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12/ 청금 위정훈(1) - 천관산이 낳은 곧은 선비- 청금 위정훈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시문
■역사인물 12/ 청금 위정훈(1) - 천관산이 낳은 곧은 선비- 청금 위정훈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시문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09.0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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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혁(李秉赫)/호남문헌연구회 회장, 문학박사

 

1. 위정훈의 생애

위정훈(魏廷勳, 1578∼1662)이 살았던 시대는 환란의 시대였다. 밖으로는 민족 최대의 시련인 임진왜란과 정묘년, 병자년 두 번의 호란을 겪었고, 안으

로는 인목대비의 폐비 사건과 인조반정 등 정치적 파란과 이괄의 반란이라는 내전이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위정훈은 아버지 판관 위덕후(魏德厚)와 어머니 청주 김씨(淸州金氏) 사이에서 1578년(선조11)에 삼형제 중 장남으로 지금의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傍村)에서 태어났다. 위정훈의 자는 가겸(可謙), 호는 청금(聽禽)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장흥 위씨의《족보》에 따르면 장흥 위씨의 시조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 태종이파견한 8학사 중 한사람인 위경(魏鏡)이다. 위경은 신라에서 벼슬하여 관이 아찬(阿湌)에 이르고 고려 충선왕 때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졌다. 회주는 지금의 장흥으로 위경의 후손들은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장흥에 정착한 장흥 위씨는 고려시대에 문하시중겸태보(門下侍中兼太保)를 지낸 충열공 위계정(魏繼廷)과 그의 손자로 예부시(禮部試)에 장원급제한 위원계(魏元凱)·위문개(魏文凱)형제 등을 배출하며 고려 명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할 즈음에 14세 위충(魏种)이 고려의 회복을 도모하는 모의에 가담한 일이 발각되어 원지로 유배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장흥 위씨는 성리학(性理學)의 교양을 갖춘 지방의 사대부로 관향인 장흥 지역에 세거하면서 평시에는 과거를 통한 벼슬길의 진퇴를 거듭하고, 국난에는 충의를 짚어 창의(倡義)하는 등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유력한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위정훈의 가계는 고조 18세 승문원 습독관(承文院習讀官) 위유형(魏由亨)의 제 5자인 증조부 19세 선무랑 강릉참봉(宣務郞康陵參…奉) 위진현(魏晋賢)이 전남 장흥관산의 당동(堂洞)으로 이거하여 터를 잡은 이래, 조부가 성균진사(成均進士) 위곤(魏鯤)이고 아버지는 위곤의 다섯 아들 위덕홍(魏德弘)·위덕의(魏德毅)·위덕관(魏德寬)·위덕화(魏德和)·위덕후(魏德厚) 가운데 막내인 21세 선교랑 제용감판관(宣敎郞濟用監判官) 위덕후이다. 위덕후는 당동에서 방촌의 안항(顔巷)으로 분가하여 훗날 장흥 위씨 안항공파(顔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위정훈은 태어나자 총명이 남달리 뛰어나고 효도와 우애하는 성품을 타고나서 중부(仲父) 참의공(參議公) 위덕의에게 수학하였는데, 참의공이 매양 칭찬하기를 티 없이 순수한 선비가 될 것이라 하였다. 중부에게 수학하던 위정훈은 본격적인 과거 준비를 위해 27세 때인 1604년(선조37)에 평생의 벗이 된 선세휘(宣世徽)와 함께 천관산 의상암(義尙庵)에서 독서하였다. 이 때 그는 의상암 근처에 있는 아육탑(阿育塔)이라는 바위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자연의 신비와 명산의 신령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은 설화가 되어 종 현손 위백규(魏伯珪)가 지은 천관산 지리지 《지제지(支堤誌)》에 등재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제지》 〈이적(異跡) 아육탑붕(阿育塔崩)〉에 “선조임금 대에 위정훈(魏廷勳)과 선세휘(宣世徽)가 탑 아래 의상암(義尙菴)에서 독서하였는데, 하루는 이승(異僧)이 와서 뵙고 말하기를 ‘소승이 거처하는 곳이 불영대(拂影臺)인데, 극히 청절하니 한번 오셔서 구경하지 않으시렵니까?’하고, 특히 위공에게만 간절히 청하므로 위공이 같이 가니, 암자에는 다른 중은 없고그 중만 홀로 공대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날이 저물어 등불을 돋우고 은근히 대하더니, 삼경이나 되었을 무렵 중이 뜰로 나가 북쪽을 바라보기를 두 서너 차례 하는 동안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중이천천히 들어와 말하기를 ‘아육탑(阿育塔)이 무너져 의상암에 있는 중들이 모두 죽었다고’라고 했다. 위공이 놀라 묻기를 선씨(宣氏) 친구도 함께 죽었는가 하니, 중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지만 저같이 학덕(學德) 있는 청빈한 선비는 죽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위공이 크게 의아하게 여겨 다시 캐물으려 했지만 중이 밖으로 나간 뒤 홀연 보이지 않았다.

위공이 또한 괴이하게 여겨 날이 밝자 급히 의상암에 돌아와 보니 암자는 과연 돌에 눌렸고 선(宣)은 탈 없이 서쪽바위 위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탑이 장차 무너지려 할 때 선세휘는 급히 나오라는 소리를 세차레나 듣고 곧바로 뜰에 나서니 탑이 무너졌노라고 했다. 듣는 이들이 모두 그 중은 산신령이라 하였다. 어제 위공을 맞아들이고 밤에 선공을 부른 것은 두 사람이 아니요 한 사람이었다.

그 후에 위공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혼조(昏朝)를 당하여 과거를 폐하고 은거하다가, 갑자년(1624), 병자년(1637) 두 난리에 의병을 일으킨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며 좋은 평판을 받다가 돌아가셨고, 선공은 혼조(昏朝) 신유년(1621)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었는데, 계해년(1623) 반정 후에 삼수(三水)로 귀양 같다가 만년에 풀려나와서 돌아가셨다. 이승(異僧)이 이공(二公)을 죽음에서 탈출시켰는데 어째서 한 분은 중하게 여기고 또 한분은 가볍게 여겼는지 그 사정을 알 만하다.”라고 하였다.

위정훈은 35세가 되는 1612년(광해군4)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에 고향의 사우인 정명열(丁鳴說), 이승(李昇), 선세기(宣世紀), 김여규(金汝珪) 등과 함께 왜란의 여파로 학문과 교화가 폐지되고 해이된 것에 깊이 분개하여 장흥읍에 예양서원(汭陽書院)을 건립하고, 전 시대의 현인 신잠(申潛), 유호인(劉好仁), 김광원(金光遠), 이색(李穡), 남효온(南孝溫) 등을 배향하여 모셨다.

44세가 되는 1621년(광해군13)에 복시(覆試)를 치르려고 막내아우 위정명(魏廷鳴)과 사촌형 위정헌(魏廷獻), 위정망(魏廷望) 등과 함께 상경 하였다. 그 때는 혼조(昏朝)의 시대로 집권 세력인 대북파에서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의 옥사를 조작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려는 혼정이 거듭되고 있었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위정훈은 폐비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과거 시험장에 모인 유생들을 향해 “마을 이름이 승모라 하니 증자도 수레를 돌렸는데, 어찌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 사람의 자식이 되어 과거를 볼 수 있겠는가?〔里名勝母, 曾子回車, 豈於無母之世, 爲人子者, 可以觀科乎?〕”라고 하면서, 복시를 치르지 않고 세 사람의 형제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에 함께 천관산에서 독서하던 벗 선세휘가 당시의 별과(別科)에 장원급제하여 인사차 방문했는데,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절교하였다.

47세가 되는 1624년(인조2)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호남 지방의 뜻있는 선비들과 함께 군량미 모집에 조력하였는데, 이때에 위정훈은 전라도 아홉 개 읍의 도유사(都有司)가 되었다.

50세가 되던 정묘년(1627, 인조5) 호란에는 두 동생인 위정열(魏廷烈), 위정명과사촌형제 위정헌, 위정망 등과 함께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격문에 응하여 의사(義士)와 의곡(義穀)을 모집하여 근왕(勤王)했다가 적군이 물러가자 귀환하였다.

59세인 병자년(1636, 인조14) 호란에는 임금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기가 북받쳐 북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뿌리면서 말하기를 “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이부자리를 깔고 방에 앉아있을 때인가?〔此豈臣子衽席室處之時也?〕”라고 하면서, 둘째 아우 웅천현감(熊川縣監)의 임소에 글을 보내 근왕을 촉구하고, 막내아우 위정명과 뜻을 같이 하는 사우들과 함께 안방준(安邦俊)의 격문에 응하여 본부의 의사를 인솔하고 북쪽을 향해서 함께 올라갔다. 그러나 행군한지 5일 만에 성 아래에서 화의가 이미 성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다시 남쪽으로 돌아와서〈적벽가(赤壁歌)〉를 지어 부르며 분함을 달랬다. 〈적벽가〉가사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67세 되는 1644년(인조22) 봄에는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울부짖다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지고 깨어나서도 가슴을 치고 크게 통곡하면서,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얼마 후 삼학사(三學士)가 심양(瀋陽)에 끌려가 복종하지 않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바로 그들의 성명을 누구누구라고 부르면서 울며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죽지 않을까 만은 죽음은 마땅히 죽어야 할 곳에서 죽어야하는데, 아! 삼학사여, 이미 또한 연(燕)나라 산에 있는 대명(大明)의 옛 땅에 묻힐 곳을 얻었으니, 오히려 어찌 죽고 묻힐만한 곳을 얻은 것이 더욱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아! 삼학사여, 반드시 구천의 지하에서 천수산 아래에 묻혀있는 명나라 16황제를 배알할 것이니, 옥좌 아래에서 혹시라도 바다 동쪽 옛적 기자가 세운 나라에, 숭정인(崇禎人) 위정훈이 있다고 말해 주지 않겠는가?〔人孰無死, 死當死於死, 嗟嗟三學士! 旣又得埋於燕山, 大明舊壤, 尤豈非得死得埋地, 尤可幸也? 嗟嗟學士! 必於九原之下, 得拜天壽山十六帝, 玉座之下, 倘或告曰: ‘海東箕子故邦, 有崇禎人魏廷勳云爾也否?’〕”라고 하면서,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날 이후 숭정황제의 기일(忌日)인 매년 3월 19일에는 사촌동생 방어사 위정철(魏廷喆)과 함께 천관산 절정에 올라가 통곡하고 돌아오곤 하였다.

이때부터 위정훈은 세상일에 뜻이 없어 문을 닫고 독서하면서 오직 세상의 도리와 관련된 성리(性理)의 뜻을 궁구하는데 전념하였다. 또한 그가 거처하는 방을 기재(幾齋)라 편액하고 청금(聽禽)이라고 자호하였는데, 이는 송나라의 학자 정명도(程明道)가 새 소리를 사랑하여 듣고 즐겼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82세 되는 1659년(효종8)에 나라에서 국난에 창의한 공로를 인정하여 선무랑 의금부 도사(宣務郞義禁府都事)에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집안의 재산 가운데 약간의 토지를 떼어내 의고(義庫)를 만들어 여러 친족들과 함께 운영하면서,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이 만들어 시행한 의장(義庄)규정과 같이 흉년이 들면식구를 계산하여 나누어 먹이면서, 빈부가 균일하여 남고 부족한 근심이 없도록 해주니 지금까지 자손들이 지키고 있다.

1662년(현종3) 정월 초3일에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는 날 스스로 장구시(長句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 중에 “하늘을 섬겨 유래한 팔십년 세월, 보존한 마음에 어찌 한 생각인들 사특함을 용납했으랴!〔事天由來八十年, 存心寧容一念邪!〕”라고 한 구절이 있어, 세상 사람들이 이로서 그가 평생 동안 보존하고 양성한 것이, 옛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음을 또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묘는 천관산 북쪽 화운동(畵雲…洞) 선산 묘좌(卯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은 영광 김씨(靈光金氏)이고, 뒤에 맞이한 부인은 진원 박씨(珍原朴氏)이다. 장남은 동엽(東曄)이고 차남 동흔(東昕)은 위정훈의 종제인 위정봉(魏廷鳳)의 양자가 되어 출계하였고, 차남 동영(東映)과 동훤(東暄)은 박씨가 낳았다. 사후 1806년(순조6)에 위덕의·위덕원(魏德元)·위덕화(魏德和)·위정철·위정명·위백규 등과 함께 전남 장흥에 있는 장흥 위씨의 향사우(鄕祠宇)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다음호에 계속>

▲안항공파 위덕후가 1578년 경 방촌마을에 입촌한 이래 터를 잡으며 세워진 고택인 근암고택(민속문화재 제46호). 상단 하얀 원안은 머리서 본 전경. 아들 위정훈,위정렬, 위정명이 이 집에서 태어나 방촌세거의 기틀이 되었다.
▲안항공파 위덕후가 1578년 경 방촌마을에 입촌한 이래 터를 잡으며
세워진 고택인 근암고택(민속문화재 제46호). 상단 하얀 원안은
멀리서 본 전경. 아들 위정훈,위정렬, 위정명이 이 집에서 태어나
방촌세거의 기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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