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옛터산책(1)/ 장흥, 예부터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많은 낙토였다
장흥의 옛터산책(1)/ 장흥, 예부터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많은 낙토였다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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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후기 구석기 유적으로는 장흥군장 장동면 신북 구석기 유적이 가장 큰 유적으로 반경 13km안에 22개의 유적이 분포한 것은
당시로선 상당히 밀집된 상태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기 좋았던 환경이었음을 알려준다.

글- 朝天 梁 基 洙

광주 나들이에서 사람이 많이 오가는 건널목 길 언저리에 “동구로 전입 오시면 당신이 주인이 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광주 동구는 한때 광주의 주요 기관이 거의 위치하고 가장 많은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다. 그리고 현재 광주시의 인구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데 그들이 모두 어디로 갔기에 저런 현수막이 걸려있는 걸까? 허긴 내가 사는 장흥군도 한때 14만이라는 사람이 거주한 적 있다 그러나 지금은 4만을 채우지 못하고 있어 장흥군에서는 귀농, 귀촌인들에게 자금까지 지원을 하고 출산장려금까지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부터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쉽게 배불릴 수 있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한 곳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럼 지금의 장흥군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이 분야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장흥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를 지금부터 약4만-1만 년 전인 우리나라의 후기구석기시대부터라 보고 있다. 이는 국도 2호선 확장공사로 인해 2004년도에 발굴조사한 장동면 신북구석기 유적의 결과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당시 발굴조사를 맡은 이기길 교수(조선대)에 의하면 “한국의 후기 구석기 유적으로는 장동면 신북 구석기 유적이 가장 큰 유적으로 반경 13km안에 22개의 유적이 분포한 것은 당시로선 상당히 밀집된 상태로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기 좋았던 환경이었음을 알려준다” 하였다.

신북마을 구석기 유물분포지
신북마을 구석기 유물분포지

 

그 이후 장흥지역에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하였음을 증명하는 것들은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시대 별 유물유적이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특히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지석묘가 현재 장흥군 내에 214개소 2,253기가 조사되었다. 현재까지 한 고을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에서는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또한 지석묘와 같이한 시기의 유물산포지로 장흥읍 건산리 장흥중학교와 원도리 일대 그리고 대덕읍 도청리 일대의 유적과 방촌리 일대 등 곳곳에서 발견되어 장흥지역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했던 곳으로 많은 사람이 살아왔음을 확인케 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견되어진 유적유물과 간헐적인 발굴조사로서는 청동기시대 이후 철기시대를 지나 장흥지역의 지명이 보이기 시작한 백제시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실조사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학계에서 백제(百濟)가 전남지방을 장학한 시기를 369년(근초고왕24)으로 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498년(동성왕20)에 탐라(耽羅;제주도)를 항복받은 것으로 나타나 그동안의 행적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학설을 낳고 있다.

신북구석기 유적
신북구석기 유적

 

무엇보다도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경 한강(漢江) 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 지역에 분포 되어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이 있어 이를 마한(馬韓)이라 이름한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이 열기되어 있다. 소국의 큰 곳은 1만여 가(家), 작은 곳은 수천 가(家)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마한지역 소국 중에는 백제국(百濟國)처럼 북방계 유이민(流移民)의 정착을 계기로 하여 형성된 집단도 있고,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되는 집단도 있어 그 형성 시기가 일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고고학 자료를 놓고 볼 때, 마한지역 소국의 대부분은 서기전 3, 2세기 이래의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를 배경으로 대두된 다수의 정치 집단들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한 것으로 보고 이 지역에서는 서기전 2세기경에 이미 대외적으로 통일된 기능을 발휘하는 세력 구심체가 형성되어, 한(漢)나라와 원거리 통교(通交)를 시도 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결속 기반은 아직까지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복속 관

구석기 유물
구석기 유물

계나 마한 전역을 포괄하는 강력한 연맹체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더욱이 백제국의 세력권에 포함되지 않은 남부지역의 마한 소국들도 비록 세력권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상당한 변화를 거치면서 4세기 후반 백제근초고왕에 의하여 병합되기까지, 종래의 기반을 토대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지형적으로 남부지역에 위치한 장흥지역에는 어떤 소국이 있었고 그 위치는 과연 어디였을까?

1979년도에 “마한제국(馬韓諸國)의 위치시론(位置試論)”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천관우(千寬宇)교수는 지명변천을 중심으로 살피면서 장흥지역에 건마국(乾馬國)이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다소 의문점이 없진 않으나 그동안 조사 발굴된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으로 볼 때 장흥지역에는 분명 장흥지역만의 독득한 문화를 가진 강력한 마한의 한 소국(小國)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은 역사를 기록한 기록자의 것으로 신라에 멸망한 백제의 기록은 물론 백제의 지역에 속하였던 장흥지역에 대한 기록은 크게 발견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 아닌가 한다.

장흥지역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 언급된 것은 1145년(고려 인종 23)에 기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 최초이지만 삼국사기만으로는 그 위치나 지금의 장흥에 대한 기록은 알 수 없었다. 이를 알아 볼 수 있게 된 것은 1451년(조선 문종 1년)에 편찬한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의 전라도 장흥부 건치 연혁조에 의하여 비로소 백제시대에 장흥지역의 옛 이름들을 알게 되었다.

그 기록을 보면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오아(烏兒)로 이름을 고쳐 보성군(寶城郡)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때 정안현(定安縣)으로 고쳐 영암(靈巖) 임내(任內)에 속하였다. 인종(仁宗)이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하고, 원종(元宗) 6년 다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하였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 다시 내려 장흥부(長興府)가 되었다. 후에 왜구로 인하여 임시로 내지로 옮겼다. 별호가 정주(定州)다 또 호가 관산(冠山)이고, 천관산(天冠山)이 있다. 속현이 4이니” 하고 수녕현(遂寧縣), 회령현(會寧縣), 장택현(長澤縣),탐진현(耽津縣)…” 하고 속현들의 내력까지도 그 변천과정이 소개되어 있고 이를 이용해 이후 각종 지리지나 읍지(邑誌)에 까지 인용되어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이러한 문자의 기록이 없더라도 각각의 지역에 대한 역사적인 사항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기록은 없다. 이러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후대의 기록이지만 장흥지방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단정되는 기록이 보인다.

청동기 시대 유물
청동기 시대 유물

 

고려말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장흥으로 유배와 지낼 당시 기록한 “중녕산 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 동문선 제76권)의 기록이다. “…고을이 큰 바다 언덕에 위치하여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많다. 옛날에는 낙토(樂土)라고 일컬었다. …백성들은 순박하고 다스리는 일은 간소하여 이름난 어진 이와 재주있는 대부들로 조용히 다스릴 뿐 다른 공리심이 없는 자가 많이 이곳의 수령이 되었다.…”

이 기록은 후대의 읍지(邑誌)마다 장흥의 풍속을 적으면서 “예부터 낙토라 였고(古稱樂土) 백성들은 순박하고 다스리는 일은 간소하다(民淳事簡)”하였다. 곧 여기서 우리는 장흥지역이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 배불릴 수 있고, 삶에 어지러움이 없어 안정된 생활을 함으로 이를 관장하는 고을관리 역시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니 말이다.

예전에 이러하던 장흥이 지금은 어떠한가? 고향을 떠난 향우를 부르고 있고, 기왕이면 장흥 땅에서 함께 살자고 하소연을 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 선사시대의 장흥을 돌아보는 것도 이러한 시각에서이다.

올해로 지방자치단체의 의회가 부활한 지 28년째이 고, 지방자치단체장을 뽑아 우리군민 스스로가 우리 장흥을 꾸려 온지가 24년째 접어든다 어쩜 우리의 지방정치도 성년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오는 6월이면 다시 지방선거가 있어 장흥을 위해 일하게될 사람을 선출한다. 그들을 선출하는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지역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 그들의 능력과 역량이 충분하였으면 한다.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오늘날 구하고자 한다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쉽게 얻을 수 있고 원하는 일은 어디서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만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낭만과 문화적인 낙토를 원하고 있다.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많은 살기 좋은 장흥. 이는 단순하게 배고픔을 해소하고자 했던 시절을 돌아보자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장흥 이곳을 다시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많은 살기 좋은 장흥”을 만들어 보자는 얘기다.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산과 들, 강과 바다 이를 지키며 이상을 키워갈 수 있는 곳. 너와 내가 낭만이 넘쳐나는 낙토장흥을 말이다.

부산면 주거지 유적
부산면 지동마을 주거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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