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논단-문림의향인(文林義鄕人)의 뜻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 장흥논단-문림의향인(文林義鄕人)의 뜻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6.1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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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수 시인

양기수/시인 , 수필가, 장흥향토사학회장

“코로나19의 사태로 학교를 가지 못하니 답답하여, ‘맑은 물 푸른숲 정남진 장흥’이라는 슬로건을 보고 여행에 나섰다.”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네 사람이 토요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며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물었다.

왜 장흥이 문림의향인가?

그들은 장흥군이 지형적으로는 정남쪽에 있어 ‘정남진(正南津)’이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예년에 ‘천년학(千年鶴)’ 영화를 보고 장흥에 들러 이청준 선생 생가와 묘소를 비롯해 선생의 소설현장을 돌아보면서 장흥은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어 문림(文林)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의향(義鄕)’이라는 별호를 붙인 연유를 물었다.

필자는 “의(義)는 문(文)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얘기를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장흥의병의 참여 상황을 대충 생각나는 데로 얘기했다.

“임진왜란이 발발되어 삼남지방에 거주하는 고을치고 의병이 없는 고을은 없다. 그럼에도 세인들이 유독 장흥을 의향(義鄕)이라 칭함은 임진왜란 발발 7년간의 전쟁 중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 후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이곳 장흥 회령진에서 칠천량(漆川梁)에서 패하고 온 전선들을 재정비하고, 이 고장 출신인 마하수, 마성룡, 마위용, 백진남, 김성원, 정명열, 문영개, 문홍개, 임영개, 김세호 등 많은 의병이 이곳 회령진으로 모여들자 이 충무공은 1597년 8월19일 여러 장수에게 선조 임금이 내린 교유서(敎諭書)에 숙배하도록 한 후, 명량해전에 출정하여 7년 전쟁 종전에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이 충무공의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와의 관계로 장흥 안양면 비동리 일원에 거주하던 변홍원, 변홍량, 변홍달. 변홍적 등 9형제가 충무공을 적극 도와 종군하였다.”는 내력을 설명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구한말의 동학혁명과 국치(國恥)후 항일운동 등을 설명하였고,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시절 안중근 의사의 충의(忠義)의 뜻을 기리기 위해 장흥 사람들이 “해동사(海東祠)”를 건립하게 된 경위와 내력을 설명하면서 장흥에서 오늘을 사는 분들의 뜻 또한 이와 같다는 설명을 하였다.

의향 유적의 표식과 답사코스부터 만들자.

그러자 그들이 또 물었다. “그럼, 그런 유적지나 기념되는 곳에 가면 설명문이 있겠네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흥군에는 ‘해동사’에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하고 ‘회령진성’의 언저리에는 회령진성이 문화재라는 안내문과 현대적인 조형물 1점이 있을 뿐 역사적인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설명문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 요즘의 관광은 한 고을의 풍습, 풍광, 문물 등에 대해 유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휴양이나 기분전환과 동시에 자기개발을 위한 활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수학여행식 단체여행이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 또는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수시로 관광을 한다. 때문에 예전엔 관광 예정지의 관리자나 군청을 통해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사전에 부탁하였으나 요즘의 관광객들은 관광예정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인터넷 등을 통해 사전 공부하고 오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현지에서 확인하고, 궁금한 내용은 현지에서 채우는 방법으로 관광하는 양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장흥군의 경우는 시대적인 상황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 안내판의 경우. 현지에서 보면 알 수 있는 외형적인 실태만을 소개했을 뿐 역사적인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나 문화재가 갖는 예술적 감성 등을 느끼게 하는 소개가 없어 참고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문화재다.’ 라는 표식의 역할만 할 뿐이다. 그나마 문화재 안내판은 나은 편이다. 역사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던 유적지나 유물이 존재했던 곳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예컨대 의향에 관계되는 곳으로 이충무공이 회령포로 가는 도중(1597.8.17) ‘군영구미(軍營仇未 : 현 안양면 해창리)에 수사 배설(水使 裵楔)은 배를 보내지 않았고, 군량 감관(軍糧監官)과 색리(色吏)가 군량을 도둑질하기에 그들을 잡아다 곤장을 치고,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다.’는 기록이 있는 곳이나, 회령진 선소가 있던 ‘순흥농장’과 회진리 선자와 돌깨(迴浦)에도, 초계 변씨(草溪卞氏) 형제들이 순절했다는 지포해전(芷浦海戰 : 현 안양면 지천리)이 있었던 그 어느 곳에도 표식이 없다.

그런가 하면 의향을 알릴만한 군의 홍보물은 ‘해동사(海東祠)’ 소개문뿐이고, 이미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을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회령진성’의 소개가 전부다.

이제 장흥군은 시대의 변화에 앞서가는 관광행정은 못할지라도 구시대적 행정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더욱이 장흥군을 “역사와 마주한 의향 성지(Mecca)”로 육성하겠다는 발표하고 “해동사를 안중근 의사의 역사·문화 체험공간으로 조성하겠다.” 했다. 관광객이 안의사의 충의(忠義)의 뜻을 기리고 체험의 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했다. 이를 추모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안의사의 충의(忠義)의 뜻을 어떻게 체험하게 한단 말인가?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사실(史實)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 미래를 위한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 위함이다. 곧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한 의식을 역사를 통해 기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장소의 성역화 사업도 중요하다 하겠지만, 장흥출신 의병에 대한 명단과 활약상에 대한 자료를 모의고,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표지석을 세워 당시 상황을 상상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사업이 우선이다. 거기에 공감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기념물이나 상징적인 조형물을 세우는 일이다. 필자가 기 제안했던 “임란호국영령(壬亂護國英靈)을 달랠 무명용사를 위한 백비(白碑)를 세워자”는 뜻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관광 방문객이 스스로 의향 유적유물을 찾아갈 수 있는 테마(Thema)지도와 관광객이 쉽게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이야기꺼리(Story telling)의 소개도 필요하다.

예컨대 ‘장흥인들의 의로운 마음을 표시한 해동사(海東祠)’ ‘이순신이 믿었던 정경달(丁景達)을 모신 반계사(盤谿祠)’ ‘전투에서 순절했음을 알린 의마총(義馬塚: 장흥 행원리, 부산 금자리)’과 ‘함께 싸우다 살아 돌아온 노비출신 의병 ‘감세(甘世)의 묘’(부산면 금자리)’ ‘아직도 그날에 유혼들이 살아 숨쉬는 동학혁명군(석대들과 동학혁명기념관)’, ‘구한말 의병 활동을 한 중군좌장 오헌 위계룡(梧軒 魏啓龍)의 생가와 초상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편지(방촌유물관)’, 그리고 ‘임란 7년 전쟁의 종전을 다짐했던 회령진’ 등을 관광객이 쉽게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설명하는 일이다.

세상이 어렵고 혼란이 있을수록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은 크다. 이는 선현들의 슬기와 지혜를 얻으려는 자연스런 심리이다. 또한 관광산업은 3차 산업의 꽃으로 ‘보이지 않은 무역’이요 ‘굴뚝없는 산업’이라 하지 않았던가?

장흥군은 사람들이 왜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보이고, 타 지방자치단체가 관광산업에 애써 힘을 다하는가에 대해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20200613 小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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