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한담 29 -눈길 동행
■ 장흥한담 29 -눈길 동행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4.0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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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수필가

진목리 마을에 봄날이 창궐했다. 오밀조밀 살아가는 마을 풍경은 어디를 가도 비슷하지만, 갯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삶은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익숙해야 한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주고(海不讓水) 조건 없이 내어주지만 삶은 가혹하고 모질다. 여느 바닷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짠 내음이 가득한 곳에 터를 잡은 진목마을도 치열한 삶의 끄나풀을 이어오다가 뇌록이 퇴색된 빛바랜 장승처럼 곱게 익은 채 고향의 정취를 쏟아내며 낯선 이를 포근하게 안아준다.

며칠 전, 소소리 바람을 보내고 나서야 칙칙한 겨울을 털어내고 한결 가벼운 몸놀림으로 이청준(1939∼2008) 선생의 생가 툇마루에 앉아 자연이 보내는 정겨운 손 짖에 넋을 놓고 있다가 머뭇머뭇 산길로 간다.

초입에는 겨울을 견디느라 수척해진 당산나무가 생살을 부풀리고 있다. 지난 늦가을 잔가지 끝에 남겨둔 떨켜가 몸을 풀면 연초록 잎사귀는 냉혹한 자연의 풍파를 견디어야 하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침묵의 가르침(不言之敎)*이 아닐까.

햇살이 머문 자리로 다소곳이 마중 나온 각시붓꽃과 노란 민들레. 숲을 밝힌 진달래와 산딸기꽃, 봄바람을 붙들고 있는 산 벚꽃이 흔들리는 정겨운 산길을 숨 가쁘게 오르자 보리밭에서 들려오는 보리피리 소리에 향기 묻은 어릴 적 봄날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해의 봄날도 이처럼 보리는 피었고 바람은 따스했다. 뉘엿뉘엿 필봉을 넘어가던 봄볕은 왜 그리도 가난한 돌담 집 봉창문을 기대고 있었을까. 할아버지의 받은 기침 소리와 함께 보릿고개를 넘기던 디딜방아 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았는지 들려오는 보리피리소리에 가슴 뭉클해짐은 비단 나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산길은 오래전 들었던 모자간의 발소리를 기억이라도 하는 듯 들꽃 한 포기마저도 예사롭지 않다. 키 작은 솜나물꽃이 낯가림을 하는지 심하게 흔들리고, 언덕에는 겨우내 맑은 향기를 채웠던 늙은 산벚나무가 만삭의 몸을 풀어 놓고 가쁜 숨 몰아쉬는 산지까끔에 와서야 뒤돌아본 갠나들의 짙푸른 바다는 어머니의 옥색 치마로 마을을 품고 있었다.

광주로 유학 간 아들에게 집이 팔린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 팔린 집을 빌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이고 구들장 아랫목에 하룻밤을 재우며 아침을 맞이한 어머니의 밤새 뒤척임은 어떠하였을까. 집이 팔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던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을 묻고 길을 나설 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을 차부까지 배웅했던 서글픈 산길로 일행은 깊숙이 들어와 있다.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겄냐. 눈발이 그친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 만 나란히 어어져 있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

간절하다 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와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 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님 그때 우시지 않어요?”

“울기만 했겄냐. 오목 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 이청준 「눈길 중에서」

질깔끄막에 와서야 목을 축이고 자리를 잡았다.

웅숭깊은 어머니의 사랑을 짊어진 빚이 없다며 애써 외면했던 화자話者의 뒤늦은 참회의 눈물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누구 하나 말을 하지 않았다. 혹독한 삶을 녹여낸 문학 자리로 들어와 생각도 언어도 내려놓고 한발 한발 진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작가의 심상을 헤아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길은 미혹迷惑의 어둠 속으로 끌고 갔고, 잡히지 않는 상념을 쏟게 만들었다. 산길에 찍힌 그 몹쓸 자국에 채워진 어머니의 눈물과 서러움을 밟고 지나왔다. 어머니가 뱉어낸 그 간절한 기도 소리가 우리를 안내 했다.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도, 마주친 진목교회 학생들과 두런거리며 사진을 찍을 때도 선걸음에 새벽길을 나선 서글픈 동행 길임을 잊지 않았기에 일행은 진중했고 곡진했다.

산길을 벗어나자 길은 환한 신작로를 향해 구부러져 있고 우람한 천관산은 말간 정기를 뿜어내며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며 말을 걸어왔다. 불어온 갯내음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질깔그막을 넘어온 산길에는 눈이 녹아 꽃이 피었고, 향기로웠고, 뭇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참괴한 전율과 아쉬운 외침이 공존한 눈길에서 들뜬 마음 가라앉히며 단순한 하루가 황홀한 날이 되길 갈망해 본다.

*도덕경 제43장에서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라고 했다. 말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자연) 이로움은 천하에서 미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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