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장흥 입향조 변온과 안양면 동촌 마을
■특별기고 -장흥 입향조 변온과 안양면 동촌 마을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10.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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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남 목포홍일중학교 교사

변수남/목포홍일중학교 교사

장흥인은 늘 말한다.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야전사령관이자 이탕개난을 평정한 전라병사와 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한 변국간 장군이 안양 동촌 출신이었다고. 임란과 정유재란 때 변홍원, 변홍주, 변홍달, 변홍량을 위시한 이른바 임란변씨15충들이 안양 동촌을 기반으로 죽순처럼 울연히 솟아났다고. 심하전쟁 때 머나먼 이국땅에서 장렬히 산화한 변덕일은 호남3장사의 한 분으로 의향 장흥을 더욱 빛낸 인물이었다고. 이런 훌륭한 당신의 선조를 탄생시킨 변씨의 터전이 동촌이라고. 장흥인들은 이들이 마치 자신의 직계조상님이나 되는 양 의기를 드높였으나 후손인 나는 선조님의 행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글로나마 변국간 장군의 높은 기개와 임란 때 장흥과 조국 산하를 지키기 위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변씨15충과 김응하 노홍 등과 함께 부차뜰에서 순국한 변덕일과 기미년 4월 4일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하다 일본 헌병에게 길이 1m의 일본도로 양팔이 잘리고 온몸을 마구 난도질당하면서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쳤던 변갑섭의 뜨거운 열(烈)을 있게 한 동촌(東村)의 무한한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장흥 입향조인 변온(卞溫)을 살피게 되었다.

변온은 대과 급제자이자 이조참판을 지낸 세종의 명신 변효경(卞孝敬)의 증손이다. 변온은 원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출신으로 두 가지 이유가 직간접적 요인이 되어 장흥 안양 동촌에 살게 되었다. 그 하나는 음직으로 장흥에 이웃하고 있는 화순 동복현감에 임명된 사실이며 장인인 광산김씨가 안양 동촌 지근거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벼슬이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이끌어주었다면 광산김씨와 결혼함으로써 안양 동촌이란 지명을 꼭 집어 잡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초계변씨 최초 족보인 1742년판 : 변온 내용

변대손은 변온의 손자이며 전라도 안통에서는 제일 공부를 잘했던 사람으로 신잠이 자신의 글에서 동촌노인(東村老人)으로 표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신잠이 언급한 변대손의 동촌노인 부분은 그의 조부 변온이 살았던 동촌과 자연스럽게 연계가 된다. 변효경의 신도비를 변익수가 1990년에 세우는데 이 비도 변씨가 최초로 터를 잡았던 동촌을 바라보면서 안양 수양리 삼거리 옆에 송백처럼 우뚝 서 있다. 변씨13충비도 역시 그렇다.

변씨 족보에는 부인이 광산김씨라고만 언급되지 장인 이름은 기록이 없다. 부인 광산김씨와의 사이에서 변온은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이중 차녀가 김해부사를 역임한 죽산인 안도과 혼인을 하는데 손이 크게 번성하여 장흥파 죽산안씨로부터 높이 받들어 모시는 변씨 할머니가 되었다. 변온이 장흥 입향조였다는 것은 권용현의 <덕후재기>와 기우만의 <변온묘갈>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 입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1987년 발간된 변씨 족보에서는 변온이 1474년에 태어났다고는 하나 이 또한 오기라 믿을 수가 없다. 그 까닭은 변온의 손자 변대손의 사마방목을 통해 알 수 있다.

변대손의 진사 입격 시기는 1504년인데 1987년판 변씨족보 변온 탄생년인 1474년과 대비해 보면 생물학적으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변씨 최초 족보인 1742년판부터 모두 연구해 보았으나 변온의 생몰연대를 한결같이 적지 않았다. 다만 진사를 지냈다는 것과 동복현감을 역임했다는 것과 부인이 광산김씨라는 사실만을 서술했다. 그랬던 것이 1987년판 족보에서는 생몰연도를 분명히 기술해 두었다. 아마 1987년에 족보를 만들면서 변대손의 사마방목과 그의 조부 변온의 생년도를 자세히 대비해 가면서 살피지 못한 오류인 듯하다.

변대손의 사마방목 입격 시기가 1520년대로 가거나 변온의 탄생연도가 많게는 1455년에서 적게는 1460년까지 소급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사마방목은 국가 기록이고 다른 여타 문헌과 대조해 보았을 때 상당히 객관적인 역사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변온의 탄생 시점이 앞으로 거슬러 올라 1455년에서 1460년이 되어야 아들 변효지와 손자 변대손의 세대가 명확히 맞아 떨어진다.

광산김씨나 초계변씨 족보에는 나오지 않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변온의 장인은 김자용(金自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 광산김씨 족보에는 김자용의 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사회가 남성 중심이었기에 여자가 족보에서 누락된 사실을 이상히 볼 일만은 아니다. 김자용은 아들 여섯을 두는데 이 중 김간(金簡)이 1456년 생으로 변온과 나이가 얼추 비슷하다. 변온과 혼인하여 안양 동촌 변씨를 연 광산김씨는 김자용의 아들인 김간의 바로 위 누이거나 김간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었을 것이다. 한편, 김자용과의 안양 동촌 인연은 그의 둘째 아들인 김적(金籍)의 손녀들이 변온의 손자 변건손과 백광홍의 부친 백세인과 부안인 임분과 각각 혼인을 맺는 데서도 어느 정도 팩트를 챙길 만한 요소가 있다.

≪유명조선장흥부사마재제명록≫란 제목을 가진 조선조 태조에서 명종간 장흥도호부 사마시급제자 목록에다 안범, 백맹춘, 김극과 함께 변온을 진사로 기록해 두었다. 변온이 충청도에서 태어나긴 하나 장흥출신사마방목에 등재된 것으로 보아 외지인치고는 장흥지역 식자층 반열에 비교적 순탄하게 편입되었다고 보여진다.

정리한다. 장흥 입향조 변온이 후손들에게 끼친 음덕이 없었더라면 임란 15충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변국간 장군 같은 걸출한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1619년 이국땅 부차뜰에서 장렬히 산화한 변덕일의 애국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콸콸 흐르는 물결의 저 심원한 근원이 되어준 동촌 할아버지 변온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맹자가 그 근원을 보는 것이 물을 보는 방법이라 했다. 동촌과 동촌 할아버지는 오늘도 끊임없이 관란(觀瀾)이 되어 그윽하고 안온한 파동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러니 내 어찌 동촌에 새삼 옷깃을 여미어 감사의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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