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인 교수-제2의 인생, “본격 詩作에 몰두하겠다”
■백수인 교수-제2의 인생, “본격 詩作에 몰두하겠다”
  • 김선욱
  • 승인 2020.09.2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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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40년 6개월 봉직-조선대 정상화 선도역에 ‘자부’
교육 민주화, 사학 공공성 훼손 극복, 비리 척결도 노력
기봉선생 현창 사업, 장흥문학 진흥 기여에도 노력할 터
백수인 교수

백수인(66) 교수(조선대학교사범대학국어교육과)가 지난 8월 31일 정년퇴임을 하고, 9월부터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가 됐다. 조선대학교에서 교수로서 봉직이 40년 6개월이었다.

백 교수의 자택은 안양면 기산리 동계마을. 마을 들녘이 한눈에 시원스레 내려다보이고 뒤편으로 사자산 기슭이 감싸 안고 있는 안온하고 고즈넉한 자리다. 장흥중고를 다닌 후 광주에서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교수로 재직했지만, 거의 매 주말마다 오갔던, 양친이 생존시 2,3년 전까지도 살았던 10대째 내려온 종가댁이다. 올 들어 사랑채며 창고며 뜰 앞 주차 공간 등을 개조하며 교수 퇴임 후 여생을 보낼 집으로 산뜻하게 꾸며놓은, 거실 창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 절로 시 한편이 읊조려질 법한 ‘운치가 넉넉한’ 고향집이다. 요즘은 광주에서 강연 등 중요한 일 외에 거의 고향집에 머물며 작시(作詩) 등 ‘제2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에 여념이 없는 백수인 교수를 그의 서재 ‘장천지가(章泉之家)’에서 만났다.

백수인- 그가 살아 온 인생 역정

안양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 백수인 학생에게 ‘글 재주가 좋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꿈에 대해 선친은 “시인만으로는 밥 못 먹는다, 중학교 국어 선생이 되어 국어도 가르치고 시도 쓰는 사람이 돼라”고 충언했다.

그리하여 백수인 학생의 꿈은 중학교 교사와 시인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고 장흥고 졸업 후 국어교육과가 있는 조선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당시 전남대학교에는 국어교육과가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목포 홍일고교에서 교편을 잡는 것으로 백수인의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홍일고에서 교편을 잡으며 방위 근무로 군역도 필했으며 대학원 석사과정도 졸업했다. 군필 후엔 조대부고에서 1년 가까이 교편을 잡았다.

이어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조교로 부임하던 때가 1980년 3월이었다. 그로부터 1982년 전임강사 승진, 1988년 조교수 승진, 1992년 부교수 승진, 1997년 정교수 승진 등의 과정을 거쳐 지난 8월 퇴임하기까지 조선대학교에서만 교수로서 재직이 40년 6개월이었다.

교수 재임 동안 교수 직분 외에도 교육방송국 국장 겸 주간, 신문방송사 편집인 겸 주간, 대학원 부원장, 인문학진흥원 평화인권연구센터장, 조선대학교 학생처장,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원장, 중국광동외국어무역대학교 연구교수(외적교수)(2010-2011) 등 다양한 직책‧직분을 맡으며, 조선대학교 40년 역사의 산 주역이 돼 왔다. 

서재 '장천지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백수인 교수

백수인 교수의 왕성한 활동력은 여러 학내 보직 외에도 문학, 문화 관련의 여러 학회 활동과 사회 활동에서도 두드러졌다. 학회 활동으론 국제한인문학회‧국어국문학회 전공‧한국언어문학회‧한국시학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한국언어문학회 회장‧한국어문학술단체연합 대표(2015-2015)도 역임했다,

특히 사회활동으로 (재)5.18기념재단 이사(2003-2004)를 거쳐 2013년부터 현재까지 (재)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교수로서 큰 관심은-

교육 민주화와 사학 비리 척결

백수인 교수가 자부심으로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교육의 민주화와 사학 비리 척결’이었다. 이는 그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2001-2003)’과 전국교수노동조합 설립 당시(2001년) 광주전남 조직책을 맡았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민주화의 근본은 공존‧공유에 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잘못돼 있는 것은 이러한 공존‧공유의 정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문화도 중앙에만 편중‧집중화 돼 있다. 지역의 문화가 살아야 중앙의 문화도 더불어 사는데 이점이 간과돼 왔다는 것이다. 고등교육도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사립대학에 고등교육을 의존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사립대학은 기업이 운영한다. 기업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남기는 게 목적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학의 비리가 만연할 수밖에 없고 공공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교육열이 어느 나라 보다 치열한 우리나라에선 고등교육을 중시하고, 그것도 무조건 서울대로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넘쳐날 정도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 교육이 중앙으로 집중화 되어 있고, 그러한 교육 결과로 인한 서열화와 서울대‧연고대 등 일류대학 중심의 교육·문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학에서 공공성이 무너지고 사학의 부정‧비리가 만연하는 한, 교육의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둘 수밖에 없다. 사립대학의 공공성이 회복돼야, 교육의 민주화가 이뤄져야, 우리 미래의 비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교수로서 수십 년을 교육의 민주화, 사학비리 척결에 주력해 온 백수인 교수의 열정은 조선대학의 내부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조선대학교 정상화에

발 벗고 나선 백수인 교수

“조선대학교는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뚜렷한 민족적 자각 속에 ‘민족의 대학’으로 1946년 4월, 미군정하에서 종합대학으로 설립된 민립대학이었다. 조선대학의 시발은 우리나라에 대학이 없었을 때인 1922년, 이상재, 송진우, 한용운 등 47인이 회동하여 ‘조선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발기한 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철권통치 아래여서 그 민립대학 설립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해방된 후 1946년에 일제가 세운 경성제대(1926년 개교)를 제외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3개 대학이 새로 설립되어 개교하니 ‘국립서울대학교’, ‘김일성대학’ 그리고 ‘조선대학’이었다. 당시 서울대는 미군정청이, 김일성대학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의 주체였지만, 오로지 조선대학만큼은 그 설립 주체가 관이 아닌 민간이었다. 7만2000여 회원들이 조선대학의 설립에 참여, 조선대학교는 명실상부 민립대학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대학교는 너무나도 당연히 ‘민족의 대학’, ‘민간 중심의 대학’이라는 본래의 설립 취지를 회복하여 우리 민족을 향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백 교수는 역설했다.

문화교류 봉사단을 인솔하고 몽골 과학기술대학교를 방문하다

조선대학교 이사회 비리 문제가 핫 이슈가 되었을 때인 2007년 ‘학교법인 조선대학교 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하며, 조선대 정상화 및 민주화 문제 해결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발 벗고 나섰던 주인공이 바로 백수인 교수였다.

백 교수는 이때를 전후로 공개토론회나 언론 등에 조선대정상화추진위원장으로서 조선대학교 정이사 체제 전환 방안 등의 논지를 적극적으로 발표하기도 했고, 2014년 박근혜 정부 때 정부주도의 대학구조개혁안에 대해서도 ‘조선대 공영화의 당위성' 등의 논지 등을 통해 조선대학교의 문제 해결과 미래 비전 등을 강력히 설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도 했다.

이젠 노교수가 되면서 정년 4년을 앞둔 때이던 지난 2017년 9월 22일에도, 백수인 교수는, 조선대학교의 정상화 방안에 관심을 놓지 않고, 모 일간지에 특별 기고를 통해, 조선대학교의 역사를 개괄하고, 결론으로 “조선대가 나아갈 방향은 무너진 설립 정신의 회복이다. 오늘날의 조선대 문제는 온갖 비리로 1988년 물러났던 구 경영진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다시 복귀시키면서 야기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대는 임시 이사를 파견하여 구 경영진 세력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장차 ‘국민 공익형 이사제’를 거쳐 궁극적으로 당초 설립주체였던 국민에게 그 경영권을 되돌려 주는 것이 정답이다”고 강력히 역설하기도 했다.

또 정년 1년을 앞둔 2019년 6월 7일, 광주시 서석 홀 4층 대호전기 홀에서 ‘지방 사립대학의 공영화와 과제’를 주제로 진행된 학술 세미나에서도 백수인 교수는 ‘조선대학교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실시하기도 했다.

어려서 꾸었던 ‘시인의 꿈’

늦깎이로 2003년 시인으로 등단

백수인 교수가 초등학교 때부터 꾸었던 시인의 꿈. 그 꿈이 이뤄진 것은 2003년 시 전문지 <시와시학>(가을호)에서 ‘겨울 천은사’ ‘강변에서’ ‘새벽’ ‘투명한 난꽃’ ‘금강하구의 목소리’ 등 5편으로 신인상에 당선되며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어렸을 적부터 품어왔던 시인의 꿈을 이뤘다고 할까요.…어렸을 적부터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학문의 길로 들어가다 보니 작품쓰기가 쉽지 않았어요. 나이도 들면서 이론도 이론이지만, 예술적인 지향을 하게 되더군요. …” 늦깎이 시인 등단에 대한 백 교수의 변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시를 선호했다. 이론과 시 작업을 하다 보니 시의 바탕은 ‘서정주의’이고, 다시 그 밑은 ‘사랑’이었다. 그것이 내가 쓰는 시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득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굳게 잠겼던 문이 열리고, ‘사랑과 그리움이 어우러져 자라는 나의 숲이 운명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 당시 문예지에 쓴 당선소감.

그러나 시인 등단 이전부터인 국문학 전문 교수로서 1988년부터 자연스레 학회와 문학단체 등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느라 평론 활동이 더 많았지만, 한편으로 학생들의 교수와 석박사 학위 등으로 시 창작은 더뎌지고 자연스레 시에 대한 평론 등이 더 익숙해지면서 시집보다 먼저 2008년 시론집 ‘소통의 창’(시와사람)을 먼저 펴내게 된다.

이 시론집은 백 시인의 생활공간인 광주를 연고로 가까이서 교류했던 시인들의 시집 말미에 썼던 발문이나 해설, 문학잡지 등에 썼던 짤막한 비평 등을 한데 모아 묶어낸 시론집이었다. 이어 나온 백 교수의 저서들도 ‘대학문학의 역사와 의미’(국학자료원, 2003년), ‘기봉 백광홍의 생애와 문학’(시와사람사), ‘소통과 상황의 시학’(국학자료원, 2007) 등이었다.

한국언어문학회장 때 석천 임억령
선생의 삶과 문학 주제발제 하다

어렸을 때 꿈이었던 시인으로서 당당한 입지의 선언 같은 첫 시집은 비로소 2016년에 펴낸 ‘바람을 전송하다’였다. 시인으로 등단 13년 만에 펴낸 그의 첫 시집이었다. 시인의 존재론, 동양적 세계관 등을 정치하면서도 정갈한 언어로 풀어낸 63편의 시들을 수록한 이 시집은 일상과 자연, 공간과 시간, 사물과 사람에 대한 특유의 단상과 사유가 담기면서 작품마다 잔잔한 울림이 투영돼 있는, 시인 특유의 서정이라는 감성을 매개로 시공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로 꾸며졌다는 게 시단의 평가였다.

본격적으로 作詩 추진해 볼 참

기봉선생 현창사업도 구상해볼 터

“이제, 고향에서 진득히 머물게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도 몰두해 볼 참입니다. 지역의 문화, 지역문학에 대해 더 깊은 고민과 사유도 하고, 지역 문학의 동료, 선후배들과도 더 많이 공유도 하면서, 특히 평생을 해도 다 못할 기봉 선생을 현창하는 사업도 구상하면서 장흥문학의 진흥과 발전에 기여해 볼 참입니다”

백수인 교수는 조선대 재직 중 보람 있었던 일의 하나로, 장흥출신 소설가 한승원을 문창과 간판스타 교수로 영입했던 일과 장흥출신 소설가 이승우를 문창과 교수로 특채 영입을 주도적으로 했던 일을 꼽았다. 특히 한승원 선생의 경우, 3회째 방문해 ‘전임은 못하고 강의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초빙교수로 영입할 수 있었고, 한 선생은 17년간 조선대학교 문창과에서 초빙교수로 강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점에서 백 교수의 남다른 고향사랑의 한 대목을 엿볼 수있게 한다.

중국 연변대학에서 개최된 국제 학술대회에 참가하다(앞줄 좌에서 두 번째)

지난 2016년 장흥군 출신 교수 20명으로 구성된 '장흥교수회'가 창립되었을 때 초대 교수회 회장으로 장흥 발전의 씽크 탱크 역할에도 그 선도역을 자임했던 백수인 교수가 이제 장흥에 머물고 있다. 백수인 교수의 앞으로의 역할이 더욱 기대되고 있는 이유이다.

백수인 교수의 선친은 백낙홍(白洛洪-88세, 2016년 작고), 모친은 오금님(吳錦任-86세, 1919년 작고)여사 이다. 3형제 중 장남인 백 교수의 2제인 백성우 역시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기봉 백광홍의 DNA를 이어받아서였을까. 기봉의 후예로 기봉이 살았던 안양면 기산리 산하에서 기봉이 늘상 지켜봤을 억불산과 사자산을 바로 이웃하며, 기봉이 거닐었을 들녘을 거닐며 기봉 할아버지를 회고도 하고 시 창작에 본격적으로 몰두해보겠다며, 퇴임 후 새로운 인생의 막을 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백수인 시인. 앞으로 기산마을에서 쏟아져 나올 그의 ‘새롭고 풍성한 시 창작물’이 사뭇 기대가 되고 있다.

백수인 시인 프로필

*1954년 5월 14일(음: 갑오 4월12일생) *출생지: 전남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94번지  *안얀초등학교 졸  *장흥중고 졸 *1977 조선대학교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문학사) *1979 조선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석사)(논문:한국 현대시의 전통성 고찰) *1994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논문:오장환 시 연구)

▪저서 *《현대시와 지역 문학》, 국학자료원, 2019 *시집《바람을 전송하다》, 시와사람, 2016. *《소통과 상황의시학》, 국학자료원, 2007 *시론집《소통의 창》, 시와사람, 2007 *《장흥의 가사문학》, 시와사람, 2004 *《기봉 백광홍의 생애와 문학》, 시와사람, 2004 *《대학문학의 역사와 의미》, 국학자료원, 2003

주요 경력 *1980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조교 부임 *1997- 정교수 *2010-2011 중국광동외국어무역대학교 연구교수(외적교수) *1993-1994 교육방송국 국장 겸 주간 *1994-1999 신문방송사 편집인 겸 주간 *2000 -2002 대학원 부원장 *2004-2005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주임 *2005-2007 인문학진흥원 평화인권연구센터 센터장 *2007-2009 학생처장 *2011-2012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원장 *2015-2015 한국언어문학회 회장, 한국어문학술단체연합 대표 *2001-2003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2001 전국교수노동조합 설립 당시 광주전남조직책 *2003-2004 (재)5.18기념재단 이사 *2005-현재 (재)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사 *2013-현재 (재)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이사장 *1988년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 *2003년 <시와시학> 시인 등단 * <전남문학상> <광주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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