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천방 유호인은 장흥 고문학의 선구자였다
■사설-천방 유호인은 장흥 고문학의 선구자였다
  • 김선욱
  • 승인 2020.07.0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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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시묘 유허비 제막에 즈음, 천방공을 다시 생각한다

장흥의 성리학 선구자요, ‘조선조 3대 처사’로 불리울 정도로 당대 대단한 명성을 떨쳤던 야인이요, 학자요, 선비로서 자유롭고 고매한 삶을 영위했던 천방 유호인(天放 劉好仁, 1502-1584) 선생.

지난 6월 28일, 젊은 시절 관계 진출을 마다하고 중앙무대인 한양에서 당대의 저명한 석학들과 교유交遊‧교우交友하며 학문(성리학)에 전념하다 말년에 고향으로 귀향, 시묘살이를 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100여 편이 넘는 시(漢詩)를 작시하였던 장동면 하산리 제암산 자락에서 천방 유호인 선생의 시묘(侍墓) 유허비(遺墟碑) 제막식이 있었다.

천방 유호인- 선생은 그동안 장흥에서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史實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듯, 천방 선생은 조선조 500년의 장흥의 역사에서, 귀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을 만한 위인이었다.

선비였지만, 평생을 야인으로, 처사로 산 그분의 치열한 삶은, 당대의 학자며 선비들에겐 최선의 처세였을 도덕적‧수범적인 삶이었다. 당대의 최고의 석학 남명 조식이 선생을 ‘자기에게 넘치는 벗’이라고 지칭하였던 분이 천방이었고, 이이 율곡은 천방 선생을 ‘대가(大架)’라 하였고 선생이 귀향하려고 하자 ‘내 도가 남쪽으로 내려간다(歎吾道之南)’고 찬탄하였던 당대의 명사였다.

천방 선생은 당대 선비들의 가장 이상적인 덕인德仁의 삶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명리(名利)를 쫓거나 탐하지도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식량을 계속 잇지 못하는 등 빈궁한 삶이었으나, 마음만은 편안하였고, 서가에 서책을 가득 쌓아두고 독서를 즐기며 근심을 잊었으며, 도백道伯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에 2회나 제수되기도 했으나 출사하지도 않았다.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다. 도道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던 지조의 선비로서 삶을 영위했던 분이었다.

선생의 위대성은 그가 장흥 역사상 최초로 학맥을 일구었다는 데 있었다. 장흥의 여러 위인들 중, 장흥 역사를 장식할 만한 문하생을 갖는 분은 선생 외에 한 분도 없었다. 오로지 천방 선생만이 여러 문하생을 가졌고, 그 문하생들은 장흥의 역사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그 선생의 제자였던 분들로 반곡 정경달(丁景達)을 비롯하여 백문린(白文麟,1482~1544년), 위홍주(魏弘宙,1558~1634년), 위덕의(魏德毅,1540~1613), 이섬(李暹,1553~1616-사헌부 집의 역임), 김지주(金砥柱, 진사), 문희개(文希凱,1550~1610-진사 현감, 임진 때 의병장) 등 각 집안의 파조나 파조에 버금가는 명사들이 있었다. 그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의 자제들은 물론 만수재(晩守齋) 이민기(李敏琦, 1646-1704)도 그의 학통을 이었으니, 천방은 장흥에서 3대에 걸쳐 학맥(學脈)을 이루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천방 선생은 이들 장흥의 각 성씨며 각 사족의 자제들에게 성리학을 전수하고 교육하여 그의 학문 및 문학이 후대에까지 널리 전승될 수 있게 하였다.

선생의 위대성은 그의 학맥뿐 만 아니라 문학의 정신 곧 문맥文脈이 후대에 전승될 수 있게 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스스로 100여 편의 시를 작시, 당대 시인으로서 위명을 떨쳤던 선생의 시문학 정신은 수제자 반곡 정경달 등에 이어졌고 이러한 지역의 문맥이 향후 존재 위백규, 기봉 백광홍 등으로 주도되는 장흥 가사문학의 부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장흥의 고문학(漢詩)의 시작은 고려조 원김국사 위원개(魏元凱, 1226~1293)가 시작점이었다. 원감국사는 한시 200여 편을 그의 유작집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원감국사의 가송歌頌·시편 모음,1920년 송광사간)’에 남겼다. 이로써 원감국사가 장흥문학의 시작점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원감국사 이후(1293년) 즉 조선조가 개국한 1392년부터 천방 유호인(天放 劉好仁1502∼1584) 이전까지는 200여년 간 장흥고문학은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천방 선생부터 비로소 장흥의 고문학도 활짝 개화되기에 이른다.

성리학자였던 천방도 시문을 100여 편이나 남겼다. 특히 천방의 대표적인 시 ‘빗을 읊은 시(詠梳詩)’는 대빗질을 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없애버리자는 우의(寓意)가 깃든 시로, 조선 중기 유명한 문인이며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쓴 유명한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螺藁’에 실리기도 했으며 이외 수많은 기록 문건에 소개될 정도였다.

또 특히 그의 수제자 정경달은 300여 편의 시문학을 남겼으니 말이다. 따라서 천방 이후에야 비로소 장흥의 고문학은 존재, 기봉과 옥봉 등을 거치면서 활짝 개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천방은 실로 조선조 장흥 고문학의 부흥기를 태동시킨 주역이요 장흥고문학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장흥 고문학을 중흥시킨, 장흥 고문학의 선구자인 천방 우호인 선생을 많은 장흥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번 천방 선생 시묘(侍墓) 유허비(遺墟碑) 제막을 계기로, 더 많은 장흥 사람들이 천방 선생을 기억하고 그분의 학문과 문학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도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천방 선생의 학문과 문학을 재조명하는 일, 특히 장흥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천방의 문학정신과 장흥문학 원류의 정체성을 밝히는 일이 시급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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