론하였다. 남명 조식은 천방선생을 일컬어 자기에게 넘치는 벗이라 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와 황해도에서 제자를 모으고 학문에 전념할 때 34세나 연하인 율곡을 70세 노구를 이끌고 황해도 해주(海州)까지 찾아가 비로소 사승(師承) 관계를 맺었다. 율곡선생은 선생을 대가(大架)라 칭찬하고 세상 도리를 깨치고 남쪽 고향으로 내려가는 선생에게 歎 吾道之南(율곡선생의 도를 깨친 선생이 공부를 마치고 남쪽으로 내려가니 찬탄하며 기뻐하다.)이라 하였다. 선생은 1574년 비가오지 않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되었는데,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으면 선생은 자기를 제물(祭物) 삼아 분신(焚身)까지 하려는 정성으로 섶단에 올라 축원 하고 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 하늘이 비를 내려 그를 죽음에서 방면(放免)하였다 하여 임금이 천방(天放)이라는 호를 내렸다 한다. 천방선생은 학문에 전념하였고 주로 장흥지역에 제자들을 두었는데, 본인 천방 선생이 서인(西人:기호학파)영수인 율곡의 제자고 이 맥을 이은 제자들의 후손들이 서인으로 노론(老論)으로 사상을 전수(專受)한 것으로 보인다. 유호인 선생은 율곡 선생 문인록(門人錄)에 올라있다.

천방선생 문인록에는 맨 앞에 영광인 정경달(丁景達목사)이 올라 있고 수원백씨는 백문린(白文麟-:1482~1544년. 자 자정子禎, 호 사주당思周堂, 관향 수원, 천방선생 제자), 장흥위씨는 위홍주(魏弘宙-1558~1634년, 초명 홍인弘寅, 자 희성希聖, 호 수정당守靜堂. 관향 장흥. 천방선생 제자), 위덕의(魏德毅-1540~1613년. 자 이원而遠 호 청계聽溪, 관향 장흥. 천방 유호인 선생 수제자), 인천이씨는 이섬(李暹-1553~1616년, 인천이씨 24세. 자 중항仲亢, 사헌부 집의. 천방선생 제자), 청주김씨는 김지주(金砥柱-자 묘지昴之, 관향 청주, 천방 유호인 선생 제자. 진사), 남평문씨는 문희개(文希凱-진사 현감, 1550~1610년. 임진란 때 의병장, 정유란 때 고창 현감, 1598년 고향에 돌아와 부춘정 세움) 등 각 집안의 파조나 파조에 버금가는 분들이다.

3. 존재(存在) 위백규(魏伯珪)가 쓴 행장(行狀) 추록

이미 진사에 오르고 과업(科業)에 종사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멀리 남명(南冥) 조 선생을 찾아가서 교유하였고 동방 유학의 종(宗)이라고 하는 율곡 이(李) 선생을 찾아 비로써 사승을 맺고 교화를 받았다. 평일에는 한가하게 시(詩)와 글을 읊지만 세상의 가르침을 빗대고 돌려서 말하는 것을 경계하여 멀리하고 심학(心學:양명학)을 옳게 여기지 않았고 남을 가르침에 삼가하고 삼가서 게으르지 않았으며 나물과 물로 끼니를 때워도 평안하게 여겼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연하동 임천(林泉)에 기거하며 집안 그윽이 쌓인 서책을 벗 삼아 근심을 잊고 살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선생을 산당(山堂) 유처사(劉處士)라 불렀다.

4. 송철현의 묘갈명

향리의 선비들이 공(公)의 덕행(德行)을 사모(思慕)하여 공의 위패(位牌)를 모실 사우(祠宇:예양사))를 세울 때 나의 선조인 문정공(文正公) 우암(尤庵)께서 축문(祝文)을 지어 알리기를 “진실로 정학(正學) 이었다.” 이 말은 비록 짧으나 천방선생의 미덕(美德)을 넉넉히 밝힌 것이다” 라고 쓰고 있듯이 율곡의 학문을 제대로 이은 학자이었음을 말했다.

(송철현: 송철현: 송시열의 후손. 성균진사)

5. 결 론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천방 유호인 선생은 기호학파(율곡 이이)의 이론을 정통적으로 받아들여 장흥 지역 사족의 자제들에게 교육 하였다.

이 제자들은 각 성씨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사실상 그 성씨의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 이었다. 나주정씨 장흥문중의 정신적 지주인 반곡 정경달 선생이 아들 명렬에게 전(傳)하고, 장흥 위씨 청계 위덕의는 아우 덕후(德厚-1556~1605년, 자 후지厚之, 호 안항顔巷, 관산 안항공파 파조), 족하인 정훈((廷勳), 정렬(廷烈-1580~1644년, 자 자겸子謙, 무과병과 급제, 웅천현감), 정철(廷喆-1583~1657년, 호 만회재晩悔齋, 무과병과급제,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심양을 다녀옴-심양왕환일기), 정명(廷鳴 1589~1640년, 자 숙겸叔謙, 호 반계磻溪, 병자호란에 안방준과 창의, 호남절의록 등제)등 집안의 모든 자제를 모아 교육 하였다.

그리고 이 맥은 존재(存在) 위백규(魏伯珪) 선생으로 이어져 다암(茶庵) 위영복(魏榮復-:1832~1884년, 자 방서芳瑞, 호 다암茶庵. 존재집 교정을 임헌회에 부탁하고 존재집 발간)을 거쳐, 위계룡(魏堺龍-1870~1948년, 자 운여雲汝, 호 오헌梧軒,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의 제자)으로 이어지는데 위계룡은 연재 송병선-1836~1905년, 자 화옥華玉, 호 연재淵齋, 관향 恩津, 송시열의 9세손, 성리학자,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함),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년, 관향 경주, 이항로의 제자, 한말 호남 의병장, 일본 대마도에 잡혀가 굶어 죽음) 송사 기우만(奇宇萬 1846~1916년, 관향 幸州, 노사 기정진의 손자, 한말 호남 의병장)과 사승을 맺고 맥을 잇지만 일제강점기의 성리학의 학문은 희미해지고 관혼상제의 예절이 풍속으로 남겨졌으나 은연중에 가통으로 자리 매김 하였다.

남평 문씨의 예는 조금 복잡하여 풍암(楓菴) 문위세(文緯世 1534~1600년, 호 풍암楓菴, 관향 南平, 퇴계 이황의 제자. 임진란 때 의병장)는 외가 집 해남윤씨(海南尹氏)와의 관계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 되고 큰형 문위천(文緯天-1529~1573년, 자 백장伯章, 호 춘정春亭, 풍암 문위세의 큰형, 문희개-천방 유호인의 제자-의 부친)의 아들 희개(希凱)는 천방 유호인의 제자가 되었다. 문위세의 가계(家系)가 동인의 퇴계 맥을 잇고 있는 증거로써 후손 문재구 박사(文在球-1930년 풍암 문위세의 후손으로 장흥 유치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교수, 문학박사)는 퇴계를 모시는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 원장(院長)을 역임하고 지금은 퇴계문인(退溪門人)의 전통을 이어 후손들이 구성한 도운회장을 하고 있다. 희개는 천방선생의 제자이나 자제가 예양서원(汭陽書院-1612년에 정명렬, 이승, 선세기, 김여규, 위정훈등 여러 사람들이 주청하여 서원을 설립하고 1519년에 장흥에 유배 온 영천자 신잠을 주벽으로 하고 향사하였으나 그 후 목은 이색, 월봉 김광원, 추강 남효온을 추배 하였다)을 세울 때 명단에 없는 것으로 보아 가세가 희미해 졌거나 학문의 연계성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광 김씨의 김광원(金光遠,1478~1550년, 자 彦明 호 月峯, 관향 영광. 조광조의 문인. 연곡서원에 추배은 조광조(1482~1519년, 김굉필에게 수학, 김필재 문인이기도 함, 지치주의至治主義-유교의 교화를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 실현- 도학정치 주장) 학문을 계승하였고 후손 오남 김한섭(金漢燮 1838~1894년, 호 오남吾南, 성리학자 이항로의 문인으로 화서학파, 한천정사를 짖고 후학 지도. 1894년 동학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은 노론 임헌회와 화서 이항로(1792~1868년, 호 화서華西, 관향 碧珍, 성리학자, 화서학파 영수)의 제자나 화서학파로 분리하며, 인천이씨 이방언(1838~1895년. 이름 민석民錫 방언邦彦. 관향 인천, 동학군 영수) 김한섭과 임헌회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나 이방언은 동학(東學)으로 김한섭은 수구세력이 된다.

인천이씨 이민기(李敏琦-1646~1704년, 자 경징景徵, 호 만수재晩守齋, 관향 인천. 위세직과 신여지승람 수정)는 연곡서원에 모시는 민정중(閔鼎重-1628~1692년. 자 大受 호 老峯, 남인의 집권으로 장흥에 위배, 서인 송시열과 같이 활동함)의 제자다.

민정중은 남인에게 밀려 장흥으로 유배 온 서인이다. 이섬, 이승을 이어 이민기로 다시 이방언으로 이어 지고 있다. 수원 백씨의 경우도 기봉 백광홍이 영천 심잠의 영향을 받았고 성리학자 일재 이항(李恒 1499~1576년 자 항지恒之 호 일재一齋, 관향 星州, 홍직필이 호남5학을 기대승 김인후와 같이 그를 꼽았다. 성리학 기호학파)의 제자가 되어 이를 이었으며 백문린(1482~1544년, 자 자정子禎, 호 사주당思周堂, 관향 水原. 천방 유호인의 제자)은 천방선생의 제자다.

그리고 여기에서 살펴야 중요한 지점이 있는데 문하(門下)를 출입 한 것과 문인(門人:師承)이 된 것과는 구분 지어져야 한다. 조선초기와 중엽에는 사승관계(師承關係)가 엄격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대승이 퇴계의 제자라고 하지만 초년에 퇴계의 문하에 출입 하였지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은 사승관계는 아니다. 또 기봉 백광홍은 영천 신잠이 학문의 길을 잡아 주었지만, 사승관계는 영천이 일재 이항 선생과 맺어준다.

천방 선생도 남명 조식 선생 문하에 출입하여 문인들과 교유(交遊)하였고, 문순공(文純公) 퇴계 선생도 호남제일 선비라고 자랑스럽게 칭찬한 것이 그의 문하(門下)에도 출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방선생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70노구를 이끌고 가서 성리학의 종(宗)으로 율곡 선생을 여겨 문인(門人)이 된다. 존재 위백규 선생도 족조(族祖) 간암(艮庵) 위세옥(魏世玉)에게 학문을 배우지만 위세옥은 자기와 동문수학한 송시열의 직계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7년, 호 병계屛溪, 노론 송시열의 제자, 심성론을 위주한 성리학자)에게 대려가 속수지례(束手之禮)의 예를 올려 문인(門人)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오면서 이런 관례(慣例)들은 희미해지며 문하에 출입하여도 문인이 되었다고 하며 지금에 와서는 혼합하여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인용한 예들은 우리가 역사나 향토사에 획을 그은 분들의 학문을 고찰하였고 필자의 집안 예는 필자가 살아오면서 겪은 예절이나 선친(先親), 조부(祖父)등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것을 나열하여 자세하게 적었다. 이렇듯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놀라운 사실이 500년을 넘게 시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여 졌음을 우리는 목격 한다. 이 조사는 천방 유호인 선생의 문집에 나오는 문인(門人)들과 예양서원에 모셔진 분들을 위주로 하였고 여기에 조사되지 못한 집안이나 추후에 입거한 분들의 조사는 추후로 미루며 이글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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