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보성에 빼앗겨버린 ‘군영구미=해창’ 되찾아와야 한다
■사설 - 보성에 빼앗겨버린 ‘군영구미=해창’ 되찾아와야 한다
  • 김선욱
  • 승인 2020.12.1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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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그룹 학술심포지엄, 연구 용역 … ‘의향 해창 관광지화’ 추진하라

안양면(安養坊)에 속한 해창은, 장흥부에서 30리(在府三十里-‘與地圖書’)(1759-1765), 또는 동남으로 20리(東南二十里-‘大同地志’(1865)에 있었던 나루(항만)가 있는 어촌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수군 병선이 있었다(‘在安良有戰兵船-長興都護府邑誌,1868)는 등의 기록이 사서에 나온다.

이러한 해창이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된 것은 『장흥읍지』(丁卯誌)(1747)에서였다.

즉,“(해창은) 안양방 남쪽 입구에 있다. 장흥부에서 조세로 바치는 쌀을 저장하는 곳으로, 바다를 통해 경창으로 운반한다. 물 건너 실어 나르는 배는 포천지(浦村誌)에서 예시한 섬의 상선이나 혹은 경강선(京江船 :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오는 세곡을 실어 나르던 배)을 쓴다. 부선소(附船所, 해창진에 부속되어 있는 선소): (해창의) 창고 앞에 있다. 선창(船艙 : 배가 닿는 곳(부두)은 매년마다 부역하는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땅을 판다. 대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적의 형편이나 지형 따위를 살피는 배) 1척이 모두 좌수영에 소속되어 있다. 전선저치미(戰線儲置米 : 전선에 쌓아두는 미곡)는 3,201석, 13두, 4승, 9합, 4작, 3리, 4푼이다. 在坊南口 儲本邑稅米, 海運京倉, 漕稅例用浦,村誌, 島商船, 或京江船, 附船所: 在倉前, 有船(倉)〔 〕, 每歲役民丁掘土, 大船一, 兵船一, 伺候船一, 俱屬左水營, 戰線儲置未, 三千二百伯一石十三參斗四升九合四夕三里리四分” 고 ‘안양방’ ‘창고’ 편에 기록돼 있는 기사에서였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잠행하며 수군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구례 보성을 거쳐, 장흥부 회진(회령진)에 도착하기 전날, 장흥부 관할 ‘군영구미’에서 1박을 한다. 그런데 당초 전남도가 이순신 수군로 재건 사업에서 이 장흥부 관할의 ‘군영구미’를 회천면 군학리(당시 회천면도 장흥부 관할)로 비정한 후, 이곳에 안내간판 등 시설을 대대적으로 구축하고 관광지화 하면서 장흥의 향토 사학자들이 크게 반발, ‘군영구미는 회천면 군학리가 아니라 안양면 해창이었다’고 논지를 펼 때나, 지난 11월 25일 이수경 박사가 “과거 군영구미를 회천면 일원으로 비정한 것은 착오였다” “군영구미는 안양면 해창(선소)로 비정한다”는 새로운 논지를 펼 때도 해창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모두 정묘지(장흥읍지) 등에 준하는 기사가 거의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된 사실(史實, 위성 향토 학자의 확인)에서, 비로소 당시 해창진의 규모와 기능, 구조가 한층 확장, 강화된 기사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군영구미=해창진이었다’는 사실(史實)에 보다 근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장흥지』 戊寅誌(1938년)-‘長興誌續卷之一 / 倉庫 / 將官廳’에 기록된 그 사실은 “장관청(將官廳)인 해창진에는 장(군장)의 숙소가 있다. 세관기가 세워져 있고 세관의 숙소가 있다. 병선은 1척이고 세금을 내고 일하는 사람이 삼백 명이다. 좌수영에 속하고 수군 조련을 한다. 징선(세금을 싣는 배)은 1척이고 선창에 상시 정박해 있으며 쌀 운반 때 사용한다. 將官廳 在海倉鎭將宿所捧稅官寄 宿所. / 兵船 一隻 稅役民三百名附屬 屬于左水營水軍操鍊. / 徵船 一隻常泊于船倉米運送時使用” -『장흥지』 戊寅誌(1938년)-‘長興誌續卷之一 / 倉庫 / 將官廳”이다.

당시 장흥부의 인구는 5천 5,6백 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해창진에만 군역 3백여 명이 상주했다는 데서 우리는 당시 해창진의 그 대단한 규모와 구조, 기능 등을 능히 가늠할 수가 있게 된다.

해창의 수군, 조운창 등의 규모나 그 기능의 중요성으로 인해, 근대에 와서도 이곳에는 안양면에서 처음으로 경찰주재소가 설치되기도 했으며(1910년), 1914년에는 헌병파견소가 설치되기도 했고, 1914년에는 안상면과 안하면이 통합되면서 면사무소가 이곳에 존치되기도 했었다.

기록에 의하면(‘안양면지’), 1940년 해창진의 하루 물동량이 무려 100여 톤이 반출되었고, 용산면 남쪽 지방을 왕래하던 관문이었으며, 관산 대덕 상인들이 해창을 통해 용곡리 독곡재나 수락리 저날재를 넘어 회천장을 왕래하였다고 하고, 당시만 해도 해창 앞 바다는 2백톤급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수심도 깊었다고 한다.

그동안 위성 양기수 이병혁 등 장흥 향토 사학자들은 이순신이 머물렀던 ‘군영구미’가 해창이었다는 논지를 수차 밝혔었고, 특히 위성 씨는 개인적으로 회천면 군학리를 군영구미로 비정한 전남도에 반대 의견의 민원을 2회나 제출,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끝내 성사시키진 못했다.

장흥 학자가 아닌 외부 학자로 지난 2017년 10월 13일, 김덕진 교수(광주교대 사회교육과)가 “군영구미는 안양면 선소(해창)로 추정한다”고 발표한 이후, 전남도 이순신 수군 재건로 사업 추진 당시 ’군영구미는 회천 군학리였다‘는 역사적 근거 제공에 함께 참여했던 이수경 박사(전남대문화재학 박사)가 지난 11월 15일 기존의 자기 논지를 바꿔 ‘군영구미는 해창(선소)으로 비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장흥읍지’에 의해 해창리 해창진의 규모와 기능, 기능, 구성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그동안 장흥은 1597년 정유재란 때의 회령진과 10여 척의 배를 인수받아 회진에서 기포한 이순신의 역할에만 집중했었다. 보성군이 군영구미를 회천면 군학리로 비정하고 관광지화 하는 등 이순신 장군을 이른바 ‘의향 보성’의 중심으로 끌어드릴 때도 침묵하던 장흥군이었다.

결국, 이유야 어찌됐든, 장흥군은 보성군에 군영구미를 빼앗긴 꼴이 돼 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거지로 보성이 보성군의 구미와 장단을 맞춘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군영구미=해창’을 ‘군영구미=군학리’로 뺏아가 버린 것이다. 이제는 반드시 되찾아와야 한다. 그것이 후인들인 우리의 몫이며 역할이고,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우선 ‘군영구미=해창’ 설에 대한 객관성 확보가 시급하다. 외지 전문가들의 역사적 연구 결과 등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외부 학자 2명이 ‘군영구미=해창’ 설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제는 장흥군이 서둘러 나서야 한다. 국내 최고 권위의 학자들을 초청, ‘군영구미=해창’ 설 근거의 학술 심포지엄도 개최하고, 이를 바탕으로 호남학연구소나 대학교 연구기관 등에 ‘군영구미=해창’ 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연구 용역을 추진하고, 이어 ‘해창=군영구미’에 대한 역사 관광지화를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

역사의 진실은 감출 수는 없다. 언젠가는 그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어서이다. ‘해창=군영구미’ 설이 점차 명명백백히 밝혀지고 있는 지금, 이제는 장흥군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보성군에게 뻬앗겨 버린 ‘군영구미=해창’을 하루 속히 되찾아주길 간곡히 당부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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