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2/‘군영구미’의 고찰(2) - 이순신 수군재건시, 군영구미는 군학리가 아니었다
■기획2/‘군영구미’의 고찰(2) - 이순신 수군재건시, 군영구미는 군학리가 아니었다
  • 김선욱
  • 승인 2020.11.2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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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학의 ‘전라도 장흥도호부 수군(水軍) 만호진(萬戶鎭) 회령포(會寧浦) 연구’에서
이병혁/한문학자, 문학박사

▶… ‘전라도 장흥도호부 수군(水軍) 만호진(萬戶鎭) 연구’는 지난 2017년 6월,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이 발간한 『호남문화연구』61호 pp.223~254(31pages)에 실린 이병혁 박사의 논문이다. 이 논문은 전남도가 2015년에 추진한 이순신 길 수군재건로 사업에서 회천면 군학리 일원을 ‘군영구미’로 비정한 관련 논문들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한 논문으로, 당시 폐령현이었던 군학리 일대가 군영구미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논문 중, ‘군영구미=회천 일원’의 부당성을 제기하면서 당시 이순신 수군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회령포진에 개설과 이진 등에 관한 부분만 발췌한다.…편집자 주◀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해방체제(海防體制)는 조선조 태종, 세종을 거쳐 세조 3년(1457)에 이르러 전국적인 진관체제(鎭管體制)와 함께 일차적인 해방체제가 완비되었다. 이때 구축된 해방체제는 이후 삼포왜란·을묘왜변·임진왜란 등 크고 작은 왜구의 침입을 거치면서 왜구의 침입 경로· 해안지형· 조류변화 그리고 수조(水操)의 시행에 따른 정책변경 등의 추이에 따라 신설·이설·폐지·관할변동과 같은 변화를 거치면서, 왜구의 침입이 비교적 줄어든 후대에는 표류민(漂流民)의 호송 등 해상방어의 근간으로 작동되다가, 고종 32년(1895) 을미년에 각 군문이 통합되어 군무아문(軍務衙門)으로 일원화 되면서 폐지되었다.

이러한 해방체제에 대한 연구가 이제까지는 주로 국방제도사 연구의 일부분으로 다루어지거나 왜구의 침입에 따른 전쟁사 특히 임진왜란시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승전과 역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진포(鎭浦)의 설치와 변동 등이 부차적으로 기술되기도 하였지만, 해방체제의 하부조직인 제진(諸鎭), 즉 개별 진포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사례는 미비한 편이었다. 이처럼 미진한 해안 진포에 대한 연구가 지방자치 시대가 도래한 근래에 이르러 각 자치단체별로 지방사 연구의 명분과 관광 유적지 개발 등을 통한 지역홍보라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 경쟁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또한 해당지역의 지방대학에서도 해양도서(海洋島嶼) 연구와 지역사회의 관심사에 부응한다는 취지에서 연구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장흥부 회령포진은 정유재란(1597)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충무공이 전선 12척을 얻어 임진왜란 해전 중 가장 극적인 승리를 쟁취했던 명량해전(鳴梁海戰) 승리의 단초를 제공했던 역사의 현장이고, 근래에는 전라남도에서 추진하는 ‘조선수군 재건로 조성’사업의 중요 거점이 되어 새로운 역사·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유적지로서 그간 크게 부각되지 않고 방치되었던 설진과 이설의 시기· 축성 등 관련 문헌상의 상이한 기록들에 대한 재검토가 요청되고 있고,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정립해야 할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425년 (세종 7년) 회령포에

수군 만호진의 설치 이설됐다

고려 고종 10년 계미년(1223) 5월 금주(金州)의 왜구 침입 기사로 고려사에 처음 등장한 왜구는 그 후 충정왕 2년 경인년(1350) 2월에 고성(固城)지역 등의 침입을 기점으로 하여 고려 전역에 대대적으로 침구하기 시작하였다. 장흥지역 또한 같은 해 4월 장흥부의 조운선이 약탈당하고 6월에 장흥부 안양향(安壤鄕)이 침탈을 당한 이래, 장흥부에 왜구의 침탈이 점점 거세지고 지역이 황폐해지자, 다음 해인 우왕 5년(1379)에 왜구의 약탈을 피하여 장흥부의 치소를 내륙의 철야현(鐵冶縣)으로 옮기고, 공양왕 원년(1389)에는 보성군으로 잇달아 옮기는 등 극심한 피해를 당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태종 6년(1406) 1월에 왜선 6척이 장흥부 주포(周浦)에 침범하여 병선 1척을 약탈하였고…이러한 왜구에 대한 대응책으로 세종 4년(1422) 11월에 주포와 회령포를 관할하는 전라도 지역의 수군통수권자인 도안무처치사(都安撫處置使)의 청을 받아들여서 최근에 왜적이 침입했던 해변 요해지인 회령포(會寧浦)에 본영의 군선 2척과 좌·우도의 군선 각 1척씩을 차출하여 정박(碇泊)시켜둠으로서 뜻밖의 사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권18).

이러한 조치가 시행 된지 3년 후인 세종 7년(1425) 2월에 전라도 감사가 병조의 관문(關文)에 의하여, 전라도 각 포 병선의 이박(移泊)편의에 대한 여부를 현지시찰하고, 조목별로 열거한 보고서에 회령포 만호의 병선이 머무르고 있는 소마포(召麻浦)는 조수가 물러가면 물이 얕아지기 때문에 병선의 출입이 용이하지 않다고 하면서, 비옥한 토지가 많고 왜적이 밟는 첫 길〔初程〕인 주포(周浦)로 병선을 이박 시키기를 청하므로 지형의 이점과 방비의 편의를 위하여 만호진을 주포로 이설하게 되었다. (『세종실록』권27)

이때에 ‘기존의 회령포’(회천면의 회령포)라는 지명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게 되어 장흥부의 관내에 2개의 동일 지명이 통용되게 되었다. 이 같은 사례는 다른 지역 진포의 이설 과정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지역사정에 밝지 못한 외지 연구자들의 혼란과 오류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처음 회령포진이 설치된 장흥부의 회령포(회천면에 있던)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장흥부에서 떨어져 나가 보성군에 편입됨으로서 이러한 혼란이 더욱 심하여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회령포진의 이진 사실은 그 후 7년째 되는 세종 14년(1432)년에 완성된「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전라도조에 “관방(關防)의 수어(守禦)는 회령포가 장흥부의 남쪽 주포에 있다”라고 한 기록과, 후대인 1530년에 발간된『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관찬(官撰) 지리지와 1747년 정묘년(丁卯年)에 발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흥부의 사찬(私撰)지리지인『장흥읍지(長興邑誌)』등 모든 지지·지도에 회령포의 위치를 ‘장흥부 남거(南距) 또는 남지(南至) 50∼77리’라고 표시하고 있다.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사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한 1871년의『호남읍지중장흥도호부지(湖南邑誌中長興都護府誌)』와 1872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장흥부회령진지도(長興府會寧鎭地圖)」의 표제에 “옛적 본진은 장흥부의 동(東)쪽 60리 떨어진 회령면 휘리포(揮里浦)에 있었는데 장흥부 남(南)쪽 60리 떨어진 대흥면(大興面) 선자도(扇子島)로 옮겨서 옛 이름 그대로 회령포라 했다.”라고 한 기록의 비교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반면에 장흥부의 동(東)쪽에 소재한 회령면·회령방(會寧坊)에 대해서는『세종실록지리지』이후에 발간된 모든 지지·지도상에 ‘회령폐현(會寧廢縣)’의 기록 외에는 수군의 진포를 위시한 성보(城堡) 등 관방에 대한 특기사항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위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위 기록들을 토대로 하여 회령포 만호의 병선이 정박했던 회령포진은 처음 병선을 정박시켰던 세종 4년(1422)부터 세종 7년(1425)까지 3년 동안은 장흥부의 동(東)쪽인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관내의 포구에 소재해 있었고, 이후 정박처를 옮겨서 옛 이름을 그대로 붙인 회령포진은 장흥부 남(南)쪽 지금의 장흥군 회진면 관내의 포구에 위치하였다가, 성종 16년(1485)과 성종 21년(1490)사이에 회령포성의 축성을 계기로 현재의 위치인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會鎭里)에 고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 1554년(명종9년) 회령포 이진설

성벽 완전 보존…‘회천 회령포=군영구미’ 설 근거돼

그러나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1940년 발간『장흥지(長興誌)』 “회령진은 명종 9년(1554) 보성군 회령면에서 옮겨와서 회령진으로 개칭하였다.”라고 한 기사가 그것이다. “회령진은 대덕면 회진리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녹도, 사도를 제어하고 서쪽으로는 마포, 고금도, 신지도와 연결되며 수군만호가 주둔한다. 좌수영에 소속되어 명종 9년(1554)에 보성군 회령면에서 옮겨와서 회령진이라 개칭하였는데 고종 을미년(1895)에 폐지되었으나 성벽 등은 아직까지 완전하게 보존되어있다.” (『장흥지 (무인지, 1938)』, 장흥지속록, 제1권, 고제, 요처)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일제시기에 나온 이 읍지 외에는 입증할 만한 자료를 찾아보기 힘들어 그대로 취신(取信)하기는 어렵다는 견해와, 이는 회령포진의 이설 기록이 아니라 수군편제상의 소속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추정이 있기도 하지만, 이 기록이 장흥군에서 발행된 주요 향토기록물에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1989년『장흥군의 문화유적』중「장흥군의 연혁」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선행 연구의 결과는 이후에도 비판 없이 수용되어 장흥군에서 발간되는 주요 문헌들인『장흥지리지·읍지모음』,『장흥군지』등에도 기술되고 있을 뿐 아니라, 처음 회령포진이 설치되었던 옛 장흥부의 회령면을 이관 받은 인근 고을인 보성군에서 발간된『보성군사(전)』,『보성군사2-선인의 자취 사료와 역사유적』,『보성문화유산총람(보성문화원 간)(2004)』등은 물론 전라남도의 ‘조선수군재건로조성’ 사업에 참여하는 일부학자들의 저서-노기욱의『약무호남 시무국가 명량 이순신』(2014), 노기욱·이수경·정현창의『금신전선 상유십이 보성 이순신』(2015)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회령포진의 설치·이설 시기에 대한 관련 연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실정으로, 이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정립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에 관한 다른 견해가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세종 4년(1422)에 회령포에 병선 4척을 정박하여 세워두었다〔泊立〕는 기록을 최초의 설진 기록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의 수군은 병선에 무기와 식량을 싣고 배 위를 영보(營堡)로 삼아 항상 선상에서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원칙에 의하면 당시의 수군 진포는 병선의 정박처(碇泊處)로 지정된 포소(浦所)일 뿐으로 정박처의 이동에 따라 진포의 위치도 수시로 변동 되었으며, 후대의 그것처럼 고정된 성보(城堡)를 수축하여 진포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진포의 명칭 또한 회령포진처럼 이전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또는 새로운 포소의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례는『조선왕조실록』가운데 조선 초기 성종 이전의 관련 기록에서 쉽게 확인 해 볼 수 있는데, 전라도 용문포(龍門浦)에 정박해 있던 도만호(都萬戶)의 병선을 여도(呂島)에 이박(移泊)시킨 세종 7년(1425) 2월의 기사를 여도 도만호진의 설진(說鎭) 기사로 보는 것도 이 같은 사례 중의 하나이다. 병선의 정박처를 포소로 삼는 조선 초기 수군의 근무방식은 본격적으로 진포에 성보를 수축하여 수군의 ‘장재선상수어’ 원칙이 폐지되기에 이른 성종 15년(1484)경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병선의 정박과 이박에 관한 기록을 수군 진포의 설치·이동과 연계해서 해석한 연구의 사례는 관련 논문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회령포진의 설치와 이설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회령포에 수군 만호진을 설치했다는 사실은, 회령포에 처음 병선을 정박시킨 3년 후인 세종 7년(1425)의 회령포진의 병선을 주포(周浦)로 옮겼다는 기사의 머리에 ‘회령포만호’라는 관직명이 이미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적어도 세종 4년(1422)과 세종 7년(1425) 사이 3년 내외간에 이미 회령포에 수군 진포가 설치되어 만호가 주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조선 초기의 수군의 근무방식과 관련기록들을 종합하여 판단해 보면 회령포에 병선 4척을 정박하여 세워두었다〔泊立〕는 세종 4년(1422)의 기록을 회령포의 최초 설진 기록으로 보는 견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음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을 위시한 모든 장흥부 관련 지지·도서에 나타나고 있는 회령포진이 장흥부의 남(南)쪽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장흥부 남거(南距) 또는 남지(南至) 50∼77리’라고 표시한 회령포진의 위치는 모든 기록상에 변동이 없고, 1871년의『호남읍지중장흥도호부』와 1872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장흥부회령진지도」의 표제 또한 최초 설진 당시의 회령포 위치를 장흥부의 동(東)쪽 60리로 표시하고 있음은 물론, 관련 기록 중에『세종실록지리지』를 제외하고 가장 빠른 시기인 1530년에 간행된 지리지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고려시대에 회령포를 관장했던 회령폐현지(會寧廢縣址)의 위치를 ‘장흥부의 동(東)쪽 32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보더라도, 회령포진의 이진(移鎭)은 적어도 세종 14년(1432)년에 완성된「신찬팔도지리지」전라도조에 “관방(關防)의 수어(守禦)는 회령포가 장흥부의 남(南)쪽 주포에 있다”라고 기록한 때보다 빠른 시기에 이미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또한 세종 4년(1422)에 설진한 회령포 만호진을 세종 7년(1425) 이설하였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세 번째로, 부적절한 사료(史料)의 선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1989년에 발간된『장흥군의 문화유적』중「장흥군의 연혁」의 회령포 관련 기록은 회령포진이 명종 9년(1554)에 보성군 회령면에서 장흥군 대덕면으로 옮겨왔다는『장흥지』기록의 기초 위에, 그 이전 시기인 성종 21년(1490)에 회령포진성이 축조되었다는『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2차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진의 이설과 축성의 시기를 시간대별로 정리하여 명종 9년(1554)이전에는 회령포진성이 보성군 회령면에 소재했을 것이라고 추론하면서, 그 이전 시기의 사료인 세종 4년(1422)과 세종 7년(1425)의 기록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

더 나아가 이후에 계속적으로 발간된 지지·지도의 기록내용과도 배치되는 입증하기 어려운『장흥지』의 기록을 손쉽게 1차 사료로 선택함으로써 사실의 혼란을 초래 하고 회령포진이 소재했던 두 지방자치단체인 보성군과 장흥군의 지방사 연구에 큰 걸림돌로 작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회령포진 1488∼1491 4년간 축성

회천면 전일리‧봉강리 일대 회령포진성은 ‘폐현’

회령포진 등 연안 진포의 축성은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어 수군의 ‘장재선상수어’의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한 성종 9년(1478) 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여, 성종 15년(1484) 사헌부 집의 조숙기(曺淑沂)의 건의와 성종 16년(1485) 4도 순찰사 홍응(洪應)의 서계에 따라 전라좌수영 관하의 7개소와 경상도의 3포 등 9개소가 1차적인 축성대상지로 선정되어 성종 19년(1488)부터 성종 22년(1491)까지 4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 회령포진성은 이들 중 비교적 빠른 시기인 성종 21년(1490) 4월에 높이 13척, 둘레 1,990척 규모로 축성이 완료되었다.

이러한 회령포진성의 축성시기에 대한 고찰을 통해 명종 9년(1554)의 이진설에 입각하여 전남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와 봉강리 일대에서 회령포진성 관련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는 ‘회령포성(귀두산성)’과 ‘구미영지 등의 기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문제의 제기가 가능해졌다.

나아가 관련 지지·지도의 기록을 참고하여 보면 회천면 봉강리 지역의 ‘회령포성’은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회령폐현의 관련 유적〔城池府城〕이고 전일리 군학마을에 소재하여 ‘구미영지’라 불리는 석축열(石築列)은 회령포진성 축성 이전 시기에 회령포 만호가 운영했던 여사(廬舍)의 유적이거나, 아니면 이후 어떤 시기에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일종의 엄폐물로 사용되었던 임시 방책(防柵)이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구미영지’에 대한 이러한 가능성은『보성군사』집필자의 의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군학마을’ 유래에는 ‘구미영성’으로 나와 있는 ‘구미영지’에 대하여, 보성군사편찬위원회가펴낸 『보성군사(전)』639쪽에서 집필자인 순천대학교 최인선 교수는 “…… 후대에 없어졌다고 해도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수긍하기 어려워서, 혹시 성이 아니라 바다에 상륙하는 왜적을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엄폐물로서 사용되었던 소규모 석축열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김선욱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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