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초대 총장 역임- 전남대 발전 기반 닦아
전남대 초대 총장 역임- 전남대 발전 기반 닦아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8.0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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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물(2)/최상채
전남대 교정에 동상 조성에 이어 전남대 부근 도로명 ‘남강로’생겨나기도
전남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했던 최상채 박사
전남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했던 최상채 박사

지난 2008년 10월, 전남대학교 정문 주변 도로명이 남강로(南崗路)로 바뀌었다.

당시, 전남대학교에 따르면, “전남대학교는 최근 광주 북구청과 논의를 거쳐 대학교 정문 부근인 신안로와 용봉로를 통폐합해 ‘남강로’로 도로 명을 변경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학교 주변 일부 도로가 남강로로 변경된 것은 전남대학교 초대총장인 남강(南崗) 고 최상채(崔相彩, 1903.6.4.~1973.12.12) 박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현재 전남대 대강당 앞 민주마루에는 전남대 초대총장을 역임한 최상채 박사의 뜻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은 조각가 김행신이 제작한 것으로 1978년 6월 9일 설치되었다)

■전남대 개교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초대 총장

최상채 박사. 탐진인으로 장흥읍 출신의 의사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으며, 전남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고, 서양의술과 의학교육의 산파역을 하였던, ‘전남대학교 개교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유명한 한국인 의사로, 해방 후에는 전남 고등교육의 터전을 닦은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도 전남대 교정에 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최상채 박사이다.

박사는 1903년 장흥군 장흥읍 동동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남강(南崗)이다. 그의 부친은 최치영(崔致永)으로 중농에 해당할 정도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최 박사의 어린 시절은 장흥보통학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경성고보(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똑똑하지만 가난한 학생들은 사립학교보다는 학비가 싸거나 장학금 혜택이 많았던 공립학교에 진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서울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시기만 하더라도 호남에는 고등보통학교가 없었다는 사정도 작용했다. 당시 고등보통학교는 전국적으로 경성고보, 평양고보, 대구고보뿐이었다.

그는 1920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경성의전(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의전 전신) 을 입학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의사 양성기관으로는 경성의전이 최초였고 이어서 평양의전, 대구의전이 설립되었다. 경성의전은 경성제대가 설립되기 전까지 조선의 최고 의학교육기관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장흥의 부호였던 길행식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동기였던 이종륜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최상채 박사는 1924년 3월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곧바로 광주의 자혜병원 외과에 10년간 근무한다. 당시 광주의 서양식 병원은 1906년 선교목적으로 설립된 제중원, 1910년에 일제에 의해 설치된 자혜의원, 1930년대 중반에 설치된 종방병원 등이 있었다.

전남 자혜의원은 1910년 9월 26일 한일합방과 더불어 각 도에 자혜의원을 설치한다는 제도에 따라 광주에 설치되었다. 최초에는 관찰사 서기청의 일부 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하는, 의원 3명에 간호부 2명의 소규모 빈민의료기관이었다.

1925년 4월 관제개정에 따라 이 병원은 총독부 직할에서 도로 이관되고 명칭도 도립광주의원으로 바뀌었다. 의료진은 원장과 의관 4인, 의원 4인, 서기 2인, 약제수 1인, 조제 조수와 시험 조수 각 1인, 간호부 16인, 고원 4인으로 구성되었다. 의관과 의원은 모두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최상채 혼자였다. 간호부 16인 중에 5명이 한국인이었던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진료과목은 내과, 외과, 안과,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였다.

최상채 박사는 도립광주의원에 근무하면서 연구생활을 병행했다. 즉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병리학 교실에서 연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연구의 결과 1934년 9월 경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제주의원장에 선임

당시 박사학위는 주논문 외에 몇 편의 추가적인 논문을 해당 학교의 교수회에서 심사하여 수여했는데, 그의 주논문은 ‘백혈구의 분핵의 본태에 관한 연구’였다. 박사학위 수여와 때를 같이 해 한국인에게 좀처럼 주어지지 않던 병원 책임자 지위가 그에게 주어졌다. 즉 1934년 7월 제주의원장 겸 외과장에 취임한 것이다. 이 무렵 한국인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약 30명 정도였다.

이후 최상채 박사는 1935년 9월 광주에서 개업한다. 그의 개업의 활동은 4년간 지속되었다. 이어 최상채는 1939년 10월, 개업의로서의 생활을 그만 두고, 일본 규슈九州대학 의학부 고토외과학 교실에서의 연구를 위해 도일했다.

규슈대에서의 1년 6개월간의 연구 후에 그는 1941년 4월 경성여의전 외과 교수 및 외과장으로 2년간 근무하게 되었다. 이것이 교육자로서 인연을 맺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경성여의전은 해방 후 김종익의 호를 따 우석대학교가 되었으며, 후일 고려대로 흡수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3년 10월 최 박사는 다시 낙향해 광주에서 개업을 했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을 채 감추기도 전에 일본인 의사들이 대거 물러나면서 광주의전과 도립공주의전의 유지가 문제로 대두됐다. 광주의전 재건에는 미군정하 도지사였던 최영욱과 도보사국장이었던 민병기, 변호사 송화식, 한민당 간부 고광표 등이 많은 역할을 해 일으켜 세웠다.

남강은 이 시기 광주의전 새 교장에 취임했다. 초창기에는 건물이 없어 중앙국교와 광주여고 건물을 전전했다. 교수도 없었다. 교장 최상채는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도립 광주의원을 광주의전 부속병원으로 병합하면서 경성여의전 교수였던 김덕성을 초빙했다. 광주의전은 성장해 광주의대로 승격하게 되고 남강은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한편 광주에도 본격적인 의료인양성기관으로 1944년 4월 의학전문학교가 세워졌다. 이것이 오늘날 전남대학교 의대가 된 광주의전이다. 이때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고, 광주의전의 개교 배경에는 군의의 속성양성이라는 측면이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동일한 시기에 함흥의전도 개교했다. 광주의전은 당시 폐교 상태에 있던 수피아학교 건물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최초의 입학생은 102명, 이 중 한국인 학생은 42명이었다.

해방 이후 최 박사는 1945년 10월 광주의학전문학교 교장 겸 광주도립병원장으로 취임했다. 초창기에는 학교 건물이 없어서 일본인 학교였던 중앙국민학교와 광주여고 건물로 전전하는 어려움과 교수진의 확보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광주의전은 1946년 9월 광주의대로 승격시켜 광주의대 학장 겸 부속병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났다. 광주가 인민군에 점령되면서 광주의대 부속병원은 제 1인민병원이 되었고, 최상채 외과의는 제 2인민병원이 되었다. 최상채는 장흥으로 피신했다가 광주로 되돌아왔으나 인민군에 체포되어 광주의대 부속병원으로 끌려왔다. 광주의대 학장에서 조수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복 후 다시 복귀했으며 전시연합대학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초대 참의원에 선출되기도

그는 1956년 전라남도교육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광주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남강은 1951년 전남대학교 기성회를 조직, 도민의 성금 등으로 다음 해인 1952년에 광주의대, 광주농대, 목표상대를 통합 흡수하여 국립 전남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총장으로 피선되었다.

1959년 4월 전남대학교 제2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2대 총장선거에 나갔을 때 그에 반대하는 세력과 극심한 파벌이 조성되며 부작용이 나났고 곧 발생한 4.19 와중에서 총장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를 나온 그는 1960년 4.19 의거 이후에 대한민국 초대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정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문교사회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61년 5.16 혁명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의사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광주에 외과병원을 개업했지만 한편으로 교육개혁이나 정치, 사회 발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1973년 12월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노양순여사와 사이에 4남 2년를 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꿈은 문교부장관이었다고 하니 교육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하다.

전남대를 지극히 사랑했던 최상채 박사는 생전에 모은 도서와 서화와 도자기 등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으며, 최상채 박사가 기증한 서화, 도자기 등을 모태로, 1957년에 사회대학교 본관 자리에 있던 당시 금호각에서 전남대학교 박물관이 출발하기도 했다.

이를 기리어 전남대학교 박물관 앞에는 최상채 박사의 동상이 우뚝 저립해 있다.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고 이은상 시인의 글이다.

최상채 박사 동상
최상채 박사 동상
최상채 박사 동상
최상채 박사 동상

우리 모두 강물의 근원을 생각하듯

초창기 공로자 한 분을 잊지 못하니

그가 바로 남강 최상채이시다

장흥고을 가지산 정기를 타고 나서 의학을 전공하며

大家를 이루었고

해방 후에는 호남 교육계를 위하여

허허벌판인 용봉대에 터전을 닦고

전남대학교의 제1대 총장이 되어 민족교육의 방향을

바로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이여 큰 공적을 끼쳤다.

-노산 이은상

<남강 선생 프로필>

△1921.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1924.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1924-1925.전라남도 도립 광주의원 외과연구 및 전라남도 도립 제주의원 원장 △의학박사 학위 취득(일본 경도제국대학) △1935-1939.광주시에서 외과의원 개업 △1939-1941.도일, 일본 구주대학 의학부 교토 외과학교실에서 외과학 연구 △1941-1943.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외과 교수 및 외과장 △1945. 광주의학전문학교 교장 △1946. 전남도립광주의원원장 △1947. 광주의과대학장 △1948. 전남 의사회장 △1949.3. 대한적십자사 광주지사장 겸 중앙위원 △1949-1952.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1951.5. 광주 戰時연합대학장 △1952.4. 전남대학교 총장 서리, 전남대학교본부‧문리과대학‧상과대학‧농과대학‧외과대학 재무관 겸직 △1952.6.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1952.9. 전남대학교 초대 총장 △미국무성 초청 미국 시찰 △1955. 대한외과학회 회장 및 국제외과학회 회원 △1956. 전라남도도 교육위원회 회장 △1959.4. 전남대학교 제2대 총장 △1959.5 본인 의사에 의해 면직 △대한민국의 제5대 참의원(민주당, 전라남도 제2부.1960년7월29일-1961년5월16일)문사위원장 역임 △1962. 전남의사회 명예회장 및 대한외과학회 명예회원 △1973.12월 12일 광주시에서 71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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