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 수상- 그립고 아름다운 내 고향길 Ⅲ
■ 장흥 수상- 그립고 아름다운 내 고향길 Ⅲ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12.10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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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석/수필가

모든 인간관계가 적자생존으로 코드화 되어가는 환경 속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득 한편의 영화나 그림 속에서 안정감을 느낄 때가 있다. 또 무심코 걷던 길에서도 당연한 것들을 새롭게 보는 경험을 한다.

입동이 지난 며칠 후 초겨울 석양 무렵 코로나 바이러스도 식힐 겸 운동 삼아 고향의 남상천 둔치 소롯길을 거닐었다. 강둑 아래 실개천은 왕년에 청수(靑水)라는 예명이 말해주듯 은어 떼가 줄지어 검푸른 등을 뽐내던 기량과 1급수의 영화를 세월의 강물에 흘려보내고 지금은 겨우 숨을 헐떡이며 수척해진 형상으로 쓸쓸히 잠겨있다.

그나마 갈대숲 둥지에서 솔방울 물새들이 쫑알쫑알 주둥이를 비틀어 물결소리 닮은 음악이 흐르고 먼 산 바라보고 있는 황새 한 마리 의연한 기품이 노숙한 선비의 풍모처럼 의젓하고 여유롭다. 간혹 침입자의 인기척에 민감한 꿩, 산비둘기 등 날짐승들이 몇 미터 잡힐 듯 한 발치에서 푸드득 비상하는 순간, 그 활달한 날개의 근육에서 움츠러든 내 가슴이 펴지는 듯 자연과의 서정을 교감케 한다.

산책자는 나 홀로. 곡식을 거두고 난 후 들판의 풍경 또한 한가롭고 적요하다. 이른 봄부터 여름 내내 매질당하며 고통 받던 시절의 강인함은 볼 수 없고 제 몸을 혹사당하고 이제 거친 호흡을 낮춘 저 농토. 지쳐 있는 듯...

마치 고흐 닮은 갈색화가들의 경건한 예술품인양 앙상한 겨울의 뼈마디를 인내하며 예술의 세계로 경계가 넓혀지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쯤일까, 길목 전방 먼 곳에 쪼그린 자세로 움직이는 사람이 보인다. 발길을 재촉했더니 팔순 중반의 노인장께서 호미로 풀뿌리를 캐내고 있는 참이었다. 몇 발자국 지나치려다 돌연, 아서라 고향 어르신께 한마디 인사라도 해야겠구나 하는 도덕심이 미동하여 되돌아선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를 건네고는 무슨 뿌리를 캐시는지 물었더니 돼지감자란다. 벌써 비료포대 반쯤 채워놓고선 자꾸 고개를 들어 서산을 쳐다보는 심중에는 정녕 오늘은 이정도로 마감해야겠다는 서운함이 묻어난다.

이제 그쪽에서 내게 묻는다. “자네 당뇨 있는가? 이 뿌리가 당뇨와 골다공증 치료에 최고의 약일세”, “허면 강둑에다 재배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야 자생한 거지 저기 좀 보게나. 길 끝까지 듬성듬성 생겨났다니까.” 사정을 듣고 보니 지천에 자생한 주인 없는 약초라서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 다’는 취지의 당당한 주장이었다. 견물생심이랄까 갑자기 나도 몇 뿌리 캐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여기엔 적당한 구실이 필요할 터, 때마침 고관절과 골다공증 병환으로 바깥출입을 못하시고 요양보호사 가료중인 구순 노모님께 특효약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노인장께 자세한 사연을 설명들이고 저도 필요하니 “쬐깐 캐서 쓸라요” 하고 응석을 부렸더니 흔쾌히 승낙하신다. “그라소! 조금 남겨 둘 테니까 캐 가소” 살붙여 작업요령까지 소상히 알려주신다. 나의 생뚱맞은 요구를 거절할 줄로 미리 짐작했거늘 결과는 흔히 욕심 많고 고집불통이라던 시골영감의 선입견을 일거에 나무라며 옹졸하고 초라한 건 내 쪽이 되고 만다.

나의 저녁밥상은 어머님과 겸상이다. 모자는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70대와 90대의 간격을 좁히는데 익숙해졌다.

도시가정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 병상에 계시는 어머님 돌보며 효도 칭찬까지 쏠쏠한 일상이 당초 우려했던 것 보다 귀찮거나 고되지 만은 않다.

진즉 예견이나 한 듯 주민등록 주소지만큼은 단 한 번도 퇴거하지 않고 코흘리개 정든 옛집을 고수하며 고향 분들과 교우하고 있는 의리의 돌쇠라면 차라리 나는 떳떳하고 행복하다. 이왕 돌아올 바엔 무거운 짐들을 번거롭게 옮길 필요가 없겠다는 선견지명이었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어머님께 소상히 아뢰었다. 석양 무렵 들녘 산책길에 어느 분을 만나서 나누었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단번에 돼지감자 재배하는 이웃들이 많다며 아예 약효능과 시장성까지 달달 훤히 꿰뚫고 계신다. 이런 방면의 실력에 있어 언제나 많이 배운 자식들이 부모에게 밀렸었다.

돼지감자 식탁에 호감을 갖고 계신 어머님의 표정을 읽고 나서 다음날 결행할 요량으로 호미와 바구니 등 도구들을 챙겨놓고 취침에 들어갔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자꾸만 못생긴 돼지감자 생김새와 그걸 약이라고 편하게 잡수시는 어머님 모습이 아른거리며 잠을 설치게 했다.

그렇게 돼지감자 몇 사발을 내손으로 수확하여 효도의 탑 하나를 더 쌓더니만, 경사 심마니들의 낙이라도 체험해 본 듯 마음의 주름살까지 연잎처럼 활짝 펴져 뿌듯하다.

“언제든 가리/마지막엔 돌아가리/목화 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조밥이 맛있는 내 본향으로/ 언제든 가리/나중엔 고향가 죽으리/메밀꽃이 하얗게 피는 곳/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노천명의 시 “고향”의 한 구절이 떠오르며 낙향한 날 위안케 한다. 고향이라는 어휘는 우리를 항상 그리움과 추억 속으로 몰고 간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직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고향이란 근원조차도 그 바탕은 자연이 아니던가. 이렇게 자연의 축복 속에 오늘 나의 고향 길은 모처럼 삶에 대한 새로운 매력과 우아함이 깃들고 진정 기쁨에 가까운 느낌으로 가득 차오르는 듯 했다. 대지는 우리에게 걸음을 주었고, 호스는 뛰어들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자연에 대한 경이는 우리에게 인간의 정신을 주었다. 그것을 고마워하고 자연의 엄격한 교훈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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