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성씨(1)/인천이씨 -인천이씨의 성세와 장흥파 인물들(하)
■장흥의 성씨(1)/인천이씨 -인천이씨의 성세와 장흥파 인물들(하)
  • 김선욱
  • 승인 2020.12.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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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에 특기된 인천이씨들-문집 19권, 유실 문집도 22권
‘장흥 의향’ 빛낸 이방언 이사경 이인환 이소사 등 배출 돼
현대 이르러 이영권 국회의원, 이명흠·이승옥·이종옥 군수도

김선욱/시인. 본지 편집인

<지난호에서 계속>

수정재(水晶齋)- 20세 承義副尉司直公 우(遇)의 제각.(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751번지 소재)
영석재(永錫齋)-24세 淸江 승(昇)의 제각(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885번지 소재)

충렬(忠烈)과 절의(節義)에 빛나는 인천이씨들

이송(李松)은 공도공(恭度公, 李文和)의 증손으로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등과(登科), 벼슬을 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성주로 낙향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인천이씨 장흥종중 진사공(進士公)파 문중을 번창시켰으며 선비의 모범을 보여 경북 김천 영정재(永正齋)에 配享(배향) 되었다.

이자운(李自雲,1588~1669)은 자는 장오(章五), 공도공의 10세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를 지냈으며, 아들들이 효언(孝彦), 문언(文彦), 여언(汝彦) 문중을 이루어 경북 고령 금충재(琴忠齋)에 배향(配享)되었다.

이맹(李孟,?~ 1593)은 자는 호여(浩汝), 호는 수의재(守義齋)이다. 공도공의 12세이며 뛰어난 무예와 방략(方略)으로 국난을 타개하였고 임진왜란 때 평양성 수문장으로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의 충렬(忠烈)과 절의(節義)의 장수로 당곡사(唐谷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이종인(李種仁,1565~1593)은 자는 이립(以立), 호는 선무(宣武), 공도공의 12세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 의병장 휘하로 활동하다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 선무공신(宣武功臣)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을 받았고 당곡사에 배향되었다.

이봉명(李奉明)은 자는 충보(忠輔), 호는 충은(忠隱), 공도공의 12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전력부위(展歷副尉)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경북 성주 금산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세백(李世白)은 자는 여옥(如玉), 공도공(文和)의 13세로 부는 이봉명(李奉明)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근대 인물-문인 이희석· 화가 이청흠

이희석(李僖錫, 1804~1889)의, 자는 효일, 호는 남파(南坡)이다. 용산면 접정리에서 출생, 진사시에 합격했다. 남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학자 기정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노사는 그를 벗으로 대하고 이희석은 노서를 스승으로 섬겼다. 남파는 조선 후기 노사학파의 형성과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만년에 기정진의 이기철학과 위정척사사상을 호남의 남쪽에 전파한 조선 말의 석학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남파를 통해서 장흥의 학자들이 대거 노사학파에 입문, 장흥의 학풍이 활기를 띄고 한말 의병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조선 말 의병장으로 노사의 손孫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글이 장흥 집안 여러 문집의 서·발문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방언 부친 이중길(李重吉,1797∼1889)도 남파를 통해 노사학파에 입문하였다. 남파는 <남파집>을 남겼다(이병혁 박사가 번역하고 논문을 써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근대 인물로 화가였던 송파(松坡) 이청흠(李淸欽,1883~1937, 장평 우산)이 있었다. 송파는 공도공 23세로 통훈대부, 후릉(厚陵) 참봉을 지냈고 <송파문집(松坡文集)> 2권을 남겼다. 그는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이름이 났는데 일본전국서도작진회전 특선에 입상했으며 일본에서 20여회 미술전시회를 가졌다. 그의 그림은 ‘김달진 미술연구소’에 소장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조선조 장흥의 인천이씨 집안에서 배출한 많은 인물 중 과시에 입격한 자를 보면, 이승(李昇), 이송(李松), 이원무(李元茂), 이여충(李汝忠), 이시중(李時中), 이혼(李渾), 이민기(李敏琦)·이민장(李敏璋) 형제, 이복연(李復淵), 이희석 등 10여 명이 생원·진사시 합격자였고, 이종인·이종립(李種立)·이식인(李植仁)·이관(李灌)·이채근(李采根) 등이 무과에 올랐다.

또 근세에 이르러선 이엄(李淹)·이창명(李昌命)·이창구(李昌衢)·이희증(李希曾)·이종욱(李宗旭) 등이 문행·학행·효행으로 뛰어나 『장흥군지(郡誌)』 등에 등재되는 등 지역사회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낸 인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인천이씨 장흥파 한학자 이병혁 박사 제공)

문文에 특기된 인천이씨-34인 문집 남겨

인천이씨 장흥파에서는 특히 다수의 문인이 배출되었는데, 문인으로 명성을 얻는 청강, 지지재, 만수재, 우곡 등의 시문집을 제외하고 여러 분들이 31인 문집을 남겨 총 34인이 문집을 문집을 남겼다. 또 세보 등에 문집을 남긴 것으로 확인됐으나, 전해지지 않고 유실된 분도 45명에 이른다. 문집을 남긴 분과 문집을 남겼지만 유실된 이들은 다음과 같다.

▣문집을 남긴 이 31명

▶石室遺稿(李泰光,1708~1763, 만년) ▶竹松堂集(李憲徵,1723~1795,장항) ▶東谷遺稿(李復淵,1768~1836) ▶隱窩集(李相行,1789~1880,만년) ▶南坡先生集(李僖錫,1804~1889,접정) ▶篤友齋遺稿(李權銓,1805~1887,금장) ▶烏谷集(李采根,1821~1887,봉동) ▶李氏三世稿(李益運1787~1861,李重暹1817~1884/李光錫1846~1903,금곡) ▶묵헌黙軒遺稿(李守根,1857~1912,장항) ▶金溪集(李洙夏,1861~1931,금장) ▶樂吾齋遺稿(李正遠,1871~1957,접정) ▶華山遺稿(李敎錫,1874~1945,금곡) ▶誠菴遺稿(李洙赫,1878~1952,월평) ▶小川遺稿(李寅根,1883~1949,금장) ▶閑放集(自笑軒 李三徵, 거개) ▶博覽集(李光章, 거개) ▶榧亭散稿(榧亭 李洙吉, 어서) ▶松坡文集二권(李淸欽 1882~1937, 우산) ▶止軒遺稿(李鎭國,1890~1980,만수) ▶和軒遺稿(李大基,1905~1993,어서) ▶閑放集(李三徵,1789~1804,장항) ▶梧齋集(李仁壽, 1648~1684,장항) ▶白軒遺稿 李柱漢(1670~1733,장항) ▶梧憲遺稿 李重晟(1775~1843,어서), ▶餘谷遺稿(李重暹,1817~1884,금곡) ▶敬齋遺稿(李光錫,1846~1909,금곡) ▶柏軒遺稿(李暢浩,1872~1914,금곡) ▶東皐遺稿(李鍾埴,1911~1985,금곡) ▶湖坡遺稿(李洙奭,1853~ 1907,용반)▶新菴集(李行根,1879~1940,용반) ▶菊軒遺稿(李炯遠, 1910~ 1978, 용반),

▣문집을 남겼지만 유실된 이씨 이 45명

▶心松 李在準(축내) ▶夢庵 李哲徵(축내) ▶棹山 李弼鉉(축내) ▶松齋 李書徵(거개) ▶閑塘 李英錫(거개) ▶松齋 李仁壽(장항) ▶隱溪 李天徵(거개)▶白軒 李柱漢(장항) ▶嶝巖 李仁龍(장항) ▶金坡 李洙祚(금장) ▶默菴 李擎植(용반) ▶新菴 李行根(만년) ▶小溪 李正權(금장) ▶則性齋 李重漢(어서) ▶後蓮 李白遠(금곡) ▶守拙堂 李復顯(금곡) ▶金華 李誠浩(금곡) ▶松溪 李固遠(어서) ▶白坡 李南浩(금곡) ▶東皐 李東埴(금곡) ▶梧憲 李重晟(어서) ▶柏軒 李暢浩(금곡) ▶心松集(李在準,1835~1918,석정) ▶金坡集(李洙祚,1854~1907,금장) ▶默菴集(李擎植, 1812~1888,용반) ▶菊史遺稿(李舜根,1865~1936,용반) ▶小溪集(李正權,1882~1848, 금장) ▶ 隱溪集(李天徵,1792~1862,거개) ▶松齋集(李書徵,1704~1764,장항) ▶松溪集(李固遠,1889~ 1929,묵촌) ▶雲庵集(李珣遠,1847~1911,묵촌) ▶守拙堂集(李復顯,1680~1731,금곡) ▶耻軒集(李弼鉉,1845~1914,축내) ▶博覽集(李光章,1735~1806,축내) ▶則性齋集(李重漢,1790~1817, 어서) ▶榧亭散稿(榧亭 李洙吉(어서) ▶金華集 李誠浩(1873~1929,금곡) ▶屈菴集(李章漢,1714~1798,용반) ▶後蓮遺稿 李白遠(1891~1957,금곡) ▶白坡遺稿(李南浩(1866~1914,금곡) ▶直齋遺稿 李敎根(1850~1825,장항) ▶喪祭禮增補集 5권(李三徵,1789~1804,장항) ▶四禮節要(李三徵,1789~1804,장항) ▶嶝巖 李仁龍(1658~1723,장항) ▶夢菴 李哲徵(1797~1875,거개)

5. ‘의향 장흥’ 증명한 장흥동학의 지도자들

장흥동학의 최고 지도자 이방언

이방언 장군(

이방언(李芳彦, 1838∼1895)의 자는 자방(子邦), 호는 방언(芳彦)이다. 본명은 이민석(李民錫), 출신지는 용산면 묵촌리다. 본관은 인천이다.

부친은 이중길(李重吉,1797∼1889)이다. 부친은 장흥향교 용산면 향약 청원계의 도정으로 당시 묵촌 일대에서 상당한 학문을 닦았던 인물이었다고 한다(증손 이종찬 증언). 또 마을 뒤로 필봉(筆鋒)이 자리해 있는 묵촌은 대대로 학문을 하는 선비가 끊이지 않는 마을로 알려져 왔다(장흥군 <마을유래지>). 또 당시 남상면에서 이중길 이방언의 인천이씨 가문은 지역의 향약계(鄕約契)를 주도하며 세거해 오던, 장흥에서는 대표적인 유력 가문이었다.

이방언 대접주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지역을 대표하는 농민군 지도자였다.

이방언은 동학 입도 후 장흥 동학도와 농민들을 규합해 전봉준의 주력부대로 활동했다.

‘장태’를 사용하여 ‘황룡강 전투’를 지휘,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당시 농민군의 방어무기는 대로 엮어 만든 닭장태였다. 총을 맞으면 그 총알이 매끄러운 대의 껍질을 방탄으로 활용해 만든 장태 옆으로 튕겨가는 것이었다. 농민군들은 이 장태를 앞세우고 굴려가면서 관군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 총으로 쏘고 대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쳐 죽이며 물밀듯이 공격하여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닭장태로 방어무기를 고안한 이가 장흥 대접주 이방언이었다. 방언은 대로 용수처럼 얽은 것을 변형하여 양총의 총알을 피하는 방어무기로 고안해 만들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방언은 ‘장태장군’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이 외에도 별호가 둘이 더 있었는데, 하나는 ‘남도장군’, 또 하나는 ‘관산 이장군’이었다. 이때 농민군 장수들 중 이렇게 별호를 불린 사람은 ‘녹두장군’으로 불린 전봉준 외에는 이방언 장군뿐이었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 12월 우금치 전투 이후 최대 규모인 장흥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후 은신해 있다가 체포되었으며, 다음 해 서울로 이송된 후 무죄가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체포되어 외아들 이성호와 함께 참형을 당했다.

이방언은 부유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장흥지방에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생계를 잇기 조차 힘들었는데, 관아에서 진결세(陳結稅)를 독촉하자, 전주 감영에까지 찾아가 전라도 감사에게 남면 일대에 대한 감세조치를 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 농민들이 진결세를 감면받을 수 있게 하였던, 당대 남상면 일대에서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이방언은 유학자 고산(鼓山) 임헌회(林憲晦, 1811∼1876 :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 낙론洛論의 대가)의 제자로,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 재야 학자로 서당을 열러 후진교육에 일생을 바친 학자)과 동문수학하였다. 그러나 1890년 초, 주자학의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천도에 합치하는 수행을 통해 새 세상을 이룩하려는 동학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동학에 입교, 장흥 어산접 접주로서 동학농민군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방언·이인환과 3대 접주였던 이사경

이사경대접주
이사경대접주

이사경(李仕京, 1860~1895)은 자는 사경(仕京), 본명은 관근(寬根)이고 본관은 인천이다.

이사경은 장흥동학혁명 때 ‘부산(夫山) 대접주’로 활약하며 이방언, 이인환 접주와 함께 ‘장흥의 3대 접주’로 불리어졌다.

이사경 부친 이호인(浩仁)도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하여 동생 호의, 호신까지 입도시켜 활동하였으며, 아들 이사경에게 접주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호인은 실질적으로 이 지역 동학교도들을 관리한 선두 주자로서, 생을 마치면서 이사경에게 접주의 지위를 대물림했는데, 결국 동학운동은 부자(父子)가 대물림하며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사경 접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장흥 부산면 용반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894년 6월경 용반마을 근처에 있는 자라번지라는 곳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이 집강소는 장흥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으로, <일사>(장흥 유생 박기현 저) 에 따르면 “장흥군 부산면 자라번지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농민군이 죄 있는 사람을 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으며,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사경은 용반리 농민군을 이끌고 12월 4일 벽사전투, 12월 5일 장녕성 전투, 12월 7일 강진전투, 12월 10일 강진병영전투 등에 참여하였으며 12월 15일 장흥 석대 전투, 12월 17일 옥산전투 등에 참여하였고, 이후 용반리로 피신하여 생가 근처의 기역산에 은신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몰래 돌아가며 이사경에게 음식을 주면서 보호하였으나 기역산 너머 유치대리에 사는 모씨의 밀고로 1895년 1월 23일 체포되어 25일 벽사역에서 처형되며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사경 접주의 증손자 이정태 씨는 “증조부 이사경 접주는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였으며 인품 또한 넉넉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접주로 추대하였다고 어릴 적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용반리는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활동의 거점으로서 인천이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있어 마을사람 대부분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마을 전체가 참여하자 이에 대한 토벌도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체포된 용반리 동학농민군들은 장흥 원도리 벽사역에서 뒤로 손을 묶인 뒤 쌓아올린 짚단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지난 2014년 1월 24일 오후 2시,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서 합동제례가 있었다. 합동제례를 지내는 이유는 이 마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1895년 1월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제례에 위패가 모셔진 동학농민군은 장흥 용반 접주 이사경을 비롯하여 이호인, 백인명, 최진문, 최승문, 이원찬, 최창업, 이원종, 이호의, 이세근, 이회근, 이호신, 이순근, 이수공, 이몽근 등 15명에 달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날 무렵 농민군 토벌대는 이 마을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당시 300여 가구가 있었는데, 이중 3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이인환·여성 지도자 이소사도 인천이씨 추측

이인환 대접주
이인환 대접주

한편, 동학혁명 때 대흥면 대접주로 이방언 이사경과 함께 ‘장흥 동학의 3대접주’로 알려진 이인환도 인천이씨로 추측된다. (이인환을 인천이씨仁川李氏로 보는 것에 대해 장흥동학 연구자들도 이견은 없다). 그리고 여성 동학군 지도자 이소사(李召史) 여사도 인천이씨로 간주한다면, 장흥동학의 큰 물줄기는 이방언‧이사경‧이인환·이소사 등이 중심이 된 인천이씨들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흥동학군이 장흥‧강진‧흥양 등에서 승리한 일련의 전투는 모두 이인환의 탁월한 야전능력과 11월 25일 대흥면에서 기포한 후 회령진성에 무혈입성하여 획득한 다수의 무기와 식량 등이 큰 밑거름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무기와 화약을 잘 다루었고 병법兵法이 탁월했다고 한다. 이런 구전을 토대로 이의환 대접주가 회진 만호진萬戶鎭의 군관 출신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또 생약초 등의 약재상을 하면서 했다는 구전을 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동학을 전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다. 천교도 자료(<갑오동학혁명혈사)에 의하면, 이인환대접주는 나주 남평현에서 장흥으로 이거해 살았던 것으로만 기록이 보일 뿐, 더 이상의 신상 내력은 천도교‧인천이씨 족보 등에 보이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인환 접주가 인연을 맺었거나 연결되는 동학교도 대부분이 인천이씨들이어서, 그 역시 인천이씨로 알려지고 있다-장흥동학 전문가 위의환 씨 증언).

장흥 동학의 여성 지도자로 알려진 이소사도 인천이씨로 추측되고 있다.

"(장흥)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나이는 꽃다운 스물두 살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이고 이름은 이소사라고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는 말 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를 주었다고 하며, 동학도 모두가 존경하는 신녀가 되었다."- 1895년 3월 5일자 일본의 <고쿠민(國民) 신문>에서.

이소사 여사
이소사 여사

그녀는 말을 타고 동학군을 지휘한 여성 동학군 지도자며, 모든 동학군이 존경하는 신녀였고, 동학군의 사기를 올려주는 핵심인물이었다. 장흥부사 박헌양의 목을 친 자가 이소사라는 설도 있다. 이소사 여사에 대해, 송기숙(소설가)은 ‘역사와 현장’에서 이방언 장군의 집안 여자가 아닐까 싶으나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적기도 했다.

6. 인천이씨 장흥파 현대 인물들

인천이씨 장흥파는 현대에 이르러 장흥지역에서 정치와 예술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기는, 장흥에서는 내노라, 하는 거목들을 배출한다.

이영권 국회의원, 이종옥 여천군수, 이명흠 장흥군수, 이승옥강진군수, 문화예술인으로 이승우 소설가, 이봉준‧이문갑 서예가, 이한성·이성관·이대흠‧이호연 시인, 이창주 화가, 이병혁 문학박사(한문학자), 이세규 한시인 등이 대표적이다. 인천이씨 장흥 현대 주요 인물군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유림계=이진원(제3대 장흥향교 전교, 월평), 이수평(제6대 장흥향교 전교, 월평), 이병교(제10대 장흥향교 전교, 금장), 이경근(제16대 장흥향교 전교, 월평), 이남기(제19대 장흥향교 전교, 두룡), 이충근(제23대 장흥향교 전교, 월평), 이화근(제30대 장흥향교 전교, 축내), 이영숙(면 유도회장, 전 장흥종회장, 접정), 이명규(전 장흥군유도회장, 거개), 이홍규(전 장흥군유도회장, 삼정), 이종영(전 장흥유도회장, 관산 외동), 이태균(제35대 장흥향교 전교, 현 장흥종회장, 금장), 이종찬(장흥동학유족회장, 접정)

■정치인=이영권(국회의원 3선, 어서), 이명흠(장흥군수, 2선, 두룡), 이승옥(강진군수, 거개), 이충식(전남도의회 의원, 어서), 이종옥(여천군수, 관선-, 삼정), 이금찬(장흥군의회 의원, 접정), 이병량(장흥군의회 의원, 축내), 이영철(서울 강서구의회 의장, 관산 외동)

■학계·전문인=이정빈(서울대 의학박사, 용반), 이병한(과기대 공학박사, 접정), 이영찬(인천대 경제학박사, 접정), 이석호(전자공학, 조선대 교수, 축내), 이기명(물리학박사 서울대 교수, 용반), 이기암(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 용반), 이준신(성균관대 교수, 거개), 이창길(행정학, 세종대 교수, 금장), 이종운(경영학, 감사원 교수, 삼정), 이상규(국사편찬위원회 교수, 거개), 이병혁(문학박사, 한문학자, 접정), 이형진(의학박사, 병원장, 신동), 이헌기(세무사, 금장), 이재규(세무사, 삼정),이종대(세무사, 월암), 이석현(세무사, 접정), 이금주(세무사, 거개), 이종락(법무사, 용반), 이명근(법무사, 건산), 이해승(화학박사), 이관일(물리학, 미국대학 교수, 금장), 이흥태(경제학 캐나다 교수, 용반)

■교육계=이상규(초등교장, 용반), 이성관(중등교장-시인, 삼정), 이병률(초등교장, 거개), 이학균(초등교장, 교촌), 이종선(초등교장, 접정), 이성진(초등교장, 접정), 이종호(초등교장, 접정), 이영성(초등교장, 접정), 이길배(중등교장, 만수), 이동균(고교교장, 금장), 이은규(중등교장, 금장), 이종반(초등교장, 용반), 이응기(초등교장, 용반), 이양기(초등교장, 용반), 이영송(옥당, 중등교장), 이정(담양교육장, 두룡)

■공직(관료)=이샘(행안부 서기관, 접정), 이형훈(보건복지부 국장, 우산), 이승근(법무부 이사관, 거개), 이길온(국민건강보험공단 호남·제주본부장, 봉동), 이관식(국세청 부이사관, 월림), 이규영(광주광역사 서기관, 이서), 이봉렬(부천세무서장, 만수), 이남주(광주법원 서기관, 완도군), 이재주(서울법원 이사관, 접정), 이영민(장흥군 농촌지도소장, 계산), 이문기(관세사, 금장), 이영석(국립공원관리공단 감사, 금장), 이흥민(고양시청 국장, 만년), 이정(한국은행 본부장, 월평), 이판식(국세청 과장, 접정), 이정재(전남도교육청 과장, 삼정), 이천기(전남도청 과장, 척동), 이용범(국세청 과장, 장항), 이영휘(보사부 국장, 월평), 이치배(육군 중령, 만수), 이종남(육군 중령, 용반), 이은주(문화관광체육부 과장, 묵촌), 이종남(육군 중령, 용반), 이승규(공군 중령, 용반), 이종관(서울시청, 과장), 이정윤(공정거래위원회 과장), 이정규(육군 중령, 용반), 이기준(건강보험공단 지역본부장, 용반), 이상원(근로복지공사 부장, 용반), 이경영(공군 준장, 대구 성당)

■법조인=이진성(헌법재판소장, 거개), 이승련(부장판사, 어서), 이상현(부장판사, 어서)

이종기(부장판사, 교촌), 이선기(검사, 만년), 이형권(변호사, 만년), 이준희(검사, 어서), 이인걸(판사, 선진), 이태선(변호사, 용반), 이재주(법원이사관, 접정)

■단체장=이진화(장동농협장, 삼정), 이남석(회천 농협조합장, 명교), 이학준(용두농협장, 만년)

이덕식(장흥군수협장, 신동), 이영철(관산농협장-군의원, 신동), 이종문(용산농협장, 금곡)

■기업인=이득배(흥우산업 회장, 지정), 이상균(울산 현대 중공업 사장, 금장), 이학태(해태식품 대표, 접정), 이임택(한신에너지 회장, 어서), 이우열(기업은행 본부장, 삼정), 이장흠(동양인더스트리트 대표, 와룡), 이석태(우리은행 상무, 삼정), 이원(세종증권 감사, 월평), 이길개(은행 지점장, 금장), 이광원(조흥은행 지점장, 삼정), 이종수(한국화약 이사, 용반), 이성재(수협조합장, 성자)

■문화·예술인=이창주(동양화가 조선대 미대학장, 우산), 이봉준(서예가, 만수), 이문갑(서예가, 묵촌), 이종민(서예가, 삼정), 이성관(아동문학가, 삼정), 이한성(시조시인, 접정), 이승우(소설가, 신동), 이대흠(시인, 만수), 이세규(시인, 漢詩人, 만년), 이호연(시인 문학박사, 대평), 이종헌(시인, 배산)

■의료계=이병국(전남대 의학박사, 접정), 이영원(병원원장, 용반), 이정빈(서울대 의대 교수, 용반), 이태기(치과 원장, 월평), 이관기(의사, 월평), 이나래(의사, 월평), 이영길(의사, 월평), 이평택(의사, 접정)

★참고자료 : 인천이씨 대종회 홈페이지(http://www.iclee.or.kr), <역주 지지재유고(이병혁 국역)>, <만수재유고(이봉준 국역>, <역주 청강 유고(이병혁 국역)>, <장흥동학 농민혁명사(송기숙 외>, <장흥문집 해제>, <인천이씨대동보>, 국립중앙도서관 DB, 기타 <장흥군지>외 각 <…읍면지>, ‘장흥파 문안’ ★자문 : 이봉준(장흥, 한학자), 이세규 시인(서울, 한학자), 이병혁(광주, 한학자), 이태균(인천이씨 장흥종회장), 이영록(장흥종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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