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담(1)- 한재공원 할미꽃
■장흥한담(1)- 한재공원 할미꽃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08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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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수필가

말도 없이 내 새끼가...../ 이 밤에 어짠 일이당가 / 맨발로 뛰어나온 등굽은 몸뚱이/ 휘어지고 메마른 손으로 덥석 안아주던 / 포근하고 따뜻한 가픈 숨소리 / 헤아릴 수 없는 주름 /움푹 패인 눈 / 목을 막는 가느다란 숨결 / 그리고 외로움까지 //내 새끼 어서 들어가자//하얀 머리카락 속에 /젊은 진홍빛 교태 는/시나브로 사위고 사위어 / 앙상한 꽃대가 묘지석이 되었다//내 새 끼 또 왔다 가라/3월 바람과 함께 / 귓전을 맴도는 소리에 / 볼을 타고 흐르는 그리움

-유용수시인 시 ‘할미꽃’ 전문

아직도 바람이 맵다. 한재의 봄은 응달진 곳으로 밀려들고, 바다는 짙푸름으로 본성을 끄집어내다가 봄볕에 수굿한 모습으로 고요하다. 어젯밤 교교한 달빛은 어느 곳에 머물다 갔을까. 어둠을 가르던 별 빛은 스며들었을까. 겨울을 감내했던 푸른 소나무에 봄 풍경이 덜퍽지게 내려앉아 안온하게 안아주는 이곳이 장흥군 회진면 덕산리 할미꽃 한재 공원이다.

발길이 끊긴 긴 시간. 바닷바람과 해무가 고개를 넘나들 때마다 누렇게 누운 풀들은 모진 겨울, 봄을 기다리며 화려했던 과거를 털어냈다. 봄바람은 바짝 마른 풀잎을 들 이며 도린곁 끝자리에서부터 새생명을 싱그럽게 피워낼 것이고, 평화로운 고갯길에 밤새 신열을 앓던 마른 나뭇가지에 소솔한 바람이 풍경을 만들어 갈 것이다. 설레고 흥겨운 봄을 기다리는 한재는 훈습(薰習)된 맑은 햇살과 청징한 바람이 본래 그 자리에서 나고 자란 노란복수초와 봄볕에 꾸벅이는 할미꽃을 깨우고 있다. 며칠 전, 봄비는 늦가을 털어낸 나뭇가지 마디마디에 촉촉이 봄을 알려주었다. 그래서인지 누런 풀밭은 속살이 푸르러지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 만삭의 몸이 되어 평화로운 고립의 시간이 흐르고, 바닷바람 은 익숙하게 한재로 봄을 실어 나르며 세상을 뜨겁게 분탕질을 해 대니 슬픈 추억과 사랑의 굴레를 땅속에 묻어둔 할미꽃들이 아우성으로 돋아나고 있다. 봄볕에 나릇 해진 숲에 눌러앉아 고달픈 삶을 살다간 흔적들을 바라보며 소박한 망중한을 만끽한다. 산의 풍경 과 바다의 풍경이 교차되는 한재는 할미꽃이 이미 고개를 숙였고, 잔털은 거친 바람에 한들거리지만 진홍빛 꽃등불이 봄을 밝히고 있다.

멀리 고흥반도와 소록도 그리고 크고 작은 섬들을 품고 사는 덕도 (신상리, 신덕리, 대리)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과 싸우고자 이 고개를 넘었고, 동학군은 새로운 세상을 외치며 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에는 공출나락을 이고 지고 울분을 토하며 넘었고, 3.1 운동 때에는 대덕장터로 만세를 부르러 넘었고, 6.25 비극 때에는 인민군과 경찰이 서로 맞서며 이 고개를 넘었다. 또한, 몇 해 전까지 만해도 소들이 모여들었고 꼴망태를 짊어지고 꼴을 베고, 땔나무를 하고 지게를 내려놓고 씨름을 하며 떨어져 나간 삶의 한쪽을 고스란히 채우던 곳이다.

한재고개 번덕지는 뜨겁고 격렬 했던 역사의 한복판에서 질곡의 사선을 넘어온 사람들의 휴식처이고 안식처이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만남의 장소이고 눈물과 한숨을 쏟아낸 장소이고 맺힌 한과 서러움을 풀어내는 해원(解寃)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재에서 자신을 칭찬하거나 남을 헐뜯지 않았던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의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사람 냄새가 풀풀한 한재에 선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매년 슬픈 할미꽃이 전설을 머금고 곱게 피어난다. 산골 마을에 어린 두 손녀만 을 키우며 어렵게 살아가는 할머니가 손녀들을 키워 시집을 보냈는데, 예쁜 언니는 이웃 마을 부잣집으로, 동생은 아주 먼 곳 가난 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가까이 사는 큰 손녀는 할머니를 늘 구박하고 소홀히 대했다. 할머니는 마음씨 착한 작은 손녀가 그리워 해 짧은 겨울 길을 나섰지만, 손녀가 사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작은 손녀는 자기집 뒷동산 양지 바른 곳에 할머니를 묻었는데, 이듬해 봄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 한 포기가 나와 할머니의 구부러진 허리처럼 땅을 딛고 진홍빛 꽃 을 피어낸 할미꽃.

‘참되게 사는 길이 어떤 것인가’ 를 생각하게 한다는 망월정 정자에서 해와 달이 살을 섞어서 만들었다는 노을을 바라본다. 대지는 빨려들고 바다는 붉게 물들이며 덕도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잔잔한 바다에 윤슬처럼 빛나는 잔물결 사이로 생채기 난 세월만큼 더디게 치유되는 삶의 끝자리를 얹어놓는다. 얼마를 더 덜어내야 가벼워지는 걸까. 몸에 묻은 욕심 의 유혹을 털어내고 가슴으로 파고드는 어리석음을 깨달으며 마음 의 흐름을 살피고 싶다

혹여, 나를 짓누르는 삶을 짊어지고 있다면 한재로 가만히 오시라.

화석처럼 굳어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다면 가만히 왔다 가시라. 지치고 망가진 몸 덜어내고 털어내어 올곧은 마음을 챙기고 가시라. 한재는 지금 아침에는 꽃이 피고 저녁에는 달이 뜨는 화조월석(花朝月夕)이다.

시인-수필가 유용수
시인-수필가 유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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