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안중근의 진정한 꿈-‘해동(海東)의 진정한 독립‧광복’이었다
■사설 - 안중근의 진정한 꿈-‘해동(海東)의 진정한 독립‧광복’이었다
  • 김선욱
  • 승인 2020.09.0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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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명월海東明月’이 함유하는 심오한 의미2
안중근의사를 모신 해동사의 현판 '해동명월'

우리나라의 고토였던 간도와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던 안중근의 간절한 소원, 간절한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열 두 사람은 제가끔 왼손 무명지를 끊고 그 피로써 태극기의 앞면에 네 글자를 끄게 쓰기를 ‘大韓獨立’이라 하고는 다 쓴 후에 ‘대한독립 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불러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안중근, <안응칠 역사>에서)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전날, 자신의 굳은 뜻을 담은 '장부가(丈夫歌)' 마지막 구절에서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로다”고 외쳤다.

안중근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의 ‘단지 혈서 태극기’에 대한 기록과 안중근의 장부가에서 표현된 ‘대한독립(大韓獨立)’은 너무나도 당연한 안중근의 간절한 소원이요, 간절한 꿈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대한(大韓)은, 당연히 일본과 합방 이전의 우리나라 국호였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말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재판에서 미조부치 검사관이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는가?”고 물었을 때 안중근은 분명히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나 한 사람의 원한 때문이 아니오. ‘대한 제국의 독립’과 나아가서 동양의 평화를 위한 사명이기 때문이었소”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안중근의 꿈은 과연 조선 말 당시 거의 대한반도(압록강-백두산-두만강 이하)로 영역으로 고착화됐던 그 ‘대한제국’의 독립’뿐이었을까.

안 의사가 연해주 불라디보스톡으로 간 때가 그 나이 29세 되던 해인 1907년이었다. 안 의사는 연해주에서 이듬해인 1908년 봄, 의병대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일제 항일 투쟁을 펼쳤다. 즉 함경도 경흥(慶興)‧ 회령(會寧) 전투 등 13일간 30여 회의 대일항쟁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연해주에서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흑룡강성(黑龍江省) 등을 돌아다니며 교포들을 모아 강연하고 항일단체를 조직하는 등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항일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1909년 2월에는 12명의 동의단지회(同議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쪽 약손가락을 잘라 피로써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고 쓴 뒤, 만세 부르며 목숨을 건 독립투쟁의 의기를 불사르기도 했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경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이처럼 안 의사의 항일 독립운동은 간도(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당시 간도와 연해주는 우리 민족의 고토(古土)로, 일찍이 고조선을 잉태한 우리 민족의 발상지였다. 특히 19세기 말엽에는 우리 민족이 대거 이주하여 1백여만 명이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던, 우리 역사 속에서 명명백백 검증된 우리 민족의 영토요, 우리의 고토였다. 특히 19세기에 우리 민족의 대거 이주로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이 실질적으로 간도의 주인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일제 시대에는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우리 민족의 항일무장 투쟁의 근거지로서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일깨운 항일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 간도 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의 교섭이 시작된 것은 1712년으로, 양국은 간도에 대한 양국간의 교섭을 추진,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했다. 그 비문에는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에 경계비를 세운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고 명기했는데, 여기서 양국대표가 합의한 토문강의 위치가 서로 달라 상호 간도의 귀속 문제는 여전히 양국의 외교 현안이 되었다(토문강이 두만강 상류라는 것이 청국 입장이었고, 조선은 토문강이 만주 내륙의 송화강松花江 상류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서울대 백충현 교수는, “정계비를 국경조약이라고 보면, 북간도 지역-지금의 옌볜조선족자치주 일대-과 연해주 일부는 한국 영토에 해당하며,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 지역은 중국 영토가 된다. 정계비 내용을 엄격하게 해석하면 연해주도 한국의 영토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당시 대한제국)에서도 1897년 이후 2차례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까지 우리 국토임을 확신한데 이어 1902년에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토록 조처하는 등 간도를 본격적으로 한국 영토로 인식했다.

그러던 차,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대한제국 정부와 ‘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7년에 간도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므로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납세의무가 없다’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도 간도 지역을 대한제국의 영토로 분명히 인정한 셈이었다. 그리고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을 통하여 청국으로부터 남만주철도 부설권 등을 얻는 대가로 자기들이 한국 영토로 인정했던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안 의사가 간도와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것은 1907년부터 순국하던 1910년까지 고작 3년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본도 간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청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던 것도 1909년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그 땅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던 안 의사도 그 땅을 너무나 당연히 우리 민족의 영토로 인식했을 것이다. 즉, 당시 우리나라가 우리의 영토로 인식했던 그 간도와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던 안 의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연변에서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을 외쳤던 안 의사가 그 ‘독립’에서 연변을 제외했을 리 만무했다. 그러므로 안 의사가 그토록 ‘독립’을 소원하였던 그 ‘대한제국’은 지금의 대한반도(백두산 이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대한인의 고토였고, 19세기 말엽부터 대한의 영토로 인식되었고, 당시 그 땅에 거주했던 한국인들도 1백만 명을 헤아렸으므로, 너무도 당연히 ‘간도와 연해주’를 포함한 대한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안중근 의사가 꿈꾸던 ‘독립’의 꿈, 그것은 대한반도만의 독립이 아니었다. 우리의 고토였던 간도 지역을 포함한 대한(大韓), 바로 ‘해동국(海東國)’의 독립이었다. 그것이 바로 안중근의 간절한 꿈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안 의사의 진정한 꿈을 담은 해동사의 편액 ‘해동명월(海東明月)’에 담겨 있는 것이다. 해동(國)의 진정한 독립, 해동(國)의 진정한 광복이 바로 안중근의 꿈이었다. 그 안중근의 원대한 꿈이 지금도 정남진 장흥 해동사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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