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25 -장흥의 풍수(風水) 이야기
■역사산책 25 -장흥의 풍수(風水) 이야기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10.0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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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시인. 장흥향토사학회장

사람들은 오랜 세월동안 자연 속에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살아가기 편리한 땅을 선택하여 살아 왔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 온 경험을 통하여 땅을 능동적인 것으로 보았다. 곧, 땅이 만물을 키워내는 생활력을 가지며, 이 활력의 후박(厚薄) 정도에 따라 인간에게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를 학리적(學理的)으로 관찰하여 흉(凶)과 화(禍)를 면하고 길복(吉福)을 받고자 정리한 것이 풍수지리(風水地理)이다. 이러한 풍수지리를 일부 사람들은 구시대의 천한 풍습으로 여기며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위한 술법(術法)이니 미신(迷信)이니 하여 치부(恥部)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이 풍수지리가 십 수세기라는 오랜 기간동안 민속신앙(民俗信仰) 체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해 왔고,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이를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제 풍수지리는 우리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여 보다 안락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데 이르러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자료는 현재까지 발간된 장흥군의 지지류(地誌類)등에서 간헐적으로 실려진 문헌 자료들을 기초로 하였고, 필자가 향토사 연구를 위해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풍수지리를 연구하시는 분들에게서 얻어진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때문에 자료를 제공해 주신 어르신들의 이름을 밝혀야 하나 여기서 밝히지 않음은 이 분야를 연구하시는 분들의 안목에 따라 상당한 이견이 있을 수 있어 밝히지 않았다.

또한 여기에 소개하는 자료는 장흥읍을 중심으로 한 풍수지리설로서 자료를 접하신 분들이 이야기 식으로 쉽게 회자(膾炙)할 수 있는 자료만을 올렸음을 이해 바라며 형편에 따라 기타 읍면에 전하는 풍수지리설도 전할까 한다.

장흥읍은 장흥군청이 위치한 장흥군의 중심부이다. 따라서 장흥군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장흥읍의 지형지세는 곧 장흥군을 대신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조선시대 병영(兵營)의 병사(兵使)가 병영에 부임하여 들어보니, 부사(府使)가 사는 장흥은 정3품이 벼슬하는데도 억불산(億佛山), 제암산(帝巖山), 곰재산(熊峙山), 사자산(獅子山) 천관산(天冠山) 등, 산의 이름이 웅장하고 높아 화가 나 “부사보다 품계가 더 높은 병사가 사는 곳의 산 이름이 낮아야 되겠느냐?”며 병영성 밖에다 “당장, 산을 쌓아라!” 명하여 산을 만들었다 한다. 그리고 그 산의 이름을 조산(兆山)이라 이름했다 한다. 그 낮은 동산이 병영면 시내에 있어 오늘까지 이야기로 전해온다. 이는 하나의 에피소드이지만, 이렇듯 장흥의 산 이름이 높은 것은 산마다 산세가 독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흥읍은 탐진강의 양안으로 평야가 발달하여 분지를 이루어, 동편에는 황제를 뜻하는 제암산이 있고 바로 곁에 곰재산과 사자산이 있으며, 억불산과 광춘산(廣春山)이 둘러있다. 수인산(修仁山) 자락이 서부로 내려와 사인암(舍人巖)으로 맺히고 장원봉(壯元峰)으로 맺었으며, 북쪽으로는 용두산(龍頭山)이 애워싸고 있다.

이 산들을 풍수지리학에서 산의 모양이나 형상은 보는 곳의 위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여기서 말하는 풍수지리에 따른 형국(形局)은 장흥의 중심부에서 보는 형세이다.

억불산은 황소이고, 사자산은 사자, 곰재산은 곰의 머리, 제암산은 사자머리, 용두산은 용의 머리로 본다. 그리고 현재 법원 검찰청이 위치한 동동리와 남동리가 호랑이의 입에 해당되며, 사자산을 타고 내려와 장흥중학교에 이르러 맺은 나지막한 산이 용의 머리 형상이고, 향양리(向陽里)와 건산리(巾山里) 동편마을이 위치한 모정등(茅亭嶝)을 크게는 거북등으로 본다. 이러한 산의 형상을 보고 장흥 사람들은 악인(惡人)이 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렇다고 뚜렷이 큰 인물도 많이 나지 않을 것이므로 사람들이 합심하여 살아 나가야 할 것이라 한다. 그 이유인즉 산세가 모두 큰 동물의 형국이기에 순(順)할 수밖에 없고 특출한 사람이 날 경우 주변 세에 눌려 클 수 없으니 서로가 합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옛날 장흥의 중심이 동동리(東洞里)와 남동리(南洞里)가 되어 장흥의 동헌(東軒)이 지금의 경찰서 뒤 장원주택이 서있는 곳이고, 경찰서 자리는 장관청(將官廳)이 법원검찰청 자리는 장흥의 객사(客舍)가 있었으며, 벽사역(碧沙驛)의 동헌이 관덕리(觀德里)에 위치했었다. 그래 서편의 호랑이 입에 위치한 부사(府使)와 동편 용의 허리에 위치한 찰방(察訪)간에 서로 견제하며 보이지 않게 암투가 있었다 한다. 그 증거로 타 지역에서도 시행되는 고싸움이나 보름 줄다리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특징이 나타난다. 즉 동서부 고가 다투기 위해 출전을 할 때는 반드시 각각의 동헌에 인사를 드리고 원님인 부사와 찰방의 후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장흥의 고싸움이나 줄다리기가 두 수장관원의 자존이 걸린 한판의 승부가 되어, 타 지역보다 고의 규모가 크고 많은 인원이 동원됨으로서 놀이가 크게 흥행하게 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이야기다. 풍수지리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부사가 “부사가 사는 마을 앞에 용머리가 있다는 것은 부사를 해(害)할 일이 많을 것이니, 용머리를 개머리라 부르고, 그곳에 무당이나 점장이들이 거주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한다. 그래 마을 이름을 개머리라 부르게 되었고 부적(符籍)을 걸어둔 곳이라 하여 괘야리(掛也里)가 되었다고 전하며, 주요 혈(穴)자리는 장흥초등학교와 장흥중학교에 해당된다 한다.

근세에 들어 이렇게 풀이하는 풍수사도 있다. 근세에 들어 지역개발로 인해 혈이 많이 잘리고 지형의 변화는 약간 있으나 아직도 발음(發蔭)이 되고 있다는 풀이다. 이야기인 즉은 호랑이 입에 해당하는 동동, 남동리에서 법원 검찰 자리는 호랑이 목구멍에 해당하는 자리이고 경찰서의 자리는 호랑이의 혀에 해당하는데 최근 경찰서를 개축하면서 동향이던 건물을 남향으로 바꾸는 바람에 호랑이의 이(치아)가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가 먹이를 물어 와 씹기만 할 뿐 맛을 느끼지 못하고 목으로 넘기므로 경찰서 직원들은 열심히 뛸 뿐, 부(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용(龍)의 허리 부분으로 상리(上里)와 해당리(海堂里) 마을을 잇는 부위에 우회도로가 개설됨으로 용의 허리가 잘려 용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됨으로 교도소(矯導所)가 옮겨가게 되고 기존 원도(元道)마을과 축내(築內)마을, 상리(上里)마을이 읍에 소재하고 있음에도 가구수가 줄어 겨우 기존 길가에만 집들이 존재하고 안쪽으로는 집들이 비워져 쇠락하는 것이라 한다.

다음 이야기는 조금은 부분적이지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제암산의 원래 이름은 사자산(獅子山)이었으나, 산의 정상부에 바위가 황제바위로 인근의 산들이 조복(照覆)을 하는 듯하여 제암산(帝巖山)이라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인 무라야마지준(村山智順)이 기술한 「조선의 풍수」중 「도읍(都邑)의 염승(厭勝)」편을 보면 “읍의 동쪽에 사자산이 솟아 있는데 어느 때 쯤인지 확실치 않으나 장흥읍에는 이 산 때문에 번영할 수 없다고 알려져 이 산 꼭대기에 쇠로 만든 큰못을 박아 넣어 그 왕기를 눌렀다. 그 후 부터는 장흥에 재해없이 번영했고 어디든지 길지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어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같게하는 부분이지만, 제암산의 명혈(名穴) 중에서 가장 큰 명당으로는 군왕이 나올 자리(君王之地)로,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장흥공설공원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사자산의 이야기이다. 사자산의 원래 이름은 화개산(華盖山)이라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착정산(錯頂山)이라 부르다가 사자산이 제암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어병산(御屛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는 제암산의 황제바위를 두른 병풍과 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나 풍수사가 아닌 일반인들이 보아도 사자가 앉아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사자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국치(國恥)이후 일본인들은 일본의 후지산(富土山)을 닮았다 하여 “작은 후지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풍수사들은 사자 형국은 머리 부분이 낮고 엉덩이 부분이 높으므로 사자산은 전형적인 사자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병산이 사자산으로 이름이 변한 것이다. 이렇게 사자산의 옛 이름에 대한 내력을 알지 못하고 어설프게 산의 이름을 얻어들은 ○○면의 면장이 일제 때 우리의 정기를 빼앗기 위해 박은 사자산에 철심을 뽑아야한다며 사람을 동원하여 찾았다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아무튼 사자형국은 머리에서 꼬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혈자리가 있지만 어느 혈보다 사자산은 눈동자 혈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제 혈을 찾지 못하고 사자 얼굴의 이곳저곳을 헤집어 놓는 바람에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이번은 억불산의 이야기이다. 억불산은 소의 형국으로 며느리 바위 등 정상부가 소의 머리와 뿔에 해당하며, 우산리(牛山里)는 소의 눈에 해당하는 명당(明堂)으로 우목리(牛目里)라 했었고, 평화리는 소의 복부(腹部)에 해당된다 한다. 평화리에 터를 잡아 해방 전까지 대대로 벼슬도하고 농사도 많이 하던 집안에서 해방이 되어 큰 벼슬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의 편익을 위해 평화리 까지 곧바른 넓은 길을 개설하자 많은 풍파와 재산의 손실을 낳았다 한다. 이는 풍수지리학상 길을 마을에서 곧바로 개설한 것은 비수(匕首)로 복부를 찌르는 격이 되어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로 진입하는 길은 어디에서나 직선화하여 들어오는 것은 물이 고이지 않고 곧바로 흘려보내는 격이기 때문에 재산이 모이지 않고 곧바로 나가게 되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지반(地盤)을 높여 우회도로를 개설함으로서 평화마을이 안정세를 찾아 가구가 늘어가고 있다 한다. 그리고 옛 남도 대학이 있는 곳도 소의 눈에 해당하는 곳이라 한다. 따라서 터는 좋은 곳이나 넉넉한 자리는 될 수 없고, 사람들이 오래 머물 수 없는 조금은 버거운 자리라 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사자의 머리와 갈비 쪽을 마주보고 있어 먹이는 들어오지 않고, 소의 눈에 파리만 자주 날아드는 자리이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은 음기(淫氣)를 보(補)하여 설기(設基)한 마을로 평장(坪場)마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평장 마을은 순수한 우리 이름으로 “들”이다. 이 마을의 순수 우리이름에서 시사되는 것처럼, 탐진강의 하류 쪽의 충적평야지의 들 가운데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입구의 조그마한 개울 옆에는 오릿대와 남근석(男根石)이 서있다. 이 오릿대와 남근석은 평장 마을이 강위에 떠 있는 배의 형국으로 오릿대는 배의 항해가 순조롭기 위해서 세운 돛대라 하며, 남근석은 배를 매기 위한 결박대(繫船柱)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를 달리 이야기하는 풍수사도 있다. 평장마을 입구의 건너편인 북쪽에 사인바위(샘바위)가 있다. 산의 3/4이 바위로 구성되고 바위의 색깔이 보랏빛인데다 아래쪽에 또 다른 작은 바위가 음핵(陰核)처럼 서 있으며,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음 바위로 음기(淫氣)가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음기를 막기 위해 세운 것이 남근석(男根石)이라는 것이다. 오릿대 역시 이와 관계하여 오릿대 끝에 있는 오리가 여근암(女根巖) 쪽을 향하여 음기를 막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이 남근석을 세우지 않으면 동네의 남자들에게 흉사(凶事)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장흥읍에서 명당혈(明堂穴)로 알려진 곳이 있다. 동동리에 위치한 옛 정수장의 배수지와 수성당(壽星堂), 그리고 옛 교도소(矯導所)의 자리가 그 곳이다.

예부터 명당혈로 알려진 곳 중 수성당은 풍수지리를 알지 못하더라도 쉽게 자리가 좋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오뚝 솟은 봉우리 밑에 터를 중심으로 좌우에 산이 균형있게 둘러있고 사자산과 억불산이 좌우에 다시 앉아 마치 어전(御殿)에서 아침 조회를 하는 듯 보인다. 풍수사들은 이 자리를 일러 평생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사람들의 공경을 받아 편히 지낼 수 있는 자리라 한다.

현재 수성당은 장흥군내 일반 노인당과 달리 예전부터 65세 이상의 노인으로 당원들의 합의가 있는 분만이 가입자격이 있는 곳으로 지금도 관내 기관장이나 고위직에 승진하여 고향을 방문하면 꼭 이 곳 수성당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니 가히 명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정수장 배수지와 교도소의 자리는 일반인의 안목으로 보아서는 그 혈의 형국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곳이다.

풍수사들의 얘기에 의하면 정수장과 교도소 자리는 5백 사람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넉넉한 터로서 40여 년 전, 정수장 배수지 공사 부지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연고를 알 수 없는 암장(暗葬)된 묘(墓)가 많이 발견되었다 한다. 특히 정수장의 배수지가 있던 곳에는 유골이 3중으로 묻혀 있었고, 장흥교도소가 있던 자리에도 개인 묘가 여러 기(基) 있었으나 모두 이장을 했다한다. 특히 교도소장 집무실이 있는 자리는 어느 문중의 큰 어른 묘가 있어 이를 이장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좋은 명당(明堂), 명혈(名穴)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다 발음(發蔭)이 되지는 않는다 한다. 명혈과 명당의 자리를 얻어 발음 발복을 하려면, 우선 그곳의 택지를 얻을 사람이 평시에 덕을 쌓고, 없는 사람을 위해 구휼을 해야만 얻을 수 있으며, 평시 선덕을 베풀면 우연하게 얻은 곳이라도 크게 명당 명혈을 얻을 수 있다 한다. 이 분야에 안목이 없는 자로서는 우선 선덕을 쌓아놓고 볼 일이다. (朝天)

평장마을의 남근석과 샘바위
평장마을의 남근석과 샘바위
소의 눈자리로 알려진 터 우산리(우목리)

 

옥룡자 유산가중에 나타난 군왕지지(君王之地)의 터 장흥공설공원묘지
호구(虎口)로 알려진 터 장흥 법원과 검찰청
호구(虎口)로 알려진 터 장흥 법원과 검찰청
수성당(壽星堂)에서 본 장흥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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