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역사산책 - 장흥 서원의 시작이 된 ‘예양서원’ 관련 기록의 역설
■장흥의 역사산책 - 장흥 서원의 시작이 된 ‘예양서원’ 관련 기록의 역설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5.1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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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魏聖)/장흥 향토사학자

기록은 후세에 남는 글이다. 사람들은 전해오는 말보다 더 믿고 의지하여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또한 역사적 근거로 제시한다. 그래서 창작이 아닌 사실을 글로 쓰는 사람은 객관적이어야 하고 더 사실적이어야 하며 역사적 소명 의식과 책임을 다하는 자세로 써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자기 보호적이거나 기록한 사람의 집단 이익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나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이 그 시대의 최고 기록물이긴 하지만 역사적 소명의 자기변명 서(書)라 하지 않는가. 하나의 사실을 두고 사람이 다르니 보는 것이 다르고 자기 자신 만큼만 보고 기록했다. 기록한 사람의 관점에 따라 취사선택이 있기 때문 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다음과 같은 장흥 예양서원(汭陽書院)의 예(例)를 제시한다.

■ 제1자료 ‘장흥의 서원과 사우’의 기록

-장흥 문화원 2012년, 윤수옥 편저

이 원사는 1521년(중종16년) 신사무옥(辛巳誣獄:1521년 중종16년, 관상감 판관 송사련과 그의 처남인 정상이 안처겸의 모친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역모를 모의 했다고 거짓 고변한 사건) 때 장흥에 유배 되어온 영천(靈川) 신잠(신潛)(1491~1554. 호 영천. 본관 고령. 문인화가이다. 신사무옥 때 안처겸의 사건에 연류 되어 장흥으로 유배 와서 17년을 살았다. 장흥에서 백광홍의 학문의 길을 잡아주었고 인종 때 복직되어 태인 현감 재직시 기봉을 일제 이항의 제자로 소개했다. 예양서원에 배향되었다)이 장흥지방의 민속(民俗)을 순화시킴에 장흥의 사림士林)들이 이를 존경하여 모범으로 삼고 1610년(광해군2) 여론을 모아 영천사(靈川祠)를 창건하여 영천을 배향(配享)해 왔다.

그후 1653년(효종4년)에 월봉(月峰) 김광원(金光遠, 1478~1550:본관 영광, 호 월봉, 조광조의 문인으로 예양서원에 배향되었다)과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 본관 강릉, 호 천방. 율곡의 문인-율곡보다 34살이 위다-이다. 평생을 후진 양성과 처사로 살았다. 유고가 있다. 수제자는 반곡 정경달 청계 위덕의 등이다. 예양서원에 배향되었다)을 추가로 모시고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3 : 본관 죽산, 조선 중기 의병장이다. 호남충의록에 등재되고 시호는 문강이다. 유고가 있다)이 축문을 지었다.

함께 모신 12년 뒤인 1664년에 사우(祠宇)를 수리하여 3현(三賢)을 제자리에 안치(安置)하는 날에 장흥에 유배되어 왔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 본관 의령. 호 추강.조선전기 문신. 생육신의 한사람이다. 세상을 등지고 유랑생활로 인생을 마쳤다. 본문에 장흥으로 유배 왔다고 하였으나 귀양살이 한 적이 없고 남유南遊 때 장흥에 꽤 오래 머문 것으로 보인다. 김종직의 문인이고 현덕왕후의 소릉 복원을 주장하였다 하여 부관참시를 당했다. 예양서원에 배향되었다)을 함께 모시자는 발의를 하고 이에 따른 예(禮)를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 : 본관 은진, 호 우암. 조선의 문신이고 성리학자다. 노론의 영수이다)의 고유문에 따라 자리의 순서를 동서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하여 제도는 황산서원(黃山書院)에 따르고 예(禮)는 소현서원(紹賢書院)에 따랐다.

1681년(숙종7년)에 다시 장흥 벽사역(碧沙驛)에 유배되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 본관 한산. 호 목은. 고려말 성리학자며 문신으로 시호는 문정이다. 고려에 성리학을 소개, 확산 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장흥 벽사역으로 유배되었다. 예양서원에 배향되었다)을 추배하여 연벽(聯璧)으로 모시니 연대순으로 목은, 추강, 영천, 월봉, 천방 등을 봄가을로 제향(祭享)해 오다 1869년(고종6년)에 훼철(毁撤) 당하고 그 해 10월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1927년에 강당을 중건하여 단(壇)으로 다시 모셨으며 1975년 신실(神室)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예양서원의 건물은 신실(崇賢廟) 3칸, 강당(汭陽書院) 4칸, 직사(直舍)1동, 기타 부속건물2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신실 건축양식은 팔작집이다.

제2자료《장흥읍지 정묘지》의 기록

-부산방 人物條 南行편

金光遠: 塊子, 号月峰, 靜庵門人, 中宗正德己卯, 以習讀官中, 遭士禍謫海南, 鄭相光弼, 力救防歸田里, 學問爲湖嶺矜式, 孝友爲子孫模範, 隱峰安先生, 首發建祠之議, 合享李牧隱書院, 尤菴宋先生製祝文.

김광원: 塊의 아들로 호는 월봉이고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다. 중종 정덕 기묘년(1519년)에 습독관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기묘사화(1519년 중종14년 음력 11월에 조광조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가 원인으로 남곤, 심정 홍경주등 신진사림의 핵심 인물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유배 한 사건)를 만나 해남으로 귀양 갔으나, 승상 정광필(1462~1538 : 본관 동래. 호 수부. 삼포왜란 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진압한 공로로 병조판서와 우참찬을 역임되었다)이 힘써 구해 석방되어 고향 마을로 돌아와 학문에 힘써 호남과 영남에서 존경 받았다. 효우 하여 자손에게 모범이 되었다. 은봉 안방준 선생이 사당을 건립하자는 논의를 처음 내 목은 이색의 서원(예양서원)에 함께 배향 되었고 우암 송시열 선생이 축문을 지었다.

제3자료 1871년 ‘장흥다사 품목’의 기록

-장흥다사 이후석등 55명

鄕中多士稟目

鑑伏以本府司馬畓推尋復古事去秋太學東齋通文來到而 官題內自校中査實以稟事敎是乎所其時校任只以無文可據云而一不得査淂〖得〗至于今者豈不
慨然也哉盖本府司馬畓始於 成廟朝賜田鄕學之時而本府久闕生進司馬▣(齋)主張無人且當▣(火)變乃付於本府汭陽祠而汭陽祠爲司馬所亦久矣汭陽祠
▣(則)萬曆壬子本府鄕先生丁霽巖李淸江以斯文會友之意建此祠於汭江之上以己卯賢人申靈川爲宗而以鄕先生劉天放幷享之矣厥後幾年以李牧隱▣秋江兩先生追享又後幾十年配享金月峯焉是乃此邑之本所也故司馬齋之付於此者實由此也此祠五賢後裔中獨金月峰之後孫多在此邑主張院財
▣▣馬畓矣再昨年自 上司有毁院之令而此祠亦在毁掇中其材瓦則依令飭付之公廨畓土則自是司馬畓付來之物故不爲錄上於 上司而自本府校中亦卽
▣推尋矣到今則月峰後孫○○○○○○輩都奪爲渠之私庄而古來文蹟畓券幷爲偸去只以十二斗落薄薄土謂之司馬畓而其中二斗落又爲○○○之隱
▣其餘百餘斗畓與収稅島因作己物噫此祠之財丁李兩先生鳩聚設置也而司馬畓合付聚殖傳來累百年公公之物也何敢爲金民之私庄乎今以十二斗謂▣▣(之司)馬
▣則此畓近百年土之所出亦可曰○▣(○)之不知乎豈可無取殖買畓之理乎伏望○○等捉致公庭司馬畓幾石落與畓穀甲午以後取殖条一一査得徵推於▣…
▣畓與所屬島以爲復設司馬齋之地謹冒昧以陳


(▣)藻鑑
辛未二月初七日多士
李厚錫 丁孝源 魏日祚 白億洙 鄭邦賢 崔德信 安韺煥 金奎善 盧有琪 李洙鉉 文基厦 白樂明 高濟善 高濟溟 金繼善 崔復憲 金邦鉉 宣敬欽 鄭甲周 韓準澤 任在寬 盧源錫 金潤畦 朴泰奎 張永學 文基鳳 魏喆祚 白基海 安章煥 李洙采 崔雲信 金佐善 丁炫 尹權浩 安任煥 魏衡權 李植來 文采鉉 魯聖弼 朴禹鉉 李敎植 田在南 全柄玉 金喆善 朴一煥 李敬燮 李重八 安仁煥 金浩鎭 魏錫說 文基正 卞啓旻 邊奎夏 韓廷和 曺亨沃 等

주요내용 약술(略述)

1871년(고종8) 2월 7일에 李厚錫 외 여러 선비가 長興府에 올린 稟目 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흥부 司馬齋(고을의 생원진사들이 모여 공부하는 장소이다. 사마답은 그곳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마련된 토지다)에서는 조선 성종 때 司馬畓을 설치했는데, 오랫동안 生員, 進士가 없어 사마재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고, 火變을 당해서 사마답을 汭陽祠에 붙여 관리하였다. 예양사는 신사무옥(1521년)으로 장흥에 유배되었던 靈川子 申潛의 遺德을 기리기 위하여 1612년(만력 壬子)에 鄕先生인 丁霽巖 , 李淸江(이승)이 주도하여 건립한 사우이다. 예양사에는 신잠을 주벽으로 천방 유호인을 배향하고 기년이 지난 후 牧隱 李穡과 秋江 南孝溫 양(兩) 선생을 배양하고 기십 년 후 月峰 金光遠이 배향되었다. 배향한 5명의 후손 중에 월봉 김광원 의 후손이 장흥읍에 많이 살았는데, 서원 훼철령으로 예양사가 훼철된 후에 김광원의 후손인 ○○○과 ○○○의 무리가 사마답과 사마재 소속 섬을 자신들의 재산으로 가로채면서 척박한 땅 12두락만을 사마답이라 하였다. 본래 사마답은 공공의 재물이므로 김씨 사람들을 법정에 서게 하여 갑오년 이후에 취식한 사마답과 남은 답곡을 일일이 조사하게 하고, 사마답과 그에 딸린 섬을 헤아려 사마재의 땅으로 다시 환수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문서의 작성 시기는 辛未 로만 기재되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문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 중 尹權浩의 생년을 족보에서 확인한 것을 참고할 때, 1871년 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윤권호는 본적이 海南 이고, 字가 聖天이며, 1851년 이다. 부인은 淸州金氏 와 曲阜孔氏 이다. 『海南尹氏參議公派譜』에는 그의 이름이 權鎬로 표기되어 있다.

제4자료 ‘천방선생문집’의 기록

1)정명렬이 추록한 ‘행장’의 기록

앞부분은 생략하고 예양서원의 관계 부분만 옮긴다.

余受而藏之 常恨其沈滯無傳 幸於壬子歲 進士 李昇 宣世紀 幼學 金汝珪 魏廷勳 數十餘人 深憤亂離之餘 學敎廢弛 欲別構一堂 以爲斯文會友之地 以己卯 謫居先賢 申靈川潛 爲宗 而一世斯文 莫如 劉先生 故爲幷享之計議 以克合呈于府使可之 報于巡使許之 鳩財募粟 不日成之 汭江之上 新構翼然 稱之以祠宇堂 春秋仲丁 以釋奠例享之 嗚呼休哉 先賢在玆士有倚歸 豈非吾鄕之盛事乎 諸輩忝以我爲院長 余辭避不得 略正其規模 諸生又以徵士 無行狀爲恨 而徵士養孫 德明 德昭 德彰 德與 等 聞父親所撰在我 力求其文 余不敢隱書 以贈之 前 典籍 丁鳴說 追述

나는 그 책(詩 百首와 大學圖)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글이 전하지 못하고 드러나지 않아 한탄 하던 중 임자년(1612년)에 진사 이승(1556~1628. 본관은 인천이고 호는 청강이다. 이괄의 난에 창의하다), 선세기(1572~1636 : 본관은 보성이고 호는 남호南湖이다), 유학 김여규, 위정훈(1578~1662 : 본관은 장흥으로 호는 청금聽禽이다. 병자호란에 거의하다. 유고가 있다), 십여 명 넘는 사람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쳐 배우고 가르침이 없어지고 게을러져 심히 통분하며 큰 강당을 짓기로 하고 사문(斯文, 유학자儒學者를 높여서 이르는 말)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기묘년(1519년)에 귀양 온 선현(先賢) 고령신씨 영천(靈川) 신잠(申潛)을 종(주벽)으로 하고 당대의 유학자이신 유 선생(天放 劉好仁)을 같이 모실 것을 합의하여 고을 부사에게 허락을 받고 전라도 순찰사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았다. 곡식과 재목을 모으니 빠른 시일에 성사 되었다.

예양강이 내려 다 보이는 위쪽에 새가 날개를 펼치듯 한 새 강당을 지어 사우당(祠宇堂. 예양서원의 처음 당호)이라 칭하고 봄가을로 중정일에 석존의 예로 모시니 아아! 훌륭하도다. 선현들이 여기에 있고 선비들이 돌아올 곳이 있으니 이 지역 모든 선비가 뜻을 이룰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원장을 맡을 것을 청하여 피하지 못하고 부득이 사우의 규모를 간략하게하고 바르게 하였다. 또 제군들이 유 선생의 행장이 없음을 한탄하고 유 선생의 손 덕명, 덕소, 덕창, 덕여가 부친 즉 반곡 정경달(1542~1602. : 본관은 영광으로 호는 盤谷이다. 임진왜란에 선산부사로 재직하여 공을 세우고 이순신장군의 종사관으로 활동 했다. 천방 유호인의 수제자다)이 기술한 행장이 나에게 있음을 듣고 자기들에게 주기를 간절히 바라니 감히 숨기지 못하고 내어 주었다. 이전(前)에 책을 소장한 정명렬(1566~1627. 반곡 정경달의 장자로 호는 제암이다. 예양서원을 건립 하였으며 유고가 있다)이 추가하여 기록한다.

2)사우를 세울 때의 기록 ‘건사사실建祠事實’

이 기록은 언제 쓰여 졌는지 알 수 없으나 천방선생 문집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先生歿後二十九年 萬曆壬子都事丁公鳴說 首唱俎豆之議 與進士李昇,宣世紀,魏廷勳,金汝珪 數十人 建祠汭陽江之上 以己卯 名賢 申靈川爲主享 而先生爲配享 其後躋享金月峰,李牧隱,南秋江 卽汭陽五賢書院也 本鄕祠宇 自先生始故詳記 其時事實以見先生 爲鄕賢之冠冕云 追配長興汭陽祠 尤菴先生文曰 惟玆天放實承正學云

선생이 돌아가신 뒤 29년이 지난 만력 임자년(1612, 광해군4)에 도사(都事) 정명열(丁鳴說)이 향사하자는 의논을 먼저 주창하여 진사(進士) 이승(李昇), 선세기(宣世紀), 위정훈(魏廷勳), 김여규(金汝珪)등 수 십 여인과 예양강(汭陽江) 가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기묘년(1519, 중종14)의 명현인 신영천(申靈川)을 주향으로 하고 천방(天放)선생을 배향하였다.

그 후 김월봉(金月峯), 이목은(李牧隱), 남추강(南秋江)을 받들어 배향하니, 곧 오현(五賢)을 모신 예양서원이다. 우리 고을의 사우가 선생(天放 劉好仁)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그 때의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며 선생이 고을의 어진 사람으로는 으뜸임을 드러낸 것이다. 장흥 예양사에 추배할때 우암(尤菴) 선생의 글에 “오직 천방만이 실로 정학(正學)을 계승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또 다른 기록이 있을 수 있고 견해도 다를 수 있으나 그 사실은 하나일 것이다. 독자 제현의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

-2020년 4월 5일 천관산에서-

*참고문헌=장흥의 서원과 사우 장흥문화원 2012/천방선생 문집 2014/제암집 정명렬/장흥읍지 정묘지/한국 인물 백과사전/장흥 多事 품목 번역본(자료)/장흥사족들의 학맥연구 재인용,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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