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24- 억겁의 고요 속에 묻힌 고산사
■장흥한담 24- 억겁의 고요 속에 묻힌 고산사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10.1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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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수필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여러 번 물어야 하는 질문하나를 토해내지 못하고 있다. 가슴에 쌓인 알 수 없는 집착들, 물음은 결국 가슴앓이를 주저앉히듯 묻어두고 가을볕에 그을리고 있을 산사를 그리워한다. 다가 갈 때마다 애달파지는 산사. 허름해진 것조차 숨기고 있는 산사에 누군가 찾아와 지혜를 구했던 흔적들. 치열한 삶을 위로하던 꽃자리가 마른 계곡과 거친 잡풀에 몸을 반쯤 숨기고 억겁(億劫)의 고요가 깃들어 마음이 머무는 산사. 장흥군 장평면 용두산 고산사이다.

홀로된 석조여래를 찾고 있다.

완만하게 이어진 조붓한 길을 다가가자 달달한 가을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고, 여름을 견뎌낸 개옻나무가 붉게 물들어 산을 지키는 모습이 경건하다. 사라락사라락 가을을 털어내며 산을 품고 있는 나무 사이로 투명한 가을햇살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가시 돋친 산딸기나무가 휘어져 허우적거리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산모롱이에는 민낯을 드러내며 계절 속으로 변해가는 잡목줄기가 바둥거리며 돌아서려는 자태가 사뭇 진지한 숲 사이로 곱다란 야생화가 눈에 들어온다.

솔밭 언저리에서 자주빛 향기와 만난 산박하와 물봉선. 신선이 어머니에게 주었다는 선모초(仙母草, 구절초) 한 송이와 황 노랑색 머리를 숙이고 수줍어하는 이고들빼기꽃이 건조한 산기슭에서 순박하게 마중하고, 몇 해 전 들어보았을 염불 소리 기억하고 고개 내민 꽃향유와 산국화는 여름날의 뙤약볕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을 견디어낸 허기진 고통이 있었기에 화려하고 진한 향기를 털어 내고 있다. 누구에게도 단 한 번의 눈 맞춤을 해보지 못하고 자지러지는 야생화이지만 지금 그 자리에서 불만이 없고, 친소(親疏)없이 자연에 순응하며, 있는 듯 없는 듯 묻혀 질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무언의 설법자이다. 우리는 자연이 전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으며 건드릴 수 없는 상처를 치유하고 때 묻은 영혼을 씻어내고자 자연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메마른 가을기운을 뒤로하고 조금씩 거칠어진 바람 소리와 함께 온전히 홀로 된 용두산 연꽃자리로 들어간다. 성자가 머무는 곳에는 어디에든 기쁨이 있다고 하지만 고요가 휘감아 외로움이 몰입되어있는 고산사는 기쁨보다는 쓸쓸함이 진하게 묻어있다.

염불 소리 묻힌 관음봉이 처연하다. 산사를 지켜주던 등 굽은 불자가 떠난 그해, 가을 햇살이 뉘엿거리며 용두산을 헤집던 날. 가난한 비구니 스님이 눈물로 작별의 삼배를 올릴 때, 풍경은 울음을 멈추고 새롭게 찾아올 은자(隱者)를 기다리고 있다. 졸졸졸 떨어지는 물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키며 속살을 숨기고 있는 산사. 비울수록 채워진다며 덜 가진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텅 빈 산사. 충만한 전율과 두려움에 손은 이미 두 손 모으고 거역할 수 없는 가피를 바라는 욕심으로 빛바랜 법당문을 잡아당긴다.

깨지고 쪼개져 땅속에 매몰되었다가 법당에 모신 석조여래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모진 역사의 부침에도 빼어난 용모와 온화한 기품을 잃지 않고 아늑한 광명을 뿜어내고 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눈매가 선한 얼굴이다. 포근하고 경계가 없다. 어루만지고 싶다. 참 평온하다. 한 발자국 더 다가가고 싶다. 이래서 고산사는 삶의 위로가 필요 할 때 찾아오는 걸까. 고요와 하나 되어 두 손 모아 삼배(三拜)를 올린다.

『새벽을 깨우는 바람 소리에 오감을 끌어 올려 내 안을 들여다본다 / 몸에 묻은 더러움을 털어낸다/ 습관처럼 찌든 일상들을 위로받고 싶다/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소소한 것에 감동할 줄 알고/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미워함과 시기함과 분노마저도/ 주저 없이 사랑으로 덮을 줄 아는 마음이기를 소망하며/ 거짓 없는 순진함으로 무장하여 가슴속으로 찌들어 오는 모든 잡사를 내려놓고자 간절한 기도를 뱉어낸다/ 찌들고 거칠어진 마음 한구석을 위로 한다/ 욕심과 어리석음 그리고 분노를 삭여낸다.』

「암자에서 길을 묻다 중에서 삼배」

쪼개진 가을 햇살이라도 붙들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홀로된 산사의 적막감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 동행한 스님조차도 쓸쓸하게 팽개쳐진 산사의 안쓰러움에 목마른 법문 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흔들림 없는 수행 터로서 지혜를 구하고 가피를 갈망하지만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淨土)다'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무상(無常)한 바람이 바래진 햇살을 밀어내며 홀로된 산사를 휘돌아 간다. 숲은 다시 긴 침묵 속에 들고, 햇볕이 빠져나간 자리로 산 그림자 어둠을 밀고 내려올 때, 용두산 꽃자리가 유난히 해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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