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감국사의 시문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
“원감국사의 시문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
  • 김선욱
  • 승인 2020.09.2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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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文林’(4)/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冲止)(2)
‘신증동국여지승람’ 순천 밀양 부안 나주 해남 등 6곳서 소개
성호사설·지봉유설·점필재집 등에서도 원감국사 漢詩 소개
국사 詩文-“한 시대 고민했던 국사의 얼이 응고된 영롱한 보석”
김선욱 시인

<지난 호에서 계속>

국사는 이어 황제가 “포용하는 큰 도량으로 사은私恩을 베푸시어…수선사를 보호하고 토전을 되돌려주시어 진리를 탐구하는 선림禪林으로 만들고 복을 기원하는 도량이 되게 해 주신다면…신(국사)이 감히 훈공熏功에 더욱 힘을 쏟으면서 배전倍前의 충성을 바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토전 반환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마치 기적 같은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이 표문을 받아본 원 세조가 토지를 돌려주고 국사를 황실로 초청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는 국사가 그 표문에서 ‘가히 천재적인, 출중한 문장력을 발휘, 원 세조를 크게 감화 감동시켰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원 세조는 “…국사의 덕德을 아름답게 여겨 궁사宮使를 파견해 영접하였으며…황제도 친히 영접하며 빈주賓主의 예로 대우하고 사부의 은혜를 기렸으며, 온 나라가 국사의 덕을 앙모하고 만백성이 그 인仁에 귀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上國聞國師之風 嘉師之德 遺宮使迓師 乘馹至中夏 皇帝親自迎迓 對以賓主之禮 褒師傳之恩 擧國仰德 萬民歸仁…”(園監 碑銘에서)

아무튼, 고려조 대표적 선승이며 승려시인이었던 국사의 시문은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조선 사림詞林에서도 담론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 소개되며, 여전히 국사 시문의 작품성이 충분히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음을 잘 보여주기 있기 때문이다.

■국사의 시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6군 데서 원감의 시가 인용되고 있다.

경상도 밀양도호부의 ‘고적古跡’ 편에 “고려 중 원감圓鑑의 시에, ‘호수 위에 푸른 산, 산 위에 누각일세 湖上靑山山上樓 / 아름다운 이름이 물과 함께 흐르네 美名長與水同流 / 모래톱 주막들은 달팽이 껍질 올망졸망 傍洲沙店排蝸殼 / 물결 쫓는 배들은 익새 머리 너울너울 逐浪風船舞鷁頭 / 뽕 밭에 연기는 깊어 천리 벌에 해 저물고 桑柘煙深千里暮 / 연꽃이 이울었으니 강이 온통 가을일세 芰荷花老一江秋 / 떨어지는 놀 외 따오기는 오히려 묵은 말 落霞孤鶩猶陳語 / 내 짐짓 새 시를 지어 승유를 기념하네 故作新詩記勝遊(*익새鷁 : 익새鷁를 돛대 끝에 만들어 다는데, 그것은 바람을 잘 탄다는 뜻이다./*떨어지는 놀 외 따오기 : 당 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서縢王閣序 중의 한 경구警句, ‘떨어지는 놀은 외 따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일세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고 소개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경상도, 밀양도호부, 古跡)

전라도 부안현의 ‘불우佛宇’ 편에도 “중 원감圓鑑의 시에, ‘바다 위에 명산이 있단 말 옛날부터 들었더니 舊聞海上有名山 / 다행히 찾아와 숙원을 풀었구나 幸得遊尋斷宿攀 / 앉거나 거닐거나 만 골짜기의 이내 萬壑煙嵐行坐裏 / 앞을 보나 뒤를 보나 겹겹한 섬들 千重島嶼顧瞻間 /높디높은 의상암은 지붕이 하늘에 맞닿았고 義湘庵峻天連棟 / 자씨당(미륵보살)은 돌로 문을 만들었네 慈氏堂深石作關 / 세상 피해 살려면 이만한 곳 또 있을까 避世高棲無此地 / 지친 새 돌아올 줄 안 것 자랑할 만하여라 堪誇倦鳥解知還(*지친 새 돌아올 줄 안 것 :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무심한 구름은 메를 나아가고, 새는 날다가 지쳐 돌아올 줄 알았네’라는 귀절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것을 비유하였다)”고 소개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 부안현, 佛宇)

전라도 해남현의 ‘불우佛宇’ 편에서도 “중 원감圓鑑의 시에, “궁벽진 땅에 쇠한 풀들 아직 더부룩 地幽衰草尙蒙茸 / 송백은 겹겹으로 푸른 옥 당간일세 松檜重重碧玉幢 / 멋진 자취 남아 있는 일탑의 연하라면 一榻烟霞留勝迹 / 우리나라 복되게 하는 100년의 향화로세 百年香火福吾邦 / 흰 눈 깔아 놓은 듯한 빈 뜰의 달빛이요 空庭得月鋪晴雪 / 밤 강물 울부짖는 먼 골의 바람이라 遠壑來風吼夜江 / 장삼 뒤집어쓰고 추워서 잠 못 이루는 밤 衲被蒙頭寒不寐 / 벽 사이 등잔에선 난 같은 불꽃 토해 내네 壁間蘭焰吐殘缸(시제는 ‘多寶寺吟’-다보산은 해남 금강산 소재)”고 소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전라도, 해남현, 佛宇)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발간한 '원감국사집' 

 

전라도 나주목 ‘산천’ 편에도 “중 원감(圓鑑)의 시에, ‘석양의 산봉우리 그림자 물가에 지는데 夕陽峯影落汀洲 /헤진 삿갓 마른 지팡이로 나루터에 섰네 破笠枯籐立渡頭 /유유히 흐른 강물에 산은 아득히 멀어 江水悠悠山杳杳 /가을빛은 사람의 시름을 이길 수 없게 하네 不堪秋色動人愁’ 하였다(치인 이봉준 역)”고 소개했다(이 시제는 ‘錦江錦津吟’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나주목, 산천)

전라도 순천도호부 ‘불우佛宇’ 편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인 소개와 시를 소개하고 있다.

“정혜사(定慧寺-원감국사가 이 사찰에 머무르며 크게 부흥하였다) : 계족산鷄足山에 있으니 절에 부처의 치사리가 있다. 고려 중 충지冲止는 본래 장원壯元 위원개魏元凱이다. 여러 요직을 거친 뒤에 중이 되어 이름을 원감圓鑑이라 하고 이 절에서 살았다. 일찍이 어떤 시에, ‘누가 鷄足山에 있는 노인을 알리오 誰知鷄足山中老 / 일찍이 용두(龍頭-龍頭 : 文科의 壯元) 모임에 상빈(上賓)이었다네 曾是龍頭會上賓’ 하였다. 또 이르기를(又云) ‘처음 바리때(고양그릇) 메고 이 계족산(鷄足山)에 머물렀으나 缾盂初向此峯留 / 이제는 병들고 쇠해 이미 유람도 게으르다네 衰病如今已倦遊 /돌에 쏟아지는 냇물은 맑은 옥처럼 부서지고 落石犇川淸碎玉 / 푸른 계단에 든 구름은 싸늘한 가을을 일으키네 入雲層翠冷磨秋 /높이 오르니 천 바위의 달은 빼어나게 흥겹고 登臨興逸千岩月 / 만학의 물에 돌아가는 노인은 기쁨이 넘치네 歸老歡餘萬壑流 / 적막한 산속의 집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寂寞山家無所有 /오는 객은 오직 그윽한 작은 집을 음미할밖에 客來惟餉小軒幽-치인 이봉준 역(등림登臨 : 登山臨水. 높은 곳에 오름)’하였다. 그가 죽자 문한학사文翰學士 승지 김훈金曛이 임금의 명령으로 그 비명(碑銘-조계사수선사 원감국사비명)을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전라도, 순천도호부, 佛宇)

전라도 장흥도호부 ‘인물’ 편에서도 원감국사에 대한 소개와 함께 시가 소개되었다.

즉 “위원개(魏元凱)는 고종 무신년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에 이르렀다. 뒤에 출가하여 충지(沖止)라 이름하였고,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위문개(魏文凱) 원개의 아우인데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평양 군수에 이르렀다. 원개의 시가 있는데, ‘황금방의 으뜸을 내가 일찍 차지했는데 黃金榜首吾曾點 /단계의 높은 가지를 그대 또한 거두었네 丹桂魁科子亦收/ 천만년 내려오면서 드문 일이 있으니 千萬古來稀有事 / 한 집안에서 살아있는 용 두 마리를 얻었구려 一家生得兩龍頭(그대 : 국사의 동생 元凱를 이르는 말. 원개의 벼슬이 평양군수에 이르렀다)-시제는 ‘祝舍弟就官韻(아우 문개가 벼슬길에 나아간 것을 축하함)’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전라도, 장흥도호부, 인물)

■<성호사설>과 국사의 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이익李瀷이 쓴 유명한 저작물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원감국사의 시 2편이 소개되고 있다.

이익은 ‘동시도습東詩蹈襲’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에는 매양 옛말을 도습蹈襲한 것이 많은데, 그것을 절창絶唱이라고 그릇 전한다. 이를테면, 정지상鄭知常의 부거시赴擧詩 같은 것은, 본시 당唐 나라 위승구韋承矩에게서 나온 것으로서 <사문유취事文類聚>에 나타나 있다…” 이처럼 이익은 여러 편의 답습蹈襲된 시들을 소개하고는 원감국사의 시를 답습한 시와 원감에 대한 소개, 그 시를 소개하였다.

“근세에 어느 재상 하나가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녹수는 시끄러워라 성을 냈는가 綠水喧如怒 / 청산은 말이 없어라 화가 난 듯이 靑山黙似嗔 / 산수의 뜻을 고요히 살펴보니 靜看山水意 / 응당 왕래 잦다고 비웃으리 應笑往來頻’ 하였는데, 이는 또 고려 위원개(魏元凱)의 시에, ‘흐르는 물은 시끄러워라 성낸 듯하고 流水喧如怒 / 높은 산은 말이 없어라 화가 났는가 高山嘿似嗔 / 양군의 오늘날 뜻을 살펴보니 兩君今日意 / 홍진 향해 가는 내가 싫은 게로군 嫌我向紅塵’ 이라고 한 것을 오로지 썼으니, 어찌 가소롭지 아니하랴!

위원개는 장흥(長興) 사람이다.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뒤에 모친의 뜻에 의하여 환속(還俗)하였다. 이 시는 바로 산을 떠나면서 지은 것이다. 두어 해 뒤에 장원급제에 뽑혔고, 그 아우 문개(文凱)도 역시 오래지 않아서 장원급제하였다. 이에 대한 시가 있는데, ‘황금방 첫머리를 내 일찍 차지했는데 黃金榜首吾曾占 / 단계의 높은 가지 그대 또한 얻었구려 丹桂嵬枝子亦收 / 천만 년 이래 드물게 있는 일이라 千萬古來稀有事 / 한 집안이 두 낱의 용두를 낳다니 一家生得兩龍頭’ 하였다. 지금 장흥읍 북쪽에 장원봉壯元峯이 있는데, 그가 살던 터라 한다. 원개는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모친 죽은 뒤에 다시 출가出家했다고 한다.…東詩蹈襲 :

東人之詩毎多蹈襲古語妄傳為絶唱… 一宰相有詩云 ‘綠水喧如怒 靑山嘿似嗔 静看山水意 應笑徃来頻’ 此又專用髙麗魏元凱詩云 ‘流水喧如怒 髙山嘿似嗔 兩君今日意 嫌我向紅塵’ 豈非可笑元凱長興人也初為僧徒後以母意還俗此即出山詩也數年擢魁科其弟文凱亦未乆魁科有詩云 ‘黄金榜首吾曾占 丹桂嵬科子亦收 千萬古来稀有事 一家生得二龍頭’ 今長興城北有壯元峰即其所居之地元凱官至翰林母没復出家云” (<성호사설> 제28권, 詩文門, 東詩蹈襲)

■<지봉유설>과 국사의 시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발간한 '원감국사집'

 

3회에 걸쳐 명나라 사행을 통해 서구 문물과 천주교 지식을 조선에 소개했던 문신 이수광이 편찬한, 문화백과사전의 효시로 평가받는 <지봉유설芝峰類說>에도 원감국사의 시가 소개되었다.

“고려시대에 위원개와 위문개는 장흥인으로, 형제가 모두 장원 급제하였으니 이른바 한 집안에서 두 용두(장원 급제자)가 난 것이다. 위원개는 뒤에 승려가 되었는데, 법호는 원감으로 승평의 정혜사에 머물렀다. 그가 지은 시에 이르기를 ‘어느 누가 알겠는가 계족산 산중에 사는 늙은이가 예전에 용두회 모임의 귀한 상객임을’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돌 위로 떨어지는 세찬 시냇물은 옥을 부술 듯 맑은 소리 울리고, 구름에 층층이 감겨 있는 산에 들어서니 가을 기운이 서늘하네’라고 하였다.…高麗時魏元凱,文凱長興人也。兄弟俱壯元及第。所謂一家生得兩龍頭者也。元凱後爲僧。號圓鑑。居昇平定惠寺。有詩云。誰知鷄足山中老。曾是龍頭座上賓。又云。落石奔川淸碎玉。入雲層翠冷磨秋”(<지봉유설> 卷十三, 文章部六, 東詩)

■<점필재집>과 국사의 시

조선 전기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쓴 시문집 <점필재집佔畢齋集> ‘이준록 부록’편에는 원감국사의 시집이 당대에 유행되고 있다(卽圓鑑也 有詩集行於世)고 표현하고 있다.

즉 “…검교군기감 수녕遂寧 위윤경魏允敬-윤경은 바로 고려 감찰어사監察御史 문개文愷의 손자이다. 어사의 형제 3인이 모두 등제登第함으로써 자기 모친은 대부인大夫人으로 봉하여지고 종신토록 늠미廩米가 내려졌다. 형 원개元愷는 문과의 장원으로 대성臺省의 관직을 역임하고 뒤에 출가出家하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그가 곧 원감圓鑑인데, 시집詩集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공公에게는 고비考妣가 된다.…允敬乃高麗監察御史文愷之孫也。御史兄弟三人登第。封其母爲大夫人。廩之終身。兄元愷以壯元。歷臺省。後出家爲王師。卽圓鑑也。有詩集行於世”(<점필재집>, 이준록)고 기록, 당대 원감의 시문이 널리 회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편저자 등의 국사 시문의 평가

국사의 유작 간행에 직접 참여하거나 시문을 직접 접해 본 사람들은 국사의 시문을 어떻게 봤을까.

고려 때 승려 명우明友는 <동문선>의 ‘원감국사어록서圓鑑國師語錄序’에서 국사의 시 정신을 “봄이 만물에 유행하니 하나의 꽃과 하나의 풀도 다 봄이요, 바다가 1천 강에 두루 통하여 한 방울 물도 다 바다인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의 꽃과 하나의 풀에서 봄을 알지 못하고 한 방울 물에서 바다를 알지 못하는 자는 보는 것이 거리가 있을 것이다. … 譬如春行萬彙。一花一草。皆春也。海遍千江。一涓一滴。皆海也。然不向一花一草上知春。不向一涓一滴上知海者。觀之有暇矣” (<동문선> 제84권, 序’)고 평했다.

(원감국사의 유고는 <원감국사가송어록圓鑑國師歌頌語錄>이라는 이름으로, 국사의 사후 4년 후인 1297년-丁酉본-에 간행됐다. 이후 1447년-세종 29년-에 나주목에서 1297년 ‘정유본’을 재간행하게 되고 이 나주목 재판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1689년 간행된다. 국사의 첫 유작품집인 정유본에서 ‘몽완노인’으로 불리는 승려 명우明友가 서문을 쓰고 이 서문이 <동문선>에 수록된다. 그러나 <원감국사어록圓鑑國師語錄>은 실전되지 않는다 ))

■진성규- ‘국사 시문은 天衣無縫’

2012년 ‘지식을 만드는지식’에 <원감국사집>을 국역한 진성규秦星圭는 ‘해설’에서, 1680년 일본에서 중간重刊된 <원감국사어록圓鑑國師語錄>의 발문을 쓴 ‘천향산하淺香山下 사문소명沙門小暝’의 서평의 한 단락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즉, “…어록(원감록) 한 질을 말하건대, 글자 글자마다 꽃을 토하듯 하고 글귀 글귀마다 의미가 심오하며 갱갱(鏗鏗:설명이 명쾌하며 목소리도 낭랑하다)하여 입을 다물게 하였다. 승려가 되어서는 세속의 일을 완전히 끊고 선정禪定으로만 향해 나아갔으니[趣向味], 그런 글의 연원淵源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었다. 이로부터 손이 춤추고 발이 뛰는 것도 몰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문장은 도끼로 찍어 고친 흔적도 없고 그 뜻은 크고 넓었으며, 하나의 아름다운 옥쟁반 같이 달려갔을 뿐이다.... 所述語錄一帙 字字吐華 句句譚玄 唫之則鏗鏗矣 發揮出塵絶俗趣向 味之則寂寂然 寫透無聲無臭淵藴 自是不知手之舞之 足之蹈之 則其文終無斧鑿痕 其意渾渾 走盤一美璞而已矣”(*出塵: 세속을 떠나 승려僧侶가 되다/*斧鑿痕 : 도끼로 찍은 흔적. 틀려서 고치거나 다시 손질한 흔적.*渾渾; 재능才能, 힘 따위를 떨쳐 드러내다)(치인 이봉준 국역)였다”

고 소개한데 이어, “‘(사문 소명이 국사의 글은) 자구마다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고, 俗氣를 벗어난 경지에 이르렀으며, 문장 또한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상태였다’고 하였으니 가장 적당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어릴 적에 유문儒門에 깊은 소양을 쌓았고, 불문佛門에도 깊은 경지에 다다른 결과라고 추측된다. 즉 유불儒佛의 온축蘊蓄이 자아낸 보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원감국사집>은 한 시대를 고민하다가 사라져 간 충지冲止의 얼이 응고된 영롱한 보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원감국사집> 지식을 만드는집, p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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