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 30 -사월 우중산책
■장흥한담 30 -사월 우중산책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4.2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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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수필가

사월 초순, 억불산 청미래 덩굴이 새잎을 돋았고 볼품없이 시든 청 가시 줄기도 초록색으로 변해가며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음을 본다. 봄비 오는 날, 홀쭉해진 산길을 사부작거리며 오르는 발걸음은 들뜨지 않는 차분함이 절정을 이룬다. 길을 걷는 걸음과 가쁜 숨소리가 산과 하나 될 때 자연이 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낀다.

우산을 접고 숲으로 떨어지는 사월 봄비 소리를 듣고 있다. 봄은 약동하고 산은 생명을 품었고 땅에서는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그래서 봄은 꽃으로 향기롭고 여름은 녹음으로 향기로우며 가을은 단풍으로 향기롭고 겨울은 비움으로써 향기롭다고 하는 걸까.

억불산에 내려앉았던 겨울 잿빛은 사라지고 생명이 꿈틀거리는 봄 냄새가 앙가슴을 먼저 자극한다. 몸을 낮추고 보아야 신비로운 우리 꽃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봄까치꽃, 노란 양지꽃과 민들레, 자줏빛 제비꽃, 구슬봉이꽃, 현호색, 남산 제비꽃, 개구리 발톱, 키 작은 솜나물꽃, 산딸기꽃, 꽃대를 들어 올린 춘란, 무리 지어 핀 흰 제비꽃, 산자고, 이스라지, 금창초, 몽올진 뱀딸기꽃, 살갈퀴꽃, 봄맞이꽃, 광대나물꽃, 자주괴불주머니꽃과 이름을 알지 못해 애를 태웠던 노란 연복초꽃이 어느 곳에 있든 다투지 않고 피고 지고는 억불산은 가치를 논할 수 없는 야생화 공원이다.

소복소복 뱉어내는 봄비에 청초한 꽃망울이 도드라진 자드락길을 따라 우산을 접고 낯설지 않은 것들과 눈 맞춤하며 걷는다. 가을이면 달맞이꽃이 마중 나오던 자리로 하얀 산벚꽃과 붉은 개복숭아 꽃잎이 떨어진다. ‘얼마나 아파야 꽃잎은 떨어지는 걸까.’*화려함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자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이 헝클어놓은 꽃자리다. 하늘에 핀 화려한 교만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풀잎 위에 다시 한번 앙증스럽게 매달려 사월을 유혹하는 개복숭아 꽃잎은 영산홍 잎에 달라붙어 후줄근히 적신 모습이 정갈하고 산비탈 소나무는 솔잎을 곧추세웠고 황칠나무는 봄물을 끓어 올려 번들거리고 핏기를 잃고 묵묵히 기다리던 계수나무는 초록 잎을 틔워 살 오른 나무의 우직함을 닮아가고 있다.

산길이 촉촉하다.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적요한 자리로 가고 있음에 행복하다. 소란스러움을 벗어난 길은 나를 위해 곱게 굽었고 산바람은 갈급한 마음을 씻어주고 있음에 감사하다. 몸을 낮추지 않으면 작은 야생화는 보이지 않는다. 기꺼이 무릎을 꿇고 마주해야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더 낮추고 낮추어야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을 되 뇌이며 비탈진 언덕에 피어있는 고깔제비꽃과 눈 맞춤 해본다. 한 번도 눈 맞춤 해보지 못한 꽃에게는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는 그 자체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아니겠는가. 나는 누군가로부터 단 한 번이라도 꽃을 보는 마음으로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늙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농염한 산새와 함께 솔숲으로 모여드는 낯익은 소리를 귀를 열고 듣고 있다. 이 순간만은 몸 안에 익은 잡사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비우지 않고서는 청량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에 끝없이 돋아나는 욕심과 갈등을 넘나들었던 긴 시간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순간, 헐떡이며 걸어왔던 길을 한 번쯤 뒤돌아보는 지혜를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아둔한 삶이 아쉽게 밀려온다. 무엇이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게 하였을까. ‘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결국 고통(有求皆苦)이고 구함이 없으면 즐겁다(無求乃樂)’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비루한 삶을 꾸역거리며 채워가는 욕심으로 밀어내고 밀어냈다.

자연은 친소(親疏)가 없다.

오늘 만난 꽃에게도 절절한 전설 하나쯤은 품고 있고 산길에서 마주한 볼품없는 나무도 내게 그늘이 되어주고 길을 안내하고 안부를 묻고 있음을 알았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바람이 심란한 내 마음을 토닥이고 있음도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늘 봄비 속으로 들어와 한적한 산길을 걸으며 유유자적하는 이 모습이 참 좋다. 우리 모두 균형 있는 삶을 바란다면 자연 앞에 순응하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장자는 자연을 닮은 지혜가 무위의 삶이라고 하지 않던가.

“숲에서는 생각을 버리고 언어를 내려놓아야 한다/그래야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간절할 때에는 한 번쯤 우두커니 가 되어야 한다/그래야 침묵이 길을 안내한다.”- 시인 유용수 시 ‘침묵이 길을 안내한다’에서

억불산 자드락길은 생각을 버리고 걷고 싶은 길이다.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소중한 무언가를 놓치고 살아가는 나를 발견 할 수 있을 것 같다. 편백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후줄근해진 등골을 씻어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숲의 회랑으로 들어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뒤틀린 삶을 위로받는다. 이제 봄비가 그치고 산꽃도 지고 나면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억불산 자드락길을 오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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