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28 - 화중연화속의 보림사
■장흥한담 28 - 화중연화속의 보림사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3.0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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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 시인·수필가

 

가지산 숲에 봄볕이 꿈틀거린다.

누런 풀밭에 함초롬히 꽃대를 끌어올린 난초가 만삭의 몸으로 산을 지키고, 얼음장을 뚫고 나온 복수초는 서릿발이 부풀어 오른 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일러주며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어느새 메말랐던 산자락에 물방울이 맺히는 걸 보니 대지는 이미 봄볕에 겨울이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숲에는 비자림이 더더욱 푸르고, 마삭줄은 겨울이 힘들었는지 피멍 든 모습으로 어린나무를 옥죄고 있는 곳에서 삭정이처럼 푸석거리던 마음을 다잡고 두리번거리자 등을 밀던 바람이 산모퉁이를 휘돌아가는 곳에 화중연화火中蓮花 속에 든 천년 보림사가 있다. 봉황이 날아드는 둥지에 천삼백여 년(759년) 전 원표대덕이 터를 잡고, 보조국사 체징이 신라 헌안왕의 뜻을 받아 구산선문 중 최초로 가지산파를 이루었던 곳. 체징선사를 도와 보림사 중창에 몸을 던진 부설거사의 부인 묘화보살의 구구절절한 전설과 마디마디에 묻힌 고난苦難한 역사가 겨울이 녹으면서 봄이 되고, 어제가 전설이 되어가듯 곰살스럽게 익어가는 보림사에 힘 빠진 겨울바람을 밀어내는 맑은 햇살이 가득하다.

먹구름 비켜난 햇살과 맑은 바람도 내 것이다. 계곡물을 달구는 은빛도 내 것으로 담아 오래전 다녀간 퇴색된 기억을 떠올리며 일주문인 외호문을 넘어가자 사바세계의 삿됨을 두 눈 부릅뜨고 중생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마주할 때 대웅전 처마 끝 그림자가 선을 긋는다. 법계와 속계를 가르는 걸까. 햇살은 대웅전 뜰 앞에 내려앉아 위대함에 적요하고, 법당에는 간절한 가피를 바라는 처절함만이 간간히 어간문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삐그덕, 힘주어 당긴 법당 문소리가 세상을 깨운다.

덧없는 부끄러움과 낯선 진실들을 짊어지고 오래된 길을 따라와 지혜의 불을 밝혀온 법당에서 흩어진 영혼과 돌담처럼 쌓인 욕심에 고개 숙인다.

붙들고 싶은 기억은 초라하게 꺾이고 숨 막힐 것 같은 간절한 만 쏟아진다. 법당에서는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밝혀둔 촛불이 나를 위해 밝혀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심이다. 내려놓을 것이 없을 것 같은 가난한 삶이 어슷거리는 걸 보면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 걸까.

하나의 등불이 능히 천 년의 어둠을 없애고 하나의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앨 수 있다( 一燈能除千年暗. 一智能滅萬年愚)는 육조 혜능선사의 법보단경소리가 법당을 밝혀 정갈하다. 오늘도 빈 마음으로 산사를 더듬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삶의 옹이가 더더욱 시려 올 것 같다.

가지산 숲을 빠져나온 낮달이 국보 제44호인 삼 층 석탑 위에 올랐다. 발걸음을 멈춰 부처의 빛이 사방에 비추길 바라는 석등과 석탑을 돌아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불 앞에 삼배를 올린다. 진리가 태양의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길 간절하다. 미혹에 결박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심으로 생각하고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비로자나불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어리석은 중생이 진심으로 기도하고 간절히 희구하는 바에 따라 어느 곳, 어느 때나 알맞게 행동하고 설법하며 여러 가지 상이한 모습을 나타낸다는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교주답게 진리를 설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일체중생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보림사 대적광전 벽면에 매화보살이라는 글귀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눈에 담는다.

매화보살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전라북도 변산 월명암에서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는 ‘원래 부설거사 부인인 묘화보살이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매화보살로 변한 것 같다’라며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을 기억하며 가지런한 돌담 밑으로 봄볕이 빠져나가는 길을 따라 내려오자 대웅전 처마 끝에 걸린 풍경 하나가 또다시 비워내며 배웅한다.

땡그랑 ∼ 땡그랑

시끄러움을 벗은 자리 / 멍울 하나 품었다

기억으로 채워진 공간 / 도드라진 흔적, 색 바랜 상념

불필요한 인연 걷어버린 / 뒷자리 바라보다

바보처럼 울었다. 《 떨켜 / 유용수 》

별것도 아닌 소소한 것이 행복한 날. 봄이 오는 자리에서 문득 떠오르는 법문 한 구절을 붙들고 있다.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 들으라.’ 는 2009년 어느 봄날, 길상사 법당에서 쏟아낸 법정스님 법문이 가슴을 채우고 있다. 혹여, 뒤돌아본 삶의 잔상이 스멀거린다면 보림사 꽃 진자리에 텅 빈 길을 걸어보시라. 걷다가 빠름에 숨 가쁘거든 허물어진 언덕에서 눈을 감고 기대어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그러다가 담장을 기댄 만삭의 매화 나뭇가지를 지나가는 맑은 바람맞으며 지친 일상을 위로받으시라. 토닥토닥 마음을 다독여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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