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감국사, 신라‧고려조 ‘불교문학의 최고봉’이었다
원감국사, 신라‧고려조 ‘불교문학의 최고봉’이었다
  • 김선욱
  • 승인 2020.09.17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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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文林’(4) /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冲止)(1)
'동문선'에 시 21편 등 총 76편 詩文 수록-“고려 승려로서 최다”
신라‧고려조 15세기간–‘희대의 승려시인‧승려문인’으로 평가할 만
'원감록', 1680년 일본서 출간-국사 詩文의 작품성, 가치 인정
김선욱/詩人, 본지 편집인

김선욱/詩人, 본지 편집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는 고려조 장흥이 낳은 최고의 문인이었다. 승려에 대한 인식이 비우호적이었던 조선조 유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조까지의 시문을 총망라한 시선집인 '동문선'에 시문 76편이 수록될 정도로, 詩文의 문학성을 평가받았던, 국사의 문학은 고려조 불교문학의 초고봉이었다. 4회에 걸쳐 원감국사의 문학을 고찰해 본다…편집자 주◀

고려 정사正史를 <고려사> <고려사절요>로 여기는데, 이들 사서에는 대체로 승려에 대한 기록이 출전되지 않는다. <고려사>의 ‘열전’ 같은 데서도 승려의 기록이 거의 없다. <고려사>가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왕조의 세가世家, 당대의 조정 관료 중심으로 편찬되어 관료 아닌 승려는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사> ‘열전’에 천태종 창시자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만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왕족(문종의 자子)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나, 조계산 제2세조인 진각국사 혜심慧諶(1178∼1234), 백련결사白蓮結社의 선도자였던 원묘국사 요세了世(1163~1245), 선승으로 조계산 제5세조였던 원오국사 천영天英(1215~1286) 등에 대한 기록도 없다. )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 등에 대한 기록도 물론 거의 출전되지 않는다.

원감국사가 <고려사절요> 등 정사에 출전되기는 관료로 입각하던 때뿐이다. 즉 “…위순魏珣(후에 魏元凱로 개명) 등 32명과 명경 2명과 은사 9명에게 급제를 주었다.”(<高麗史節要> 제16권, 고종-1244), “…9월에 위문경魏文卿(후에 魏文凱로 개명)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고, 위문경 형제(元凱, 文凱)가 모두 장원하였으므로 그 어머니에게 미곡을 주었다”(<高麗史節要> 제18권, 원종 순효대왕1-1260년) 등이 그렇다. (元凱, 文凱는 형제간으로, 형 원개는 1242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244년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아우 문개는 1260년에 장원 급제 후 벼슬이 평양 군수,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이르렀다).

1.원감국사의 생애

-송광사 비명에 소개돼

 원감국사 존영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1226∼1293)의 생애는 그의 사후 21년 만에 세워진 비명(‘曹溪山修禪社第六世贈諡圓鑑國師碑銘’ : 수선사修禪社-현 송광사-감로암 전등前嶝에 세워져 있다)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비명은 1314년 8월, 왕(충숙왕)의 명으로 한림학사였던 승지 김훈金曛이 지었다. 이 비명과 원감국사 시문詩文 등에 나오는 사실을 근거로 국사의 생애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원감국사는 1226년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났다. 이름(諱)은 법환法桓(후 충지沖止로 개명), 자호自號는 복암宓庵, 속성명俗姓名은 위원개魏元凱, 탑호塔號는 보명寶明, 원감園監은 시호諡號다.

국사는 9세부터 공부하여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암송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속세를 벗어날 뜻(出家)이 있었다(少有出塵之志). 17세에 사원시司院試(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 때(1248년) 춘위春闈(禮部試)에서 장원급제, 재질의 탁월함이 입증되었다. 급제 후 영가永嘉(지금의 안동) 서기書記를 거치고, 그 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 국위를 선양했다. 벼슬이 금직옥당禁直玉堂에 이르렀으며 문체가 수려해 많은 선비들이 탄복했다.

1254년 29세에 강화도 선원사禪源社 원오圓悟국사 문하에서 출가했다.

1266년 41세에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고, 1269년 44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으며, 3년 뒤 1272년 순천의 정혜사定慧寺(지금 송광사 말사)로 옮겼다. 1273년 원나라 세조에게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表’를 올려 군량미 명목으로 빼앗겼던 전답田畓을 되돌려 받았다. 1275년 원 세조의 흠모로 초청되어 원나라 서울로 가니 세조가 스승의 예로 환대하였다. 귀국 후 충렬왕으로부터 선종의 가장 높은 법계인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받았다(1276년). 1286년 61세에 수선사 제6세주가 되었다. 1293년 제자들에게 설법과 게송을 남긴 뒤 선계仙界에 오르니 춘추는 67세, 법랍 39세였다.

왕이 칙서와 뇌서誄書(조문하는 글)를 내려 문도들을 위로하고 시호를 원감국사圓鑑國師라 하고 탑을 보명寶明이라고 하였다.(부도는 조계사 북동-지금의 감로암-에 세웠다).

국사의 사후 21년만인 1314년에 수선사修禪寺(현 송광사) 문인門人 등이 왕(충숙왕)의 허락을 얻어 수선사 감로암 앞에 비를 세웠다. 비명은 김훈金曛이 찬撰했다. (비명은 ‘曹溪山修禪寺第六世贈圓鑑國師碑銘’이다).

2. ‘천재적’ 문학성과 詩文의 기적성

■<동문선>-詩만 21편 등 詩文 76편 수록

비우호적 유학자들도 국사의 시문 인정해

원감국사 비

정사인 <고려사> 등에 별로 출전되지 않았던 국사가 ‘승려’로서 보다 ‘승려 시인’으로 더욱 유명해진 것은 신라 때부터 고려조까지 가장 대표적인 시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문선東文選>에 시 21편을 비롯, 제문祭文 4편, 표전表箋 5편, 임금에게 올리는 상서上書‧상소上疏 등 소疏 46편 등 총 76편의 시문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문선> 제84권, 서序’에 승려 명우釋明友의 ‘원감국사어록서圓鑑國師語錄序’도 수록되었으니 원감국사 관련 시문은 총 77편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동문선>에서 국사 시문이 십 수편 정도 실려 있었던 것으로만 알져진 이유 중의 하나가. 국사의 詩 21편은 ‘석원감釋園監’이라는 이름으로, 제문祭文·표전表箋·소疏 등 55편은 ‘석원감’이 아닌, 국사 자호自號인 ‘석복암釋宓庵·석복암釋宓菴’이라는 두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었음도 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문선>에 국사의 수록된 시문은 신라‧고려조 모든 승려 중에서는 최다였다. (고려조 승려로서 <동문선>에 시문이 수록된 승려는 모두 29명에 달했다.)

국사의 시문이 승려로서 <동문선>의 최다 수록된 사실은 한 마디로 ‘경이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원감국사는 당대 국사國師로서 선종불교 진흥에 앞장섰던 선승禪僧이었지만, 한편으로 세속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으로 ‘문학을 세상을 교화하는 방편方便’으로 삼아, 속세 문인들 이상 가는 탁월한 문학적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무엇보다 <동문선>에 실려 있는 모든 승려 중 국사의 작품이 월등하게 많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고려‧조선조 문인들이 국사의 문학을 ‘불교문학의 최고봉最高峰으로 평가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동문선>은 역대 수많은 시문집 가운데 으뜸이자 후대의 모범이 되어 왔다. 특히 그 방대한 분량과 체계적 편집 등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조선조 초까지 거의 모든 시문이 총망라됐다는 문학사적인 가치로, <동문선>은 우리나라 한문학 전통의 대표적인 문예 작품집으로 우리나라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으며, 여기에 실린 시문 역시 문예작품으로서 큰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우리 역사의 귀중한 기록으로서 영구히 보존되어야 할 자산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이의異議를 달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국사가 신라‧고려조 간의 15세기 동안 ‘희대의 승려 시인이요, 승려문 인이었다’고 평가할 만한 것이며, 이런 국사의 태생지가 중앙이 아닌 최 벽촌이었던 장흥이었다는 사실에서 더욱 경이로운 일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선종禪宗의 중흥조였던 지눌知訥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던 국사는 응당 선禪이나 불교 경전 등에 이해가 깊었을 테지만, 특히 출중한 문장과 작시作詩 능력으로 당대 사림詞林(문학계)‧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았다.

국사가 남긴 시문은 그것이 비록 승려의 시문이기는 하지만 그의 많은 시들이 고려를 대표할 만한 시들이고 한국 고대 문학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작품들이다. 그런 연유로 그동안 국내에서 멸실되었던 국사의 <원감국사어록圓鑑國師語錄>이 1680년 일본에서 중간重刊되었는데(20세기 초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사료 수집 차 일본에 갔다가 이 책을 대여해 와 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위정철, <增補長興魏氏要覽>, p63), 이는 국사 시문의 작품성과 가치가 일본에서도 인정받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예라 할 수 있다.

혹자는 국사가 특별히 문학성이 뛰어났던 데는 국사의 드라마틱한 성장 과정의 특이성을 꼽기도 한다. 즉, 국사는 사대부 집안(부친 소紹는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 모친 송씨宋氏는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 자옥子沃의 딸-園監 碑銘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출가하여 불도에 매진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관리 입각을 위한 과거시험 공부로 경서經書 등 유학을 공부했으며, 장원 급제를 한 후에는 10여 년간 관료로서 삶을 영위하며 관료로서 안정된 삶(‘성공과 출세가 보장된 관리’로서 삶)을 포기하고 승려가 되었던, 이른바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의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치열한 삶의 역정 속에서 당초부터 불심佛心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선지식禪知識과 유학의 궁구窮究에다, 원 나라 지배 하의 당대 정치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민초들의 실태등 현실적인 사회‧삶에 대한 통렬한 고뇌와 뛰어난 통찰력이 더해지고, 그런 현실을 자신의 학문 반영을 위한 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시문 등을 작시作詩할 수밖에 없었기에, 시詩는 물론 소疏나 표表 등 여러 문체를 출중하게 구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처럼 다양한 모든 분야에서의 뛰어난 통찰력과 문장력을 가졌던 국사였기에 그러한 문장력으로 <동문선>에 70여 편이 수록될 정도의 우수한 시문의 창작은 물론 원 나라와 외교적 문서에서도 그 능력이 십분 발휘될 수 있어, 원 황제의 장수를 기리는 글(원 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었으므로)도 많이 쓰게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하여 <원감국사어록圓鑑國師語錄>의 서문을 썼던 명우 스님도 “… 혹 노래도 하고 혹 송頌도 하며, 선禪(禪宗)‧교敎(敎宗)‧유儒(儒學)‧석釋(석가모니)에 대하여 자유자재로 출입하고 인용하여 논변했다…或歌或訟。禪也敎也。儒焉釋焉。橫拈倒用。暗去明來”(<동문선 제84권, 序, 圓鑑國師語錄序)라고 평하기도 했다.

국사 시문의 탁월성(천재성)은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즉 ‘가히 기적 같았다’ ‘가히 천재적이었다’ 할 만큼 국사의 탁월한 문학성, 선지식禪知識, 도풍道風의 발휘가 두 번에 걸쳐 ‘기적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보통 도력道力이 높은 큰스님들에게 나타난다고 하는 이적異蹟이 국사에게도 나타났다는 것인데, 그러한 이적이 국사의 출중한 문장력이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국사의 시문-

‘감로사 성세盛世’의 기적 일으켜

국사의 시문으로 인하여 일어난 첫 번째 기적 같은 일은, 국사가 감로사甘露寺 주지로 있을 때였다. 국사 비명의 이 부문은 유독 ‘국사의 출중한 시문’을 강조한 대목이나 다름없는데, 이 비문에 의하면, ‘국사가 41세 때 김해 현 감로사 주지가 되었을 때, 국사의 시詩를 계기로 감로사가 크게 성세하게 되었다’는 예가 그러하다.

“…국사가 어느 선승(禪德)으로부터 시詩를 요청받고 즉석에서 ‘봄날 계수나무 동산에 꽃이 피어서, 소림少林 바람에 은은한 향기 떠돌더니 / 오늘 아침에 과일이 익어 감로에 젖으니 / 끝없는 인천(人天)이 다 함께 한 맛을 보는 구나’라고 읊으니, 이 시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며 머나 가까우나 사람들이 모두 국사의 명성을 듣고서 그 모습을 한번 보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국사가 주지가 되면서부터 숙덕宿德이 바람처럼 달려오고 후진後進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有一禪德 進師前請詩 師云春日花開桂苑中 暗香浮動少林風 今朝果熟霑甘露 無限人天一味同 玆詩膾炙人口 遠近聞師 想見其像 自師入院 宿德風馳 後進雲集”(園監 碑銘에서)고 기록했다.

국사는 이처럼 감로사 주지로 있으면서 불도장을 크게 일으키는데, 감로사에서 기적 같은 이적은 계속 이어진다.

“국사의 도풍道風으로 후진이 모여 큰 법도가 동쪽으로 흐르면서 의거義擧-체계적인 敎義에 대한 학문-의 번성이 이뤄지고…국사의 처소였던 첨회당尖晦堂 뜰 앞에 호랑이가 머물고 있다가 스님이 나타나면 그 옆에서 늘 호위를 해주었으며 오늘날 영지버섯이라 불리는 지초-芝草, 영지버섯-가 첨회당 정원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大法道東流 義擧之或 自師大振 …尖晦堂初發 階前虎衛 庭中芝出 行己面”(園監 碑銘)는 내용들이 그러하다.

■원 세조에 보낸 표문

-토전을 반환받는 기적도 일으켜

국사 시문의 두 번째 기적 같은 일은 국사가 원 황제에게 토전土田의 반환을 청하는 장문의 표문을 올린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表’에서였다.

1275년, 국사는 원나라 세조 황제로부터 추앙받으며 초청을 받아 원 나라로 가 황제로부터 스승의 예우를 받았다(上國聞國師之風 嘉師之德 遺宮使迓師)(園監 碑銘에서). 그런데 국사가 이처럼 원 세조로부터 극진한 초청과 예우를 받기 이전, 당시 피지배국의 한 사찰의 승려로서 상국上國이며 대국이었던 원 황제에게 토전土田의 반환을 청하는 장문의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表’를 올리게 된다. 이는 실로 국사의 목숨을 건 모험이었으며 수선사 등 고려 불교계에 어떤 파장이 미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당시 대몽항쟁의 선도에 섰던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이 일본 정벌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때였다. 하여 백성들은 오랜 전란으로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고 대부분 장정들은 부역으로 끌려갔을 정도로 원의 고려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이 극심했다. 사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무신정권에 크게 조력했던 수선사의 살림살이도 매우 곤궁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은 수선사에게 일본정벌을 위해 토지세를 물리고 땅까지 빼앗아 갔던 것이다. 이에 스님은 빼앗아간 토지와 식량을 돌려달라는 표를 올린 것이었으니, 이는 마치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국사는 ‘상대원황제표’에서 “…생각건대, 수선修禪하는 이 정사精舍는 보조普照 성사聖師 때에 창건되었는데, 소방小邦(小國) 선불장選佛場으로서 선류禪流가 수천 명을 밑돌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국의 제왕을 축수祝壽하는 장소로서 하루 중 언제나 불법을 듣고 경배하는 자리가 비어있을 때가 없었습니다.

(수선사)가 도심을 멀리 떠나 있는 탓에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기를 기대할 수 없어 낮에 밥 먹고 새벽에 죽 먹는 것도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이런 까닭에 옛날 국왕이 오랫동안 가까운 읍의 농지를 주셔서 재齋를 지내는데 충당토록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국의 관리는 군량미를 위해 이 곳의 토지대장과 호적을 찾아 땅을 빼앗고 세금을 물리고 있습니다.

이에 그 형세는 물을 잃은 붕어가 호소하는 것(급히 구원을 요청할 때의 비유로 쓰이는 말)과 같고 그 정상은 하늘에 들리는 학의 울음(<시경詩經> ‘소아小雅’ ‘학명鶴鳴’의 ‘학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니, 그 소리가 위로 하늘에까지 들리도다 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는 말을 인용한 것)처럼 절박하기만 합니다.… 惟此修禪精舍。創從普照聖師。是小邦選佛之場。禪流不減於數千指。抑大國祝君之地。梵席無虛於二六時。然以僻在林泉。遠離城。春種秋收之盖闕。午餐晨粥之難支。昔邦君錫近邑之土田。永充齋費。今天使尋別宮之版籍。將備兵粮。勢同失水之鮒呼。情迫聞天之鶴唳”(<원감국사집>원본, 아세아문화사, 1988, p231-234)고 적었다.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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