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26 -호남 3대 정원 백운동 별서정원
■장흥한담 26 -호남 3대 정원 백운동 별서정원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11.2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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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수필가

격정의 가을이 쏟아져 침묵하고 있다. 나무는 가려지고 온통 단풍 속으로 빨려드는 산속, 푸르게 높아진 하늘 구름, 그리고 골 깊은 곳에서 내려오는 묵은 바람이 가을 냄새를 풍기고 있다. 단풍처럼 붉게 물든 자리에서 고단하게 걸어온 한해를 어떻게 마감해야 할지 발걸음을 멈추고 곧게 쏟아내는 햇살에 흐트러지고 참괴慙愧한 몸 씻고 싶다. 잡사 함을 버리고 홍시보다 더 뜨거움을 가슴에 채워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동행하고 싶다. 마른 억새꽃을 닮은 지인 선배들과 파문이 일던 하루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적은 것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에서 선배가 뱉어내는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그대로’라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들어간다. 흐트러진 돌담도 부드럽다. 낙엽이 쌓여 더 안온하다. 조금은 불편할 것 같은 울퉁불퉁한 바윗길이 내 몸에 달라붙어 몸은 평온하고 가슴은 넉넉함으로 넘쳐난다. 숲은 새소리만 가득하고, 가을 정취에 철모르는 동백과 산철죽은 일찍 얼굴을 내밀어 눈길을 사로잡았고, 가지에 하나 남은 석류는 카메라 렌즈에 맞춰져 익숙한 것들과 만남이 거북하지 않은 자연스러움과 마주하고 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은 친소親疏가 없다. 대나무 숲에서 부르는 외침이 가을이고 솔수펑이로 쏟아지는 한줌 햇살도 가을이다. 오늘 하루, 소나무가 비벼대는 숲의 향연에서 가진 것이 없어도 넉넉하고, 한 발자국 뒷걸음에 서 있어도 뒤떨어져 있지 않았다. 자로 잰 삶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삶이 더 자연스러웠을까. 발밑에서 찰방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마저도 여유로운 숨소리에 맞춰져 있다.

몸을 밀어 넣은 백운동 별서정원 마당에는 널브러진 가을이 무심할 정도로 고요하다. 은자의 거처에 텅 빈 적요를 감내하기에는 범부凡夫의 머리와 가슴으로는 부족하다. 은자는 이토록 쓸쓸함을 사랑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한, 토해내는 침묵의 언어는 어떤 몸부림이었을까. 옥판봉 아래 백운유거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바랬을까. 눈은 평화로우며 몸은 느리게 움직이는 백운동 별서정원은 담양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이라고 부른다.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1627∼1701,호 백운동은白雲洞隱)가 말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1684~1767)을 데리고 들어와 은거하며 짓고 가꾼 별장이자 원림이다. 처사는 유언으로 ‘평천장平泉莊’(당나라 재상 이덕유가 그의 별서인 평천장을 두고 자손에게 “절대로 남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해 나온 말)을 후손들에게 전함으로써 이 원림이 지금까지 보존(12대째)되었다. 다산은 1812년 9월(음) 백운동 별서에서 하룻밤을 유숙한 후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별서를 그리게 한 후 12가지의 풍경을 시로 남겼는데 다산이 12경 중 8수(1경, 2경, 3경, 5경, 6경, 7경, 8경, 9경)의 시를 짓고, 초의선사가 3수(4경, 10경, 11경), 제자 윤동이 1수(12경)를 지어 백운첩에 남겼기에 폐허가 되었던 별서를 백운첩을 보고 복원하였다.

원림의 내정內庭에는 백운동 계곡물을 끌어와 마당을 돌아나가는 ‘유상곡수流觴曲水’와 방짜 지당 곁에 푸르게 굽은 뽕나무마저도 잘 어울리는 꽃이 되었다. 취미선방 댓돌 아래에 놓인 화계花階에는 선비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을 담은 대나무, 매화, 국화, 난초가 고고하고,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을 느낀다’는 용담꽃 한 무더기가 취미선방 마룻장에 앉아 백운옥판차를 따르는 동주의 손끝과 하나 되어 왠지 아련하다.

《취미선방翠微禪房》

「一痕墻砌色(일흔담체색) / 담장과 섬돌 빛깔 한 줄 흔적이

點破碧山光(점파벽산광) / 푸르는 산빛을 점찍어 깬다

尙有三株樹(상유삼주수) / 여태도 세 그루 나무 있으니

曾棲十笏房(증서십흘방) / 예전부터 좁은 집에 살던 것일세」

- 다산 정약용

신선이나 머물렀음직한 창하벽 위 정선대에서 별서를 바라보며 자연에 묻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은둔자의 마음을 더듬어본다. 얼마나 몸을 낮추어야 올곧은 삶을 느껴 볼 수 있을까. 돌기둥에 새겨진 복인복지 푯말과 백운유거의 편액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함과 멋스러움에서 처사의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맑은 성품을 느낄 수 있다. 차를 따르는 동주는 말을 아꼈다. 돌기둥에 새겨진 백운산장 넉 자의 글씨는 백운동은 선생 글씨라면서 가을볕이 뭉그적거리는 사당으로 안내한다. 그림 같은 전서체의 편액이 걸린 사당에는 불천위(국불위, 유불위, 사불위) 중 유림불천위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갈한 사당 담벼락을 오르는 넝쿨 하나가 수줍게 마중하는 백운동 별서정원은 따스한 가을볕을 붙들었다.

텅 빈 고요와 부석거리는 바람 한 줌이 찾아오는 이들을 다독이고 있다. 거칠었던 세상 풍파를 다 짊어졌을 처사의 너그러움일까. 자연은 이토록 너무 많은 설법을 이야기하며 깊어가고 있다. 별서의 숲들이 숨을 죽이고 내려앉아 가을밤을 준비 중일 때, 취미선방 댓돌에서 허둥거리던 쪽빛 한줄기가 남루한 가슴에 들어와 편안하게 자리 잡는다. 부러울 것이 없는 만족의 합장이다. 이곳에서는 화냄도 다감해지고, 일상이 진솔해지며 부족한 것이 부끄럽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일까. 동주가 권하는 향 깊은 백운옥판차 한 모금에 조금은 허름한 삶을 꿈꾸다가 슬며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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