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1/군영구미의 고찰(1) - 백사정과 군영구미는 회천이 아닌 장흥이었다고 추정한다
■기획1/군영구미의 고찰(1) - 백사정과 군영구미는 회천이 아닌 장흥이었다고 추정한다
  • 김선욱
  • 승인 2020.11.2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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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의 백사정과 군영구미 위치 검토-
이수경 박사

이수경(문화재학 박사, 지역유산연구원장)

▶본 글은 11월 25일, 장흥군민회관 인문학강좌에서 이수경 박사가 발표한 논문 「‘난중일기’의 백사정과 군영구미 위치 검토」에서 중요한 부문만을 발췌한 것이다.-편집자 주

(논쟁의 빌미를 제공해주고 있는) 백사정, 군영구미를 현재의 보성군 회천면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먼저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활동한 정경달(丁景達,1542~1602)이 지은 정자 백사정(白沙亭)이 장흥부 회천면 바닷가에 있었다’는 18세기 후반의 기록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회천면의 행정구역이 조선시대에는 장흥부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개편 이후 보성군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회천면 군학마을에 성(城) 터라고 주장하는 유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597년 8월 17일 이순신 일행은 장흥부 회천면에 있는 정경달이 지은 정자 백사정에 들러 사람과 말이 쉬었으며, 인근 구미영성(龜尾營城) 터가 남아 있는 군학마을에서 하루 유숙한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이순신…회천(군학리)에 들리지 않았다

 장흥부 해창 선소

 

먼저 백사정에 대해 살펴보겠다. 백사정은 하얀 모래사장 혹은 하얀 모래톱의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흥 땅 백사정이란 곳도 장흥의 하얀 모래사장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지형상 장흥의 하얀 모래사장은 강변이나 바닷가로 특정한 곳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될 수 없다.

「난중일기」 -‘1597년 8월 17일 일찍 아침 식사 후에 곧장 장흥 땅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점심 후에…’ 이를 정리하면, ①장흥 땅 백사정에서는 점심을 먹을 수 있어야 하며 ②보성읍성에서 일찍 출발하여 군기를 싣고 온 말도 쉬게 해야 하고 ③통제사 일행이 점심을 해결할 수 있고 말도 쉴 수 있는 곳은 당시 역‧원(驛·院)이어야 한다.

(그러므로)…통제사가 점심을 먹은 장소, 말에게 여물을 먹이는 장소가 대개 역(驛)과 원(院)이었다. 백사정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했으므로, 이곳은 역원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장소, 혹은 역과 원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필자도 통제사 일행이 점심을 먹고, 말이 쉴 수 있는 백사정을 장흥부 벽사역과 가까운 물가로 추정한다. 8월 17일의 일기를 구체화시키면, ‘이순신 일행은 보성읍성에서 장흥 벽사역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중 벽사역 인근 물가 백사정에 이르자 먼저 말에게 물을 먹이고, 벽사역으로 들어가 조선 수군 일행도 점심을 먹었다’고 설정하겠다.

그렇다면 백사정은 벽사역 인근의 장흥 예양강(汭陽江-현재 탐진강)의 강변 둔치로 추정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백사정을 보성 회천면 벽교리의 ‘명교마을 앞 해안가 넓은 모래 둔치’라 비정하였다(노기욱, 이수경 논문). 그러나 말에게 바닷물을 먹일 수는 없다. 120명이 넘는 군사가 모여서-「행록」에 따르면, 1597년 8월 초부터 18일 사이에 순천에서는 병정 60여 명을 얻고, 보성에 이르러서는 120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바닷가 백사정이란 정자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말과 사람이 쉴 수 있고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장소로 역을 예상하였고, 보성읍성에서 장흥 벽사역으로 이동하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장흥 땅 백사정은 벽사역 인근의 예양강의 모래 둔치로 판단된다.

…(이순신 장군 일행은)…보성읍성에서 출발하여 장흥 웅치면, 장동면, 용계면을 거쳐 부동면 벽사역까지 약 21km를 이동한 셈이다. 당시 120여 명의 군사와 무기를 실은 말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은 ‘대로’로 볼 수 있다. 하여 조선수군 일행이 대로를 타고 이동한 것으로 여긴다.

보성읍성에서 대로를 타고 벽사역을 향해 이동할 때 만나는 장흥 땅 백사정은 예양강(탐진강) 인근의 강변 둔치다. 만약 소로를 타고 이동하였다면 벽사역 방향으로 이동할 때 만나는 장흥 땅 백사정은 제암산에서 발원하여 흐른 역천(驛川-현재는 부동천) 인근의 강변 둔치다. 따라서 백사정을 넓게 보면 벽사역에 도착하기 전의 예양강 강변 둔치로 볼 수 있다.

이순신은 그전에도 장흥 백사정을 방문하였다. 이순신 일행은 1596년 윤 8월, 당시는 흥양(현재 고흥) 녹도진에서 배를 타고 백사정으로 들어왔다. -「난중일기」 : 1596년 윤 8월 19일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의 둔전을 살펴보았다. …녹도에 도착하여 잤다./「난중일기」 : 1596년 윤 8월 20일, 일찍 출발하여 배를 타고 체찰사와 부찰사와 함께 종일 군사 일을 이야기했다. 늦게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그 길로 장흥부에 이르렀다-

당시 이순신 일행은 녹도진에서 머물렀으며, 다음 날 녹도진에서 전선을 타고 장흥부로 들어왔다. 그런데 기존의 주장은, 체찰사 일행을 모시고 회천면 벽교리 명교 바닷가 백사정에서 하선하여 점심을 해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맥상 백사정이 전선의 정박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1597년 8월 17일의 백사정도 전선의 정박처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굳이 군영구미로 가서 전선을 탈 필요가 없어 보인다. 즉 백사정이 전선의 정박처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전선을 某處(즉 군영구미)에 정박하고 벽사역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조선 후기 ‘장흥읍지’에는, 회령방의 정자 백사정에 관한 기록이 있다. 정경달이 지은 정자이다. 물가 백사정에 대한 기록은 검토되지 않았다. 이유는 백사정은 하얀 모래사장이므로 어느 특정한 곳을 지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닷가, 강변의 모래사장은 모두 백사정이므로 지리지에 특별히 오를 이유가 없다.

1910년대 이후 발간된 장흥과 보성 지역의 지리지에는 백사정을 정경달이 보성군 회천면 바닷가에 지은 정자 백사정으로 보았다. 이유는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과 정경달의 관련성을 두었기에 때문이다. 이순신은 백사정으로 나아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이곳에서 약 10리 거리에 있는 전선이 출입할 수 있는 옛 군항지(軍港地)인 군영구미(군학)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았다.

정경달의 연보(年譜)와 ‘盤谷集’에 의하면, 정경달은 임진왜란 이후 1599년에 장흥 회령 백사(白沙)에 청람㙜(靑嵐㙜), 해은당(海隱堂)을 지었다.-‘반곡집’ 반곡일기 등-. 그러므로 정경달의 백사정과 이순신은 이무런 관련이 없다. 백사정이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 명교해수욕장이라는 전거를 검토한 결과, 1966년에 발간된 ‘보성지’의 ‘백사정이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의 수비처였다’라는 기록은 보성군 향토사(1974), 문영구의 연구(1975), 보성군 지명유래지(1990), 조선수군재건로를 고증한 기초조사 보고서(2013)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596년 윤 8월 20일의 이순신 일행의 일정은 고흥 녹도진에서 전선으로 장흥 모처에 도착, 말을 타고 벽사역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해결하였다. 반면, 1597년 8월 17일에는 예양강 인근의 백사정에서 말을 쉬게 한 후 벽사역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고, 다시 말을 타고 이동하여 군영구미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흥 군영구미(軍營仇未)와 선소(船所)

「난중일기」에 위하면, 1597년 8월 17일 장흥 땅 백사정(예양강변)을 거쳐 벽사역에서 점심을 먹은 조선 수군 일행은 군영구미(軍營仇未)에 이른다. 그런데 「난중일기」 번역자 및 연구자들이 비정한 군영구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은상은 강진군 고군면 병영으로 보았고, 조성도는 강진군 고조면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조면은 강진군에 존재하지 않은 面이다. 아마 ‘군영’을 염두하여 강진군 병영으로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용된 일기를 놓고 보면 첫째, 통제사 이순신이 타야 할 전선이 육군의 병영에 있었는지의 여부이다. 둘째, 일기의 내용 상 백사정, 군영구미는 장흥에 소속된 곳이었다.

또 장흥 땅 백사정에 도착하였다는 점, 군영구미에 도착하니 장흥 사람들이 군량을 옮겨간 것에 대한 기록, 다음날 8월 18일 장흥에 소재한 회령포진으로 이동한 기록을 놓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군영구미는 강진군 병영으로 볼 수 없으며 장흥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향토사학자들이 비정한 장소에 대해 살펴보면, 1974년 ‘보성군 향토사’에 수록된 군학마을의 구전되는 구미영(龜尾營) 이야기를 토대로 군영구미를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로 비정하였다. 게다가 이곳에서 배설의 전선을 인수한 회령포진으로 이해하는 오류도 범하였다.

2013년의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에 수록된 군영구미는 다음과 같다.

▶옛 지명은 휘리포로 불렀음. 마하수 장군이 군선을 가지고 와 군수 물자를 이동한 곳임

▶1457년 이곳에 수군만호진이 개설됨으로써 군영구미라 불러오다 1554년 호남진지 회령포진지에 의하면 회령면 휘리포라 부른 기록이 있음(호남진지2, 회령포진지)

▶군영구미 옛터에는 김명립 비와 성지가 남아 있음

▶군학마을은 경주김씨 이전에도 여러 성씨가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사적은 없고 경주김씨 낙향 선조이신 김명립이 1558년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음

▶군영구미는 회천면 군학마을로 회천면 전일 2리이다(이충무공전서 10권 행장)

▶임란시기 구미영성이라 칭함. 이충무공은 군학에서 배에 올라 회령포(장흥 회진)로 향하였음

▶고려시대 태조 23년 영현인 대로현이 회령현으로 바뀌었음. 인종2년에 영현인 회령현이 영암군 소속에서 부로 승격되어 독립된 장흥부로 소속을 옮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보성군에 이속됨.

위의 군영구미에 대한 조사기록을 살펴보면, 문헌 ‘이충무공전서’와 ‘회령포진지’, 김명립의 비를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관련 문헌과 김명립의 비문에는 군영구미의 위치에 대한 내용이 없다.

필자 또한 그동안 군영구미를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에서 전래되고 있는 성(城) 머리, 사장터, 불무골, 진(鎭)밖끝 등 지명이 남아있어 현장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곳을 군영 터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현재 군학마을의 옛 지명이 ‘휘리구미’라 전해지고 있어서 군영구미를 보성군 회천면 군학마을로 추정하였다. 결국 회령포진의 옛터를 군영구미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회령포진의 옛터는 옛터일 뿐이다.

장흥부 선소가 군영구미인 이유

다음으로, 군영(軍營)을 검토해 보면, 1597년 8월 17일의 「난중일기」를 통해 ①장흥 땅 군영구미는 전선이 닿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즉 포구, 선소, 나루터 뜻을 포함한 구미여야 한다. ②군량과 그 군량을 관리하는 군량 감색이 있어야 한다. 즉 군창(軍倉)과 관리(官吏)가 있어야 한다 ③통제사 및 조선 수군 일행이 머물러 잘 관청(官廳)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곳이 군영이다. 당시 장흥부의 군사(軍事)와 관련된 영(營)을 살펴보면, 수군진 회령포진과 장흥부 船所-선소는 시기와 기능에 따라 船倉(艙, 滄, 廠), 待變亭, 御變亭, 戰船所 등으로 별칭되었으며,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군선의 건조·수리, 정박처, 그리고 수군보급품의 보관·지급하는 공간이었다. 아울러 조운선·상선의 정박·점검·수리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바닷길의 무사함을 비는 祭儀의 공간이자 포구로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선소는 조선시대 수군력, 수군활동, 수군사, 해양문화 등 연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송은일, 논문(2017), 317쪽).-뿐이다. 모두 수군과 관련된 영이다. 육군과 관련된 시설은 당시에 장흥에 존재하지 않았다.

앞에서 예로 든 당시 이순신 일행은 1596년 흥양 녹도진에서 전선을 타고 장흥부로 들어오는 장면을 적은 일기(‘1596년 윤 8월 19일’, ‘1596년 윤 8월 20일’) 내용대로라면 전선의 정박처를 백사정으로 오인할 수 있다. 전술하였듯이, 백사정은 벽사역 인근 예양강의 강변이다. 전선의 정박처가 아니다. 일기에는 장흥부 선소(군영구미)가 생략된 것이다. 녹도진에서 출발한 전선은 장흥부 선소에 도착하고, 이들은 하선하여 벽사역까지 말을 타고 이동한 후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벽사역 서쪽으로 5里에 있는 장흥부 읍성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백사정이 전선의 정박처라면 굳이 군영구미까지 이동하여 배설이 보낼 전선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수군진 회령포진에 전선을 정박한 후 이동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장흥부의 선소가 있다는 것이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2일… 아침에 공무를 본 후 녹도로 가는데 …먼저 흥양 전선소(戰船所)에 이르러 배와 기구를 직접 점검하고, 그 길로 녹도로 갔다”는 대목이 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구역을 돌며 순찰하는 일정 중흥양현에 도착하여 전선과 기구를 점검하는 날의 기록이다. 선소에는 전선과 기구가 있으므로, 이곳은 전라좌수사의 순찰 대상지였다.

흥양현에는 4곳의 수군진인 녹도진, 발포진, 여도진, 사도진이 있었다. 이곳에는 각각의 전선이 있었으며, 사도첨사를 비롯하여 각각의 만호가 이 전선을 관리하였고, 모두 전라좌수영 관할로 좌수사의 통제를 받는 곳이었다. 전라좌도 연해안 5개고을[5官]이 전라좌수사 관할에 소속이 되어 유사시 해전에 참전하였다. 이들은 각 지역의 수군진과는 별도로 평소 읍성 가까운 포구에 전선을 마련하여 무기를 갖추고, 격군을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군영(軍營)이라 할 수 있다. 순천부사 이하 고을 수령이 주관하는 선을 정박해 놓은 곳이 선소였다.

이는 장흥부에도 적용되었다. 전라우수영에 소속된 장흥 부사도 유사시 전선을 이끌고 전투에 참전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평소에 전선을 장흥부 선소에 정박시켜 두고 전선 및 군기를 단속하여야 했다.

장흥부 선소는 장흥부의 전선 정박처이며, 이곳에는 군량 창고 및 군기고와 이를 관리하는 군량 감관 및 색리[監色], 그들의 집무 공간인관청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요건을 모두 갖춘 곳이 군영이다.

…16세기 중엽, 진관체제가 제승방략체제로 바뀌면서 전라좌수영은 관할 수군진 뿐만 아니라 연해 지역 각 읍에 수군기지를 설치하여 수군 훈련과 군선 관리 등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읍에 읍 수군이 창설되었고 읍 수군이 주둔할 수 있으면서도 전선을 건조하고 계류시킬 수 있는 장소로 선소가 들어섰다.

여하튼 장흥도호부의 경우 회령포진과 장흥읍 수군의 선소 두 곳이 장흥 땅 군영에 해당되며 이곳이 당시 수군기지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연해 군현은 읍 수군의 전선 정박처를 갖추고 있었으며, 장흥부도 읍 수군의 기지가 있었고, 그곳이 군영구미, 장흥부 선소이다. 장흥부는 大邑으로 선소 또한 군[中邑], 현[小邑]의 규모와 달랐을 것이다.

…‘장흥읍지’(1747) 따르면 ‘장흥도호부 선소는 府 치소 동쪽으로 3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 장흥부지도」에는 海倉 건물이 부 치소에서 30리로 표기되어 있고, 바로 앞 우측으로 군기고와 석돈, 전선, 병선, 사후선이 각각 1척씩 표현되어 있어 조선 후기 장흥부 선소는 해창과 동일한 장소, 또는 인근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선소와 해창의 기능이 같다는 것은 아니다. 장흥도호부 선소는 포구 안쪽에 있는 장흥군 안양면 해창마을 일원이다.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서 장흥부 선소의 위치를 살펴보겠다.

‘장흥읍지’ 안양방 창고조에는 附船所가 기록되어 있다. ‘선소에는 대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1척 등이 있으며 좌수영에 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16년의 ‘장흥부읍지’ 창고조에는 ‘司倉, 賑恤庫, 大同庫, 軍器庫, 海倉, 南倉, 船倉’이 기록되어 있다.

‘해창은 장흥부에서 동 30리 안양면에 있으며, 선창은 해창에 있으며 장흥부에서 동 3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다면 을묘왜변 후 마련된 읍 수군의 전선 정박처인 선소의 선창은 조선 후기의 해창으로 이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장흥부의 선소는 군영구미이며 전선, 군기고, 창고가 있으므로 군영에 해당된다. 장흥부 고지도에서는 선소와 해창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선소가 해창과 같은 곳에 위치한 것은 이곳의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연구자의 견해로는 장흥 회령포진의 포구보다 장흥부 선소가 있는 포구의 규모가 더 큰 것으로 판단된다./김선욱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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