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장흥 고문학 선구자 천방 유호인’에 대한 재론
■사설-‘장흥 고문학 선구자 천방 유호인’에 대한 재론
  • 김선욱
  • 승인 2020.08.1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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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고문학 시조’ 의혹 제기에 대해 답한다

천방 유호인은 성리학자로 이른바 장흥 성리학의 비조였다. 당대의 석학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도 선생을 “천방 선생만이 오로지 정학을 이었다(維慈天放 實承正學)”고 예양서원 중수 축문에서 설했을 정도였다.(여기서 정학은 성리학을 일컫는다)
성리학자였던 선생의 위업은 장흥 한시문학의 선구자로서 뿐만 아니라 장흥에서 유일하게 학맥을 일구었다는 데 있었다.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부지런하여 싫증내지 않았으니,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일지라도 …몇 개월 만에 반드시 몽매함을 깨우치게 하였다. 먼 고을 사람이건 가까운 고을 사람이건 학문의 법도를 지향할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공(천방)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공이 사문(斯文-유
교문화)에 세운 공로가 매우 크다. 공은 평소에 작시(作詩)할 때 경물을 보고 일어나는 감흥을 읊은 것이 모두 성리(性理)에 관한 것이었으니…”-‘천방유선생행장’ 중에서(<반곡 정경달 시문집1>, 280쪽).

선생은 제자 외에도 수많은 지역의 후배·후인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였고, 그리하여 선생은 당대 ‘지역(장흥)의 진정한 사표’(得性理之學, 敎授後排, 爲一師表 : ‘천방유 선생 행장’ 중에서(<반곡 정경달 시문집1>, 280쪽)로 인식되었다.
선생의 문인록 첫머리에 적시된 반곡은 선생의 제자 중 가장 현달한 인물이었디. 반곡은 “어린 시절부터 공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아 성취하였으니, 일찍부터 과거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덕택이다(정경달 시문집1, 281쪽)”고 고백하고 있다.

반곡은 300여 편을 시를 작시한 시인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며 시인으로도 활동한 반곡은, 16세 때 천방으로부터 시를 배웠다(詩就天放劉先生. 學毛詩)(반곡의 ‘연기年紀’ 중 16세 때 기록에 반곡이 천방으로부터 시를 배우고 작시하게 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결국 천방에게 배운 작시(作詩) 공부가 결정적으로 훗날 그를 시인으로 입지하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반곡의 천방으로부터 학습과정을 보듯, 천방 선생은 지역의 많은 후배들에게 당대의 학문인 성리학과 시(詩)를 교습하였고, 그러한 교육으로 인해 그의 학맥· 문맥이 후대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장흥위 씨로 천방의 제자였던 청계 위덕의(聽溪, 魏德毅)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시(詩) 2편을 남긴 위덕의(詩 등 수많은 유문이 전란 때 유실되었음)는 아우 덕후 (德厚-1556~1605) , 족하 정 훈(廷勳) · 정 렬(廷烈,1580~1644), 정 철(廷喆,1583~1657), 정 명(廷鳴,1589~1640) 등 위씨 집안의 거의 모든 자제들을 교육하였고 그들 대부분이 시문집 등 유문집을 남겼으며, 이러한 장흥위 씨에서 천방으로 비롯된 학맥·문맥이 결국 존재 위백규(存在 魏伯珪)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흥에서 고문학(漢詩등)은 고려 때 234편의 한시를 남긴 충지 원감(冲止 圓鑑, 1226~1293) 이후 16세기 초 천방 유호인을 비롯 기봉 백광홍, 옥봉 백광훈 등이 출현할 때까지 3세기 동안 거의 절맥된 상태였다.

16세기 초 천방 유호인(1502년 생), 기봉 백광홍(1522년 생), 옥봉 백광훈((1537년 생) 등이 출현, 일대 한시 문학의 중흥기를 이루었음은 사실(史實)로 증명되고 있다.

기봉은 한국 기행가사의 효시가 된 ‘관서별곡’을 비롯 시 172수를 남긴, 장흥고문학의 대표시인이었다. 기봉의 아우 옥봉도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三唐)’이라 불렸고, 이산해 최입(崔岦)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던 당대의 대문인으로 시 147수 등 <옥봉집>을 남긴, 장흥 고문학의 대표 시인이었다.

이들 외에도 기봉의 태생지 안양면 기산마을에는 서당 봉명재(鳳鳴齋)가 있었고 여기에서 기봉, 옥봉 등과 동문 수학한 김윤(金胤), 임분(林賁), 임회(林薈), 백광성(白光城), 백광안(白光顔), 김회명(金公喜) 등 기산팔현이 당대에 문명을 날리기도 했다.

그랬다. 1500년 초, 장흥은 천방이며 기산마을 중심으로 기봉, 옥봉, 기산팔현 등 여러 문인들이 출현하면서 장흥의 고문학의 일대 중흥기를 맞을 수 있었다. 특히 기봉은 가사작품 ‘관서별곡’으로 장흥 가사문학 중흥기를 열었고, 한국문학사에서도 기행가사의 효시가 된 시인이
되었다(옥봉은 일찌기 어렸을 때 해남으로 이거. 해남에서 종생하였다.) 그러므로 기봉 백광홍도 장흥 고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보다는 가사문학을 증흥시킨 장흥 ‘가사문학의 비조’로 더욱 강조될 수 있다면, 천방은 장흥 고문학(한문학)의 증훙기를 선도한 ‘장흥 고문
학 선구자’의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 씨가 모 지역신문에서, “천방선생은, 장흥 고문학 시조인가?-장흥 일각에서 사용하는 ‘고문학 시조’ 표현은 합당한가? 그 고문학(古文學) 개념의 시간적 내용적 범주는 어떠한가? 아마 장흥 학맥의 자생적(自生的) 태동을 강조하는 발상일 것으로 짐작되나, 그 출생은 늦으나 몰년은 앞서며 문집을 남긴, ‘기봉 백광홍(1522~1556)’도 있다 …“면서 논자가 일전에 본란(2020.07.01. 발행, 제86호)에서 설한 ‘천방 유호인은 장흥 고문학의 선구자였다’는 글에 대한 반론인 듯 의혹을 제기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논자도 천방을 장흥 고문학의 ‘선구자’로 지칭했
을 뿐 ‘시조’로는 표기하지는 않았다.

당시 논지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논지는 ‘그렇다’이다. 자기 학문(성리학이건 한시 문학이건)을 궁구하고, 그것이 학자며 선비들의 최선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만이 아니다. 굳이 당대의 문인으로 훨씬 뛰어났을 기봉이 있는데, 어이하여 천방을 장흥 고문학(한문학)의
선구자로 보느냐?

기봉은 문명(文名)으로 최고였을 것이다. 또한 당대 여러 문인들 즉 ‘기산팔현’ 같은 여러 문인들과 공유도 하며 교우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천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후학에도 치중했다. 제자들에게 자기 학문과 문학(한시)을 전수하고 특히 작시법까지 전수했다. 반곡, 청계 등 여러 장흥의 문인들이 나올 수 있는 뿌리를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기왕에 기봉은 기행가사의 효시로서, 장흥 가사문학의 비조로서 위명이 얻어졌으므로, 당대 가사문학과 한축을 이룬 한문학에 있어, 그 분야에 궁구하고 자신의 학문(성리학)과 문학의 전승을 주도하였던, 그리하여 자기 학맥·문맥이 이어지게 하였던, 그리고 이
제까지 거의 논외시되었던 장흥 한문학에서 천방을 논자는 더 의미 깊게 주목하였던 것이며, 그리하여 천방을 장흥고문학(한문학)의 선구자로 표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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