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정은 장흥 역사에서 ‘최초의 詩人‧文人’이었다
위계정은 장흥 역사에서 ‘최초의 詩人‧文人’이었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09.0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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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文林’(3) : 충렬공 위계정(忠烈公 魏繼廷)

위계정 관등시, 중국 심괄 ‘속필담’에 名詩로 소개될 정도

숙종- ‘문학계 최고봉’으로 표현…“당대 최고 문인이었다”

 

김선욱 시인

김선욱/시인‧본지 편집인

<동문선東文選>이란 시문선집은 조선조 1478년에 서거정(徐居正)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시선문집이다. 장흥 출신인물로 <동문선>에 소개된 인물은 고려조 충렬공 위계정(忠烈公 魏繼廷,1038년?~1107))과 충지(冲止) 원감국사(圓鑑國師,1226~1293) 뿐이다. 원감국사는 신라, 고려 포함한 승려 중 가장 많은 시문이 <동문선>실려 있는 승려 시인이다. 그러나 원감국사는 위계정 후대의 인물이어서, <동문선>등에 수록된 장흥 출신 인사로 위계정이 최초의 인물이고, 그가 남긴 시문도 있어, 장흥 역대 시인 중 위계정이 최초의 시인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장흥 역대 인물 중 최초의 시를 남긴 이는 고려 때 문장으로 유명하였던 위계정이었다. 그러므로 장흥의 최초 시인은 위계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계정, 위공(魏公)을 소개하는 <고려사>(열전, 95권 제8권, 제신) 첫머리 부분에서 “(위계정은)…문종 때 급제한 후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魏繼廷…文宗朝登第, 以文章名”(<고려사> 열전, 95권)고 소개하고 있다.

위공(魏公)은 당대 문명을 떨친 대문인이요, 대시인이었다.

고려 후기 문신으로 문학평론사상 이인로(李仁老)와 함께 고려조 최고문인으로 평가받았던 최자(崔滋,1188-1260)도 <속파한집서(續破閑集序)>에서 위계정의 문장에 대해, 고려 문인으로 명성을 남긴 박인량, 김부식 등의 글과 함께 논하기를 “금석(金石)에 그 글이 기록되어 어 달과 별이 서로 찬란하게 빛나듯 하니, 한(漢)의 문과 당(唐)의 시가 이즈음에 전성이었다. …魏繼廷…皆金石間。作星月交輝。漢文唐詩”(<동문선> 제84권, 최자 속파한집서)고 평했다.

김부식(金富軾)의 형으로 송 나라에서 명문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부일(金富佾,1071~1132)도 “위계정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청백하고 바른 말로 역대의 임금을 보좌하였다”고 평가할 정도였다(<고려사절요> 제7권 肅宗明孝大王 二).

위공(魏公)이 나이 들어(당시 70여세), 칭병 등을 이유로 사직하기로 하고 두 번째 사직하는 표문을 올렸을 때, 왕(숙종)이 답하는 조서에서 위공(魏公)을 평하기를 "…공(위계정)은 학문을 넓게 하고 문장을 전공하여 사림(詞林 : 시인, 문인들의 사회)의 종장(宗匠-장인의 최고 우두머리)이며,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곧은 절개로 세상의 명신이 되었다. …魏繼廷,再上表,辭祿,詔曰,公,博學攻文,詞林宗匠,匪躬直節,爲世名臣”(<고려사절요> 제7권)고 표현했다.

장흥읍 회주사 ‘충렬공 위계정’ 신도비 전면부

위공(魏公)은, 당대의 사림(詞林), 즉 문학계에서 영수(領袖), 즉 문학계의 최고봉에 이르렀던 문인이었던 것이다. 과연 역대 어느 사서에서 장흥 출신 인사에 대한 평에서 ‘사림 종장(詞林宗匠)’이란 표현이 가능했던가를 가늠이라도 해 본다면, 비록 왕의 치하하는 글이었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극진한 표현은, 한 마디로 당대 위공(魏公)이 이룬 문학적인 위상과 가치를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흥 최초의 시-“위계정의 관등시觀燈詩”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위공(魏公)의 시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시는 기실 장흥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시다. <해동역사>는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齋,1765~1814)과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 1777~?)가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를 기전체로 기술한 사서인데, 여기서 고려조의 대표적인 문인 20여 명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위계정의 관등시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등시觀燈詩, <보필담補筆談>에 이르기를, 원우(元祐) 2년(1087, 선종4)에 고려의 사신이 조공하러 들어왔는데, 상원절(上元節上元節: 정월대보름, 음력 정월 1월 15일)에 대궐 앞에서 술을 하사하고 모두에게 관등시를 지어서 올리게 하였다. 이에 부사(副使) 위계정(魏繼廷)이 아름다운 시구를 지어 올렸다

천 길의 채산이 해 받치고 솟아나자 / 千仞綵山擎日起

한 소리 하늘 음악 구름 속서 울려 오네 / 一聲天樂漏雲來 ”

-<해동역사> 제47권 예문지6 –‘우리나라 詩1 : ‘기자조선, 고구려, 신라, 고려’ ‘보필담’

(이 관등시는 ‘<해동역사> 제47권 예문지6…’에서 뿐 아니라, ‘<해동역사> 제68권, 人物考2, 高麗’에도 같은 내용으로 출전되고 있다. 그런데 이 관등시 첫 구절 ‘채산綵山’은 송나라 때 등불놀이를 하기 위해 궁중에서 등불을 산처럼 쌓아놓은 것을 말한다고 한다.)

관등시 출전으로 소개된 <보필담補筆談>은 중국 송나라 때 대학자 심괄(沈括,1031년~1095년)이 지은 저작물이다. 심괄은 송나라 때 저명한 정치가요 박학다식한 통섭 학자로 중국 고전사에서도 유명한 <몽계필담夢溪筆談>을 비롯해 수백 권의 저작물을 남긴 당대의 대학자였다.

그런데 위계정의 관등시는 심괄의 대표적 저작물 <몽계필담>(‘續笔谈’ 十一篇)에 소개돼 있다. <몽계필담>은 본권 26권과 추가로 집필된 ‘보필담補筆談’3권과 ‘속필담續筆談’1권 등 모두 3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위계정의 관등시는 이 중 <몽계필담>의 ‘보필담’에서가 아니라 ‘속필담’(<梦溪笔谈>, 续笔谈, 十一篇)에 실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동역사>의 ‘<보필담>에 출전한다’는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장흥읍 평화리 회주사 내 위계정 신도비명에서도, 위계정의 관등시를 소개하는 부문서 “상원절 관등시가 송나라 정치가인 심괄沈括의 저서 보필담補筆談에 실려 전해온다”는 대목도 잘못된 표기인 셈이다).

그 원전(<梦溪笔谈>,‘续笔谈’ 十一篇)에 실린 위계정 관등시 관련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元祐六年,高麗使人入貢,上元節於闕前賜酒,皆賦《觀燈》詩,時有佳句。進奉副使魏繼延句有‘千仞彩山擎日起,一聲天樂漏雲來。’ 主薄樸景綽句有 ‘勝事年年傳習久,盛觀今屬遠方賓。’

위계정의 두 번째 시문(詩文)-

‘천안절을 하례하는 표(賀天安節表)’

장흥읍 회주사 ‘충렬공 위계정’ 신도비 후면부

‘천안절을 하례하는 표(賀天安節表)’라는 위계정의 시문은 <동문선東文選>(제31권 표전表箋)에 출전한다. 위계정의 ‘천안절 축하 표문’은 유명한 표문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동문선>뿐만 아니라, 고려 후기 충숙왕 때 문인 최해(崔瀣,1287~1340)가 신라와 고려 명현의 시문집 중에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만을 모아 간행한 시문선집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권3(卷之三, 事大表狀)에도 출전하고 있다.

<동문선> 등에 전하는 위계정의 글 원문은 다음과 같다.

鳳簫貿律, 協寒若之休徵, 龍渥彪祥, 屬誕彌之慶節, 愷懌之甚, 遐邇不殊.中謝 伏惟皇帝, 端穆凝尊, 溫文啓喆, 垂衣裳而理天下, 大致混同, 象日月以授人時, 永無差忒. 逮復舜生之旦, 盛陳塗會之儀, 川岳效珍, 蠻夷納款. 臣逖居桑野, 叨襲茅封, 周室侯班, 展覲未肩於八百, 羲皇曆數, 馳誠但祝於萬年.(동문선 제31권 / 표전(表箋)

이 글을 국역하면 다음과 같다.

봉소(鳳簫)의 음률을 조절하니 추위도 화합하여 징조가 아름답습니다 / 황제의 두터운 은혜가 상서롭게 빛나니, 성상께서 탄생한 경절(慶節)을 맞아 심(甚)히 즐겁고 기쁨이 먼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다름없이 경하합니다 /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께서는 단정하고 온화하시며 존엄하시고 문아(文雅)하시고 밝으시어 / 의상(衣裳)을 드리워 천하를 다스려 크게 통일을 이루시고 / 해와 달을 관상(觀象)하여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며(역서를 반포하시어) / 영원히 어긋남이 없게 하셨습니다 / 이제 다시 순(舜)이 탄생한 날에 도회(塗會)의 의례를 성대히 펼치니(도산塗山의 모임 우禹가 만국의 제후를 도산에서 모이는 성전盛典을 거행하오니) / 산천의 진기한 것을 바치고 만이(蠻夷)가 정성을 바칩니다 / 신(臣)은 상야(桑野)에 살며 외람되게 모봉(茅封)을 세습하고 있으므로 / 주실(周室) 제후 반열에서 전근(展勤)한 팔백(八百)에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합니다 / 희황(羲皇)의 역수(曆數)에 치성(馳誠)하며, 다만 만년의 수(壽)를 축원합니다

-장흥 치인 이봉준 역

<*봉소鳳簫 : 아악기에 속하는 관악기의 하나. *상야桑野 : 부상扶桑의 들이란 말인데, 동해에 부상扶桑이란 나무가 있다 한다.*탄미誕彌 : 탄생한 날을 말한다. *혼동混同 :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서 생각함. 서로 뒤섞이어 하나가 됨. *만이蠻夷 : 오랑캐. 한인이 중국 남쪽에 있는 종족과 동쪽에 있는 종족을 일컫던 말. *모봉茅封 : 모토茅土로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그 방향에 해당되는 빛깔의 흙을 백모白茅에 싸서 주는데, 곧 東은 靑, 西는 白, 南은 赤, 北은 黑, 중앙은 黃이었다. *희황羲皇 : 伏羲氏.>

위계정-청렴, 검약, 충직한 인물이었다.

위공(魏公)은 불의‧부정‧부당을 용인하지 못한, 참으로 강직하고 올곧은 선비였다. 고려조 인물 중에 유일하게 왕에게 충언하고 지적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위공(魏公)은 청렴하고 검약하였으며 충직한 신하였다. 이자의(李資義)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이자의는 진귀한 물건을 많이 사들였지만 위계정은 전혀 구하는 것이 없었다. 양부(兩府)에 승진해서도 평소의 절제 있는 생활을 유지했다.(…繼廷淸儉蹇直. 嘗副李資義, 奉使如宋, 資義多市珍貨, 繼廷一無所求. 至登兩府, 不改素節)(<고려사> 卷九十五, 列傳, 卷第八)

위공(魏公)의 사후에 예종의 묘정에 배향하다는 인종의 조서에서도 이러한 위공의 성품은 잘 나타나 있다.

“위계정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선왕을 보필하였고, 청렴 검약하고 바르고 곧았으며 한결같이 절조를 지켰으니 예종의 묘정에 배향함이 마땅하다. …仁宗詔曰, “魏繼廷, 嘗受肅宗遺命, 左右先君, 淸儉正直, 終始一節, 宜令配享睿宗廟庭”(<고려사> 卷九十五, 列傳, 卷第八).

위계정-왕에게 ‘아니오’ 충언했던 인물

위공(魏公)은 청렴하고 검약했으며 충직한 인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유일하게 왕에게 ‘아니오’, ‘틀렸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충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부당하고 부정한 일이면, 왕의 명령이었다고 하더라도 단호하게 불복하였던 올곧은 명신 중의 명신이었다.

”1082년 11월… 기사일 대회 때 눈이 내려서, 연회에 참가했던 신하들의 의복이 모두 젖었는데, 저녁이 되어 돌아가려 할 때 하늘이 개고 달이 밝았다. 왕이…멈추고, 여러 종친들로 하여금 왕에게 잔을 들어 장수를 축원하게 하였더니, …김상기, 이자인, 보궐(補闕) 위계정(魏繼廷)이 이를 간하므로 그만두었다. …大會, 雪, 侍宴群臣皆霑服, 及夕將還, 天霽月明, 王駐輦昌德門外, 命諸王, 奉觴獻壽, 諫議金上琦․ 李資仁․ 補闕魏繼廷, 諫, 乃止”(<高麗史> 卷10 世家 卷第10).

위공(魏公)이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을 때, 왕의 폐첩 만춘(萬春)이 집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자 그는 주문(奏文)을 올렸다. “…만춘이 주상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백성들을 혹사하여 자기 집을 크게 지었으니 청컨대 그것을 헐어버리소서라고 간언하였다. 爲御史中丞. 王嬖妾萬春, 起第壯麗, 繼廷奏, 萬春誑惑上意, 勞役百姓, 大起私第, 請毁之 不報”(<고려사> 卷九十五, 列傳, 卷第八).

또 위공(魏公)이 추밀승선(樞密承宣)이었을 때, 연등회(燃燈會) 날 왕이 잔치를 베풀고, 술이 취한 채 위계정에게 일어나 춤을 추라고 명령하였으나, 그는 불복하였다 “…춤추는 광대가 있는데 어찌 신에게 춤을 추라고 하십니까? 라고 불복하였다. 又爲樞密承宣, 王以燈夕置宴, 酒酣, 命繼廷起舞, 辭曰, 有伶人, 何用臣舞? 王不得强, 乃止”(<고려사> 卷九十五 列傳 卷第八).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장흥 회주사에 건립된 ‘忠烈 長興 魏公繼廷 神道碑銘’에서, “…추밀승선 때 왕이 연등행사 후 연회에서 공에게 춤을 추라고 하였다. …(공이) 거절하였다. 그러자 신료들이 놀라면서 춤을 추라고 권유했다. 공이 정색을 하면서 일찍이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전하의 말이라도 ‘예’ ‘예’만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하셨다'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부터 불가상서不可尙書란 별호가 붙었다”고 적시돼 있는데, 여기서 ’증자曾子의 말 인용 부분‘이나 ‘불가상서不可尙書란 별호’ 부분은 史書 등에 출전하지 않는 내용이다).

덕망으로 사람들을 복종

-아름다운 이름 드높였다

다음은 말년에 이르러 칭병 등을 이유로 사직을 요구하며 올린 사직 표문에 대한 왕의 조서 등에서 위공(魏公)에 대한 평가가 잘 드러나 있다.

“위계정이 또 표문을 올려 녹봉을 사양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경은 청렴한 모범과 두터운 덕망으로 모든 관료들을 복종시켰으며, 곧은 절개와 아름다운 이름은 뭇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였다. 이에 문종께서 사신(詞臣)으로 발탁하셨고, 숙종께서는 수상으로 임명하셨다…. 二年, 復三上表乞退, 詔曰, 卿淸規重德, 鎭服百寮, 直節令名, 聳動群聽. 文祖擢爲詞臣, 英考命作首相”(<고려사> 卷九十五 列傳 卷第八).

결정적으로 위계정의 인품과, 그가 이룬 업적에 대한 평가는 예종의 묘정에 위계정을 배향하라고 내린 조서인 ’고문하시중위계정배향예종교서(故門下侍中魏繼廷配享睿宗敎書)'에 잘 드러나 있다.

”… 문하시중…모(某)는 맑고 검소한 것은 한 시대의 풍속을 진정시켰고, 아름다운 의표는 백관의 모범이 되었는 데, 실로 이 백성들의 선각(先覺)이요, 고명(顧命)을 받은 대신이었다. …예고가 즉위하던 날에 친히 옥새를 전하여 큰 기업(基業)을 도왔으므로 지금까지 사대부들 사이에는 지난날의 모와 절개를 회상하는 자가 많다. …그 공적을 추록(追錄)하는 것은 과인의 명에 있다. 마침 대제(大祭)를 행할 때를 당하여 은전을 내려 준다. 종사(從祀)하는 의례(儀禮)를 행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더한다. 선왕으로 하여금 고후(高后)를 따르게 하였으니 어진 사업이 더욱 나타났고, 비록 죽었을지라도 산 때와 같으리니 충혼(忠魂)이 이미 이르렀을 것이다. 충렬공(忠烈公) 시호를 내려 주노라. 故門下侍中魏繼廷配享睿宗敎書 -王者之孝。爲能饗其親。人臣之榮。在不掩爾善。玆奉先之罔極。乃錫寵之惟新。三重大匡檢校太師守太保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判使部事,上柱國某。淸儉鎭於一時。儀刑重於百辟。實斯民先覺。惟顧命大臣。屬英陵晏駕之時。方睿考飛龍之旦。親傳玉璽。方贊鴻基。至今搢紳之閒。想昔風節者衆。配享于廟。有闕禮官之文。追錄其功。在予寡人之命。適修大禘。用賚明恩。擧玆從祀之儀。加以易名之典。俾先王迪高后。賢業益彰。雖死日猶生年。忠魂已格。加贈忠烈公”(<동문선>제23권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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