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22 -우드랜드 여름 풍경
■장흥한담 22 -우드랜드 여름 풍경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8.2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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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시인
유용수 시인

유용수 / 시인·수필가

편백 묻은 산바람이 내려갑니다.

묵혀둔 감정을 벗기고 바람은 산길 따라 아주 천천히 무디게 내려갑니다. 흥겨운 노랫소리가 산을 타고 흐릅니다. 전자 바이올린 소리가 아기 동백과 범부채 꽃을 흔들어 댑니다. 큰 꽃대를 올린 원추리가 기타 소리에 취해 심하게 흔들릴 때 산바람은 편백 숲에 쉬고 있는 슬픈 얼굴을 보드랍게 어루만지며 흘러갑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바람은 알고 있다는 듯, 시난고난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아픔을 위로(휘게 hygge)합니다.

숲길에서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자박거리는 손주 녀석 뒷모습과 아들 손에 의지하며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똑 닮았습니다.

올망졸망 모여든 가족의 행복한 미소를 담고 바람은 나리꽃 속살로 들어와 꿀벌이 먹고 남은 꽃가루와 향기를 산 아래로 밀어내자 바람을 붙잡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의 가슴으로 핏물 같은 꽃물이 스며듭니다. 꽃향기는 먼저 떠난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흐릅니다. 할머니는 바람을 붙잡고 속삭입니다. “잠자듯이 할아버지 곁으로 데려가 달라.” 라고 ... 아! 슬프게도 여름꽃이 심하게 흔들립니다.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여름꽃이 응달진 곳에서 초롱입니다.

땅비사리 꽃은 꽃대 하나 세워 여름날을 두리번거리고, 해바라기는 촘촘한 씨앗으로 꽃을 피워 여름 햇살을 더더욱 닮았습니다. 장독대 틈새에서 피고 지던 봉숭아는 시집간 누나를 마중 나왔을까. 길 끝에 우두거니 서서 오지 않는 누나를 기다리다 누렇게 변한 꽃잎 하나를 서럽게 내려놓았고, 길가 백일홍은 어제 핀 꽃자리를 지워가고, 담장을 뒤덮은 능소화는 가지 하나를 뻗어 담장에 걸린 낮달을 힘들게 붙들고 있습니다.

여름바람이 데워진 여름햇살을 가르며 지나갑니다.

겨울 삭풍에도 개 복숭아나무는 밭둑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견디더니 지난 봄날, 붉은 꽃을 피웠습니다. 화려했습니다. 눈부셨습니다. 곱게 차려입은 낯익은 처녀가 꽃 찾아 왔었고,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과 쏟아지는 탄성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침묵을 헤집고 내리던 봄비에 나무는 밤새도록 살금 거리더니 개털이 보송한 열매를 붙들고 있습니다.

나무는 흔들리고 찢기는 고통을 견디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힘들게 피지 않는 꽃은 향기가 진하지 않습니다. 열매가 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밭둑에 핀 붉은 개 복숭아꽃을 좋아하고, 산발치에 핀 산 벚꽃에 마음을 빼앗기고, 양지바른 언덕에 비바람을 견디며 해맑게 피어난 야생화에 감동합니다. 꽃을 내려놓은 후, 누구에게도 눈길 한번 받지 못하던 개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호미를 손에 쥐고 앉아있는 늙은 어머니가 칠남매 자식들의 입에 물려 키워낸 가난해진 젖가슴이 보일 듯 말 듯 한 허름한 옷을 입고서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습니다.

나무가 자꾸 흔들립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어머니는 큰아들을 뱃속에 담고 뽕잎을 따던 그 여름날을 기억하며 고개를 꾸벅거립니다. 나무는 어머니에게 쉬라고 합니다. 바람은 자장가를 묻혀와 고추밭에서 일하시다 쉬고 계신 어머니를 도닥거리자 못 이긴 척 졸고 있는 어머니가 이렇게 고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나무는 묵묵히 불볕더위를 견디며 가을을 기다립니다.

그래야 열매를 키워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잎을 다 떨구고 난 다음, 살갗을 찢는 매서운 바람에 온몸을 내주고서봄을 기다립니다. 봄을 기다리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거칠고 힘겨운 날을 지나고 나서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아 보고자 우드랜드를 찾아온 젊은 청춘들이 많습니다. 다들 취직이 힘들다고 합니다. 실업자라 돈이 없어 힘들어하며, 대학 학자금에 바둥거리는 젊은 친구도 안타깝습니다. 비록 오늘 돈이 없어 가난하지만, 희망을 놓아버릴까 조바심이 나고 더더욱 안타깝습니다.희망은 절망과 포기를 털어내는 절대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여름이 가득한 자드락길을 걸어 봅니다.

산 위에 걸린 흰 구름이 왠지 낮 설지 않습니다. 갑자기 흰 구름 밀어내고 억불산을 넘어오는 먹구름에 소나기가 내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다는 듯 마당에 널어둔 태양초를 손질하는 어머니의 손놀림에 여름이 영글어 갑니다.

편백 숲 바람이 등을 밀고 있습니다.

꽃대를 꼿꼿하게 세운 참나리꽃이 흔들립니다. 바위에 엉겨 붙은 넉 줄 고사리가 팔월의 햇살에 힘들어합니다. 여름이 강건하게 찍힌 우드랜드에서 편백 향기가 가슴살로 아슴아슴 들어와 거칠어진 삶을 치유하며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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