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도호부(平近堂) 동헌과 장흥군청
장흥도호부(平近堂) 동헌과 장흥군청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8.0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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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터산책5

梁基洙/장흥향토사연구회장

고려시대 장흥의 치소는 지금의 관산읍 방촌리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1350년(충정왕2) 이후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자 조정에서는 장흥지방의 백성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 명하였다. 이에 1379년(우왕 5) 지금의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로 임시 거처를 정하고 그곳에 임시 관아(官衙)를 열어 일을 보게 되었다. 당시 그곳은 남평현령(南平縣令) 관하의 철야현(鐵冶縣)이다.

장흥사람으로서는 자신들의 영토를 두고 더부살이하여 업무를 보는 것은 몹시 자존심이 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장흥출신 사대부와 유지들은 다시 장흥 땅으로 돌아갈 것을 부사(府使) 황보 덕(皇甫德)이 새롭게 부임하자 이를 건의하고 다시 안렴사(按廉使) 이원(李原)에게 보고하여 지금의 장흥읍 원도리 연곡서원 뒤편인 중녕산(中寧山)에 성을 쌓아 옮기게 되었다. 이 성이 오늘날 우리가 중녕성(中寧城) 또는 황보성(皇甫城)이라 이름하는 성이다. 이 성은 1392년(공양왕 4) 2월17일에 축성을 시작해 그해 9월27일 준공을 보아 이곳에서 업무를 보게 되는데, 성의 높이가 15척(4.5m) 성의 폭이 6척(1.8m) 주위가 1,500척(454.5m)이고 동서 길이가 2간(3,606m)로 작으막한 성이다. 현재 이 성을 답사해보면 성의 주추를 제외하고는 거의 토성으로 쌓아져 그 흔적을 유심히 살펴야 볼 수 있다.

이후 도호부의 관아는 1414년(태종14년) 중녕성이 좁다하여 수녕현(遂寧縣)의 옛터로 관아를 옮겨 청사를 평근당(平近堂)이라 이름하고 20개 방(坊)을 관장하면서 1906년까지 업무를 보게 된다. 이곳이 현재 장흥경찰서 뒤편인 장원주택이 위치한 곳(동동리 187번지)이다.

당시 장흥도호부사의 품계는 종3품관으로 보직 되었으나 1658년(효종4)과 1688년(숙종14) 두 차례 현(縣)으로 강등된 바 있지만 강등되었다하여 품계가 낮은 수령이 오지는 않았고 당시의 사무체계는 중앙관제를 본 따 6방( 吏,戶,禮,兵,刑,工)을 두어 실무를 보도록 분장하였다. 이들은 지방호족으로 속칭 아전(衙前)이라 부르며 아전을 향리(鄕吏)와 그 밑에 가리(假吏)로 구분하였다. 또한 6방의 업무가 세분됨에 따라 그를 담당하는 사람을 색(色)이라 불렀다. 1760년(영조36)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장흥도호부 관아에는 67명의 아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지방관제는 동학혁명을 계기로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일본은 동학혁명을 빙자하여 조정의 업무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1895년부터 1906년까지 법률이 아닌 명령(칙령, 각령, 부령)으로 관제(官制)와 인사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장흥도호부는 1895년5월26일자의 칙령 제98호로 그동안의 8도(8道)제를 23부(府)제로 변경 시행하면서 종래의 목(牧),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과 부윤(府尹),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서윤(庶尹), 판관(判官), 현령(縣令), 현감(縣監)의 관명(官名)을 다 없애고 읍(邑)의 명칭을 군(郡)이라고 하고, 읍 수장(首長)의 관명을 군수(郡守)로 하였다. 그러나 23부제는 오래가지 못하고 1896년 8월4일자로 다시 13도(道)제로 고쳐 시행하면서 군제(郡制)는 그대로 하였다.

이렇게 바뀐 지방제도는 1906년 9월24일 칙령 제49호로 “지방구역 정리에 관한 안건”의 반포로 관할구역을 확정한 후 “장흥군청(長興郡廳)”이라는 간판을 걸고 당시 20개 面, 469개 洞里 관할하게 된다.

당시 관아로 사용하였던 동동리 187번지는 관아 터가 2,200평이고 본채인 평근당이 1동 37평과 회의실 목조와가 1동 20평. 7평형의 창고1동과 14평과 2평형의 물치장 그리고 소변소 6평형 1동이 있었으며, 이 모두 전통한옥 목조와가로 1869년(고종6)에 건립한 건물이었다는 1917년도 기록이 정부기록원에 남아 있어 참고가 된다.

이러한 장흥도호부의 관아는 1946년 12월06일 장흥군 청사 신축기공 현 장흥군청의 위치인 장흥읍 건산리 715-11번지의 논(2,027평)을 대지로 전환하여 벽돌조 와가 2층을 건립하여 1950년 2월4일 옮겨와 1977년 12월24일 현재의 건물로 재 건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옮겨온 일자는 1972년 6월9일 작성한 장흥경찰서 정보과의 주요시설물대장에 의한 건립 완공한 것으로 기록되고, 1975년간 장흥향토지에는 1950.4월로 기록하고 있어 장흥경찰서의 기록에 따랐다)

현 장흥군청 부지는 해방전 일본 애원현 악미군 이천정 대자사택(日本 愛媛縣 渥美郡 二川町 大字寺澤)출신으로 1907년 1월 우리나라에 건너와 농사를 지으며 장흥지주회 부회장, 전라남도지주회 장흥대의원, 장흥위생조합장을 지낸 김자 섬(金子暹 1877.03.15)의 소유로 해방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이곳에 군청을 지어 이전하였다.

장흥읍 동동리 187번지의 옛 부지는 장흥읍교회에서 해방당시 고영완(高永完) 군수에게 청하여 중학교 과정의 “장흥농업기술학교”를 열어 1953년 11월3일부터 1970년 2월까지 19회 67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후 1980년도에 장원주택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주변에 옛 관아를 상기하는 주춧돌과 주변에 5백년이 넘은 팽나무들이 산재해 있다. ♣朝天♣

<사진> 1.

▲1910년경의 장흥군청 / 장흥도호부시절의 ‘관아’의 현판이 남아있다.
▲1910년경의 장흥군청 / 장흥도호부시절의 ‘관아’의 현판이 남아있다.
▲1910년경의 장흥군청의 청사마당으로 평근당과 회의실이 보인다.
▲1910년경의 장흥군청의 청사마당으로 평근당과 회의실이 보인다.
▲1950년에 신축하여 1976년까지 현 위치에 위치한 장흥군청 전경
▲1950년에 신축하여 1976년까지 현 위치에 위치한 장흥군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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