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동네 우리마을/장흥읍 원도마을
■ 우리동네 우리마을/장흥읍 원도마을
  • 김선욱
  • 승인 2018.07.2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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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사역이 있었던 고촌-지금은 시내권으로 편입
장흥의 근대 인물 ‘서울대 철학교수 김두헌빅사’ 생가마을
600여 세대 코아루해피트리, 토광미르채아파트 입지-‘성세’
하늘에서 본 원도리 전경
하늘에서 본 원도리 전경

■마을 환경

바이오산단에서 서남쪽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 읍내 주변 마을이다.

그러나 마을 앞으로 엣 장흥교도소와 장흥농업기슬센터가 위치해 있으며 지난 해부터 원도 1구 마을과 원도 2구 마을 사이에 374세대 규모 코아루 해피트리 아파트단지와 210세대 토광미르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급격히 시내권으로 편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마을 원도리는 제암산과 사자산을 진산으로 하고 있는 원도마을은 마을 바로 뒤편에 해발 150m 정도의 야산(산짓동)이 있다. 마을 앞으로 실개천과 마을 뒤편 북쪽으로 개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뒤 개천가에는 하얀 모래가 쌓여 장관을 이루어 이곳을 백사리(白沙里)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원도리는 산짓동이라는 구릉을 점점으로 이루어진 형국이다.

마을 앞 들녘 북쪽으로 큰 방죽이 있었는데, 해방 후 수리개량조합에서 저수지로 개축하였다.

산짓둥은 어른들의 쉼터요 이런저런 유휴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마을 앞 들녘에는 공알바위가 있는데 이 공알 바위의 껍질이 벗겨지면 처녀나 과부가 바람이 난다는 설에 의해 공알바위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또 마을 앞 도로변에는 공동우물로 사용되었던 통시암(샘)이 있는데, 수도시설이 갖추어지기 전 마을 아낙들이 물동이로 식수를 길어 나르기도 하고 이곳에서 빨래를 하기도 했다.

원도리 마을회관
원도리 마을회관
회관앞 정자나무와 소공원
회관앞 정자나무와 소공원
친절한 원도리 할머니들
친절한 원도리 할머니들

■원도 마을의 연혁

원도 마을은, 1067년경(또는 고려 인종 때) 왕조의 공공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이던 역참(驛站)인 ‘벽산역(碧山驛)’이 현재의 관덕리 동백(冬柏)마을에 조성되면서 역무에 종사자들이 역참 주변지인 지금의 원도마을 터에 거주하게 됨에 따라 마을이 자연스레 형성되면서 본래의 마을 이름은 ‘역촌(驛村)’으로 불렸다.

이후 1457년에 ‘벽산역(碧山驛)’이 ‘벽사역(碧沙驛)’으로 이름이 바뀌고, 찰방(察訪)이 집무하면서 전라좌도(全羅左道) 9개소의 역승(驛丞)을 관리하게 되어 보다 많은 역무(驛務)를 수행하는 종사자가 늘어나면서 마을이 확대되면서 찰방(察訪)이 집무하던 관아(官衙)와 마방(馬房)이 있는 곳을 중심마을로 하여 아래쪽에 위치하므로 ‘벽계하리(碧溪下里)’, ‘벽계리(碧溪里)’라 하여 1896년 역참제(驛站制)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다가 1900년경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원도리(元道里)’로 개명되었다.

또 ‘원도리’라는 이름은 전라감사 역임하고 형조참판을 지내던 원두표(元斗杓)가 1642년도에 묵어간 마을이라 하여 일본인들이 ‘원두’라는 발음을 하지 못하고 ‘원도’라 발음하게 되면서부터 ‘원도리(元道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 벽사역이 전라좌도의 역승역(驛丞驛) 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묵어갈 수 있는 원(院)까지 관장하는 가장 우두머리가 되는 곳이라 하여 ‘원두(院頭)’ ‘원두골’이라 불렀던 것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원도(元道)’가 되었다고도 전한다.(이상 양기수 글)

원도마을은 이처럼 일제강점기 때 원도(元道)로 부르게 되었으며, 조선조에는 장흥부 부동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영 개편 때 조정에 따라 연곡리(淵谷里)를 병합하여 원도리(元道里)라 하였으며, 1932년 장흥면(읍)에 편입되었다.

벽사역이 원도리와 관덕리의 접지에 설치되면서 역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인종 때 김해김씨 정지(挺之)의 4대손인 김성남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부터 김해김씨 세거촌을 이루며 성촌이 되었다.

원도마을은 근대에 이르러 1962년도 ‘장흥군농업기술센터의 개설(1962), 1975年 4월부터 장흥교도소 신설(1975.4)이 되면서 시가지적 성격을 띤 마을로 변모되고 있다.

또 1982년 2월 1일부로 '원도리'의 일부 신시가지를 분구하면서 본마을과 연곡마을은 원도1구로 신도마을은 원도2구가 되었다(양기수 글)

■마을 개발 변천사

▲도로(신작로)=오래 전부터 마을 앞으로 상리, 금성 등 북쪽으로 오르는 1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으나, 바이오산단 조성으로 산단 진입 도로로서 기능을 위해 2015년 마을회관 앞에서 바이오산단까지 2차선 도로로 화장 개설되었다. 그러나 마을회관에서 장흥 읍내로 진입하는 농업기술센터까지는 여전히 1차로 도로여서 병목 구간이 되므로써 많은 불편을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붕개량=1970년대 새마을 개발사업으로 초가집에서 지붕은 기와, 슬래트 양철 지붕으로 개량되거나 슬라브조 벽동집으로 개량 신축되었으며, 최근 들어 스래트 지붕 등 철조 기와 등으로 개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타 개발사업=2008년에 마을 회관이 건립되었고 경리정리는 1971년에 완료되었다.

또 난방의 경우, 1970년까지는 전 주민이 땔감으로 난방 해결을 하였다. 땔감은 주로 제암산 영골재나 탁골재 등에서 확보하였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연탄으로 난방을 대용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 대부터는 연탄, 화목, 석유보일러 등으로 교체하였으며, 일부 가옥에서는 태양광이나 태양열 온수 시스템을 설치해 사용해오고 있다.

식수는 마을 앞 도로변에 있었던 통시암이라는 공동우물에서 길러다 식수로 사용했다가 2012년에 상수도가 보급되었다.

마을 주택은 1970년도 이전에 거의 초가집이었으나 이후 초가집 지붕을 함석, 스레트 등으로 개량하였고, 1980년도에 들어서며 시멘트 기와지붕으로 개량되었고 1990년도에 들어서며 슬라브조 집이나 콘크리트집으로 개축되거나 신축되고 있다.

1990년도에 마을 앞 도로변이나 주요 골목에 모든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마을의 전기 시설은 1971년에 마을 전 체 가구에 보급되었다. 전화는 1977년에 일부 가정에 보급되어 오다가 1990년도에 거의 전체 가구에 보급되었다.

교통편으로 장흥읍에서 원도리를 거쳐 금산리 방향으로 왕래하는 버스가 운영되고 있는데 하루에 5회 버스가 왕래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인물

▶김두헌(1903~1981)=호:예동, 철학자-교육자. 1929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윤리학과를 졸업하였다. 동년 이화여전 강사, 1930∼1934년 혜화전문 교수, 1945년 잠시 대동상업학교 교장직을 맡다가 그해에 진단학회 상임위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부교수가 되고, 1946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주임 교수가 되었다.

1949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고등교육국장, 1952년 전북대학교 총장이 되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윤리학)이 되었다. 1960년 건국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하고, 1967년 서울로터리클럽 회장, 1969년 중국문화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0∼1981년 윤리학회 회장, 1972년 건국대학교 대학원 명예교수가 되었다.

국민훈장 모란장·학술원 공로상·문화훈장 대통령장·서울특별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윤리학개론》 《조선가족제도연구》 《도의원론》 《민족원론》 《현대사회사상》 《서양윤리학사》 등이 있다.

▶정두채(1913∼2015)=1913년 생으로, 별세 당시 장흥군 최고령자로 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때 고등전형시험(행정 사무관) 합격으로 광주전신전화국 서무과장을 거쳐 체신부 우정국 검열과분실장(2급 비밀취급), 장흥 강진 해남 우체국장을 역임했다.

퇴직 후, 장흥군 경로효친자문위원장, 장흥 수성당장, 장흥 궁도협회장을 역임했다. 녹조소성훈장, 대통령 표창, 체신부장관상 표창(3회), 광주 체신청장 표창(4회)를 수상했다. 가족으로 처 최판례씨와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정정진 전 장흥군의회의장이다.

▶정정진(1937∼)=1999. 03. 12 장흥군의회의원(장흥읍) 보궐선거에 당선, 장흥군의회 의원이 되었다. 2000년 제3대 장흥군의회후반기 의장단 선거에서 의장에 당선, 의장직을 수행했다. 장흥중고 총동문회장, 장흥문화동호인회장, 장흥지원가사조정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장흥군의정회장(현), 장흥군보림국악진흥회장(현), 전남축구협회 고문(현)직을 역임하고 있다.

▶김화자(1950∼)= 1956년 생으로 2006년, 장흥군의회 사상 최초로 여성 군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06년 장흥군의회 부의장, 2010년 장흥군의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 2010년에 장흥군의회 의원선거에 당선, 재선의원이 됐으며, 2014년 장흥군의회의원선거에 당선, 3선의원이 되었다.

■마을 기타인물들

▶전대 인물

△김두환-수리조합장 △김장곤-양산경찰서 총경△김인곤-여수경찰서 수사과장,총경 △김두배-한겨레신문 장흥지국장

▶현대의 인물

조국선-회진면장/조기홍-장흥군청 서기관(퇴직)/김재삼-장흥군청 지적계장(퇴직)/이경현- : 장흥군청 계장(현)/조명수-변호사(서울)/백옥순-장흥군 동파파출소장/고장훈-마을발전 공로자(마을회관 건립 때 1천만원 기탁)/김종헌-김인곤 子, 통일교 일본 선교사/윤봉근-동아일보 장흥지국장

▶역대 이장 명단

김홍연(1948)/신경희(1952)/김호동(1960)/홍준표(1968)/방남섭(1997)/임순(1994)/김옥태(2001)/박준열(2002-현)-가로안은 취임연도

▶역대 새마을지도자

임순(1948)/박준열(1989)/방종섭(2001)/방상기(2014)

▶역대 부녀회장

강길님(1980)/이병님(1988)/이애자(2001)/김유아(2017)

■문화유적

▶ 팽나무(정자나무)=마을 앞에 수령 300년의 노거수 팽나무가 있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마을 앞에서 풍년농사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유교 유적=연곡서원(연곡리편에서)

글-김선욱/사진-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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