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장흥문학의 태동기- 불자佛者들이 주도했다
■사설-장흥문학의 태동기- 불자佛者들이 주도했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19.12.0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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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의 古문학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1)

장흥 古문학의 태동기를 어찌 보아야 하는가.

장흥 古문학을 태동기(신라, 고려조)와 중흥기(조선조)로 나뉜다면, 그 태동기는 당연히 통일신라와 고려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흥의 古문학으로서 첫 페이지 등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보림사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보물 제158호)의 비문, 즉 비명碑銘이 될 것이다.

이 비명은 장흥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비명이지만, 장흥 최초의 ‘기록문학’이라고도 볼 수 있어 그 의미가 자못 크다 할 것이다.

이 탑은 884년에 보림사 창건과 함께 조성된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 지선(智詵)의 탑비로, 비명은 김영(金穎)이 지었다.

이 비명 첫 머리는 선종의 경지를 풀이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듣건대 무릇 선禪의 경지는 그윽하고 고요하며 올바른 깨달음은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알기 어려워 허공과 같고 바다와 같다 …공空을 깨달은 사람은 단숨에 저 사악한 산을 뛰어 넘으나 세상 일에 매어있는 자는 영겁이 지나더라도 악업에 가로 막혀 있다.”

보조 체징普照體澄(804~880)은 우리나라 선종의 개조인 도의선사와 염거화상으로부터 선법을 전수받고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와 선종을 본격적으로 전파한 장본인이다. 탑비의 내용 중 그가 선종의 실질적인 개창조가 된 정치적 배경에 얽힌 사적들도 보인다.

“개성 5년(840년) 봄 2월 (중국에서)고국에 돌아와 고향(熊津, 지금의 공주)을 교화하였다… 대왕은 소문을 듣고 꿈에서도 애를 쓰고 선문을 열고자 하여 서울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여름 6월 왕명으로 장사현 부수 김언경을 파견하여 차와 약을 보내고 맞이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영암군 승정(僧正) 연훈법사와 봉신(奉宸) 풍선 등을 보내 가지산사(보림사)로 옮기기를 청하였다. 산문에 옮겨 들어가니 곧 원표대덕이 옛날 거처하던 곳이었다… 당(唐) 선제(宣帝) 14년 2월 부수 김언경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사재를 내어 철 2,500근(斤)을 사서 로사나불상 1구를 주조하여 장엄하였다.’

그때부터 체징은 20년 동안 보림사에 주석하며 초조 도의선사道義禪師, 2조 염거廉居 화상和尙으로 전해져 온 선지禪旨를 드높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기치旗幟를 뚜렷이 세우게 된다.

그런데 체징 이전, 20여년 동안 염거廉居가 주석住錫하던 억성사億聖寺도,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머물렀던 진전사陳田寺도 있었는데도, 보림사가 선종의 종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서울(경주)에서 한참 떨어진 오지인 장흥 땅에 절과 승려를 왜 신라 왕실에서 애지중지하며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하다. 이 보조선사 창성탑비명과 관련, 당시 신라 조정의 정치적 연유와 가지산사(보림사)와의 관계, 당시 장흥지역의 지정학적 위치 등은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장흥문학 태동기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두번째 작품으로는 정명국사靜明國師 천인天因(1202-1248)의 ‘천관산기’이다. ‘천관산기’는 산문 형식의 답사 기록문이지만, 우화적인 요소가 많고, 최초의 장흥지역, 천관산에 대한 기록문이라는 점에서 장흥의 古문학 범주에 넣을 만하다.

‘천관산기’는 천인이 36세 되던 1240년에 지은 것으로 <동문선 권68>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 “홍진洪震이 밤낮으로 예를 다하여 화엄신중華嚴神衆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중이 감동하여 절의 남쪽 봉우리에 죽 늘어섰다”는 우화적 내용이다. 금강역사나 용신처럼 강력한 힘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재난을 막아주는 신神인 신중神衆이 바로 당시 청해진의 장보고 세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836년 흥덕왕 사후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청해진에 몸을 숨긴 후, 그와 친밀했던 홍진대사가 천관산에 머물며 장보고를 설득하여 민애왕을 축출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삼국사기), 이 거사를 위해 청해진에서 장보고의 세력이 경주로 올라갔고, 이때 장보고 세력에 천관산 세력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하여 ‘천관산기’의 번역과 해설, 관련 우화들에 대한 제대로된 분석 평가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천관산기’ 다음으로 장흥의 한시漢詩 문학은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1226~1293)의 330여 편에 달하는 시편이 아닐 수 없다. 즉 원감국사야말로 본격적인 장흥문학의 중흥을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사의 그 많은 시편이 그의 유작의 번역으로 함께 번역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의 한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그의 한시문학은 우리들의 과제로 남아졌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 때 ‘보조선사창성탑’ 비명, 정명국사의 ‘천관산기’, 원감국사의 한시 등에 대한 제대로된 재조명과 연구 평가 작업이 필요한 것은 그것들이 바로 장흥문학의 태동기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장흥의 古문학은 그러한 태동기를 거쳐서야 비로소 조선조에 들어와, 천방 유호인, 반곡 정경달, 존재 위백규, 기봉 백광홍, 옥봉 백광훈 등으로 이어지는 장흥 古문학의 중흥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뿌리 없는 줄기란 있을 수 없듯, 장흥의 古문학이 있었기에 장흥의 古문학의 중흥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점 때문에 더욱 우리의 장흥 古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 평가 작업이 절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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