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한담 31- 제암산에 묻힌 광불암
■ 장흥한담 31- 제암산에 묻힌 광불암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5.1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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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시인.수필가

5월 바람이 산길에 돋아난 곰취잎을 흔들고 있다.

걸음을 멈칫거릴 때마다 꽃들은 흔들리고, 땅을 헤집는 금창초와 큰봄까치꽃(큰개불알꽃)이 발길을 붙든다. 바람은 길을 따라 유적 하게 흘러 산허리를 지나고 있고, 향긋한 꽃바람에 취한 흰나비는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의 경계를 넘나들며 맴돈다. 아마도 봄볕을 더 많이 누리고 싶은 것일까. 오월의 포근한 그리움처럼 곱게 내린 이슬 밭을 털어내고 여유롭게 산길을 오른다. 비탈진 곳에서는 속살을 내보인 산죽이 오월 바람에도 소스라치게 흔들리는 걸 보면 힘들게 버티어온 흙 한 줌이 떨어져 나간 산속의 푸른 댓잎의 생사가 안타깝다.

장흥군 장동면 제암산 산동마을 오월은

봄물이 흐르고 바람에 적요하다. 오래전,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금강사란 절은 어디서 찾을까. 마을에서 구전으로 떠도는 정수암과 연하동 절터, 대밭골 이승암 절터, 도장골 절터, 두릉박 절터, 버드나무 절터, 임진 절터, 중바우, 중둠벙 등 불교나 사찰, 암자 등과 관련된 지명이 마을 주변에 서리서리 굳어 있다. 산을 오르며 꾸역꾸역 데워진 가슴속에서는 더럽혀지고 뒤틀린 속살들을 토해낸다.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꾸역거리는 분노가 빠져나가기를 간절히 바래보고, 밤새워 붙들고 있는 욕심 또한, 소나무 한그루가 털어낸 송홧가루로 깨끗이 털어내고 싶다.

장흥군과 보성군을 경계하는 제암산.

삼정승 육판서가 나온다는 명당과 천석궁 부자와 아홉 명의 공신이 나올 자리가 있다는 산. 도선국사의 옥룡자 유산가에 제암산 어느 곳에 왕이 나올 군왕지가 있다고 전해지는 산으로 봄볕이 부윰히 내려앉은 자갈길을 오르다가 뒤돌아서 굽이치는 짙푸른 능선을 담아본다. 확 트인 전경과 아기자기 이어지는 실핏줄 같은 길에는 뒤엉켜진 우리들의 삶이 꿈틀거린다.

노란 양지꽃이 길 한가운데서 근근이 피었다.

갈증을 많이 느꼈을까. 살아남고자 현실에 맞게 변했을까. 사랑스러움의 꽃말을 숨기고 꽃은 작아지고 잎사귀도 작아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산물이 방울방울 맺힌 산도랑 옆 양지꽃은 탐스럽다. 하지만 잔자갈 벗겨진 길 한가운데에서 누구하고도 눈 맞춤 한번 해보지 못한 이 꽃이 가슴에 와 닿으면서 갑자기「내 안에 흐르는 삶은 무엇일까.」를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어떤 상처 하나가 옹이처럼 자리하고 있을까.」하늘 창문이 열린 산허리에서 내 안에서 머뭇거리며 비워내지 못한 것들을 보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바람이 길을 내고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 견디다 쓰러졌을까. 수북이 쌓인 너덜바위지대를 따라 오른다. 오래전 흔적들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피어난 현호색과 자주괴불주머니꽃을 지나 바람마저 머뭇거리는 마애미륵 부처 앞에 서 있다.

섬세하게 새겨놓았다.

어느 불심 깊은 석공이 진흙밭에 그림 그리듯 흐트러짐 없이 새겨놓은 마애 미륵부처는 한없는 자비로움으로 산 중턱에서 소리 없이 불법을 사르고 있다. 돌계단을 오를 때마다 어느 스님의 위대한 원력願力에 놀랍다. 20여 년 동안 장비 하나 없이 오직 손과 쇠스랑, 괭이 하나만으로 산에 길을 내고 돌계단을 놓아 사라 저간 흔적들을 연결했다고 하니 스님의 번뇌는 다 녹아 사그라졌을까.

산새 한 마리가 전설을 지키는 걸까.

산새가 회를 치는 곳으로 몸을 밀어 넣자 반기는 것은 곤궁하게 붙들고 있는 비루한 암자의 석축이다. 텅 빈 암자 터에는 깨진 기왓장과 몇 조각 사금파리뿐이다.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전설이 되어버린 암자의 내력을 노란 피나물꽃들은 알고 있을까. 비워진 암자 터(광불암)에 올곧게 새겨진 마애 지장보살, 마애 관세음보살 여래와 길 끝에서 만나는 마애 석가모니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린다. 제암산에 창궐했던 불국토의 꿈은 사라지고 늙은 팽나무 한그루만이 봄물을 빨아올리며 바람에 흔들린다.

초라한 조립식 암자(광불암)는 굳게 잠겨있다.

위건개(충지스님)가 고려 고종 31년(1244년) 19살 나이에 장원급제한 후 28살까지 관직 생활을 하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기 위해 최초로 수행했다고 전해지는 광불암. 순천 송광사 6대 국사가 된 원감국사 충지스님이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세상을 피해서 조용히 살고자 했던 유거(幽居) 한 수를 끄집어 내어본다.

『첨단선요월 檐短先邀月 / 추녀가 짧아 달을 먼저 맞이하고

장저불애산 牆低不礙山 / 담장이 낮아 산을 가리지 못하는구나

우여계수급 雨餘溪水急 / 비 갠 뒤라 계곡물 급히 흐르고

풍정영운한 風定嶺雲閑 / 바람이 그치니 고개에 구름만 가득하다.』

늙은 팽나무 아래에는

속계의 잔상을 지워내기 위해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행했을 자리가 아직도 정갈하게 남아서 올곧은 정신을 말하고 있고, 사명대사가 수행했다는 사명암지와 서산대사의 스승인 각민 선사가 수행했다는 병풍암지에서 깨진 기왓장을 매만지며, 바위틈에 핀 희고 흰 바위말발도리꽃처럼 청초(淸楚)했을 수행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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