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다향茶香을 우려낸 ‘상선약수’ 마을에 대한 문화사文化史 고찰(상)
■특별기고 -다향茶香을 우려낸 ‘상선약수’ 마을에 대한 문화사文化史 고찰(상)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12.1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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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지/시인

고산지/시인. 장흥읍 평화리 출신

제1부 다향(茶鄕) 장흥

1) 다소(茶所)

신증동국여지승람(新증東國輿地勝覽) 경기도 여주목 고적(古蹟)조에 의하면 신라(新羅)에서는 주(州) 군(郡)을 세울 때 그 전정호구(田丁戶口)가 현(縣)이 되지못한 곳은 향(鄕)이나 부곡(部曲)을 두어 소재지의 읍(邑)에 속하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현(縣)이나 군(郡)이 못되는 작은 부락에는 향(鄕)이나 부곡(部曲)을 두어 관리 하였는데, 특히 특산물이 산출되는 지역에는 소(所)를 두어 관리 하였다. 소(所)제도는 염소(鹽所), 자기소(瓷器所)와 같이 서민집단이 거주하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지방제도이다. 고려시대는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탄소(炭所), 염소(鹽所), 묵소(墨所), 곽소(藿所), 자기소(瓷器所), 어량소(魚梁所.) 강소(薑所). 등으로 소(所)를 구별하여서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급받았다. 이중 다소(茶所)는 차(茶)를 만들어서 나라에 바치는 지방을 말한다. 이러한 다소(茶所)는 차재배가 가능한 지역에는 모두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기록이 전하는 곳은 몇 곳 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 卷150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 13개 소, 무장현(茂長縣)에 2개 소 동복현(同福縣)에 1개 소등 모두 16개소에 다소가 있었다고 전하며, 그 외 신증동국여지승람(新증東國輿地勝覽) 卷36은 남평현(南平縣)에 1개 소가 있고,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卷13에 1개 소가 있다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世宗實錄地理志)는 모두 36개 군(郡) 현(縣)의 토공(土貢)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무장현(茂長縣)과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그리고 동복현(同福縣)에만 다소(茶所)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장흥도호부와 13개소의 다소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는 13개소의 다소(茶所)가 있었는데, 요량(良饒), 수태(守太), 칠백유(七百乳), 정산(井山), 가을평(加乙坪), 운고(雲高), 정화(丁火), 창거(昌居), 향여(香餘), 웅점(熊岾), 가좌(加佐), 거개(居開). 안칙곡(安則谷)을 말한다.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는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으로 본래 백제의 오차현(吳次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오아현(烏兒현)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안정현(安定현)으로 고쳐 영암(靈巖) 임내(任內)에 속하였다. 고려 17대왕 인종(仁宗) 때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하였다. 고려 24대왕 원종(元宗) 6년(1265)에 회주목(懷州牧)으로 또 다시 승격이 되었다가, 고려 26대 충선왕 2년(1310)에 강등하여 장흥부가 되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문에 거주민은 전부 북쪽 다른 지방으로 옮기었다가 이조 태조 1년(1392년)에 수령현(遂寧縣)의 중녕산(中寧山)에 성을 쌓고 치소(治所)로 삼았다.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고 이듬해 태종 14년(1414)에 성(城)이 좁다고 하여 수령현(遂寧縣)의 옛터로 치소(治所)를 옮겨 성(城)을 쌓았다. 세조 때 비로소 진(鎭)을 두었고, 고종 32년(1895)에 군(郡)이 되고 1914년에 약간의 변천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남해안을 끼고 있는 장흥(長興)은 예로부터 해상항로가 발달한 곳이다.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문물이 발달하여 해상을 통한 중국이나 일본과도 문물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 졌던 곳으로 오래된 사찰(천관사, 보림사)과 성곽등 유물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보림사와 천관사 그리고 수인산성(修仁山城), 중령산성(中寧山城), 천관산성(天冠山城), 회주고성(懷州古城)과 지금까지 확인된 지석묘(支石墓)의 숫자만도 무려 700여기에 달한다. 그 외에 선사 유적들이 도처에 있어 석기시대부터 장흥(長興)은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처에 야생 차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차 재배의 적지로서 일찍부터 차 산업이 정착한 곳이다. 6.25까지만 해도 장흥에서는 돈차(錢茶)를 만들어 팔았다.

3) 상선약수마을(평화마을)은 정화다소(丁火茶所)였다

평화약수터-
평화약수터- 평화마을에는 8개의 약수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3개 정도만 사용되고
있다. 억불산 오르는 길목의 ‘억불 약수터’, 무계고택 앞 방죽 위쪽의 ‘동네 우물’,
평화리 좌측 저수지 위쪽으로 억불산 주차장 오르는 길목의 ‘평화 약수터’가
그것들이다. 평화 약수터는 장흥 읍내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공용 약수이다.

(1) 정화소(丁火所)의 정화(丁火)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현재까지 장흥도호부의 13개 다소(茶所) 중 정확한 지명이 알려진 곳은 ‘거개다소’ 한 곳 뿐이다. 상선약수마을을 소재로 한 글을 쓰기 위하여 필자는 평화리의 연혁을 추적하였다. 억불산(億佛山) 입구에 위치한 평화마을은 고려시대 억불산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면서 이를 관리하고 지키던 병정들이 거주하면서 성촌(成村)된 마을로 원래는 ‘정화소(丁火所)‘였다. 고려 말 신원수(申元壽)가 왜구 토벌 차 내려와 공을 세우면서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화속지(化蜀地)를 그 후손들이 입주하여 살면서 평산신씨(平山申氏)의 화속지(化蜀地)에서 이름을 따와 평산의 ‘평(平)’과 화속지의 ‘화(化)’라는 평화마을이라 불렀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5 대손 고응수(高應壽)가 창평에서 장흥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손자 고석겸(高碩嗛)이 영조 때의 국지사 이계현(李啓鉉)의 권유로 1770년 다선일여(茶禪一如)를 구현했던 정화사(淨化寺)라는 암자를 구입하여 정화사(淨化舍)를 신축하여 이거한 후 평화마을은 장흥고씨(長興高氏)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1941년 평화리(平化里)로 했다가 내평(內平)과 외평(外平)으로 구분하여 구.내평(內平)을 평화1구라 하였는데 현제는 상선약수(上善藥水)마을로 불리고 있다.

(2)내평과 외평 사이에 차뜽(茶嶝), 다산등(茶山嶝)이 있다

차뜽(茶嶝)이라 일컫는 평화촌(平化村) 다산등(茶山嶝)에는 장흥위씨(長興魏氏) 오현조(五顯祖)의 위패를 모신 하산사(霞山祠)가 자리하고 있다. 장흥위씨(長興魏氏)의 본래 세거지는 장흥읍 동동리 장원봉(壯元峯)자락의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치소(治所)자리였다. 고려 말 판사공(判事公) 위충(魏种)은 이성계 세력을 뒤엎으려다 적발돼 고초를 당했다. 중령산(中寧山) 인근에 있던 장흥부(長興府)가 도호부(都護府)로 1414년에 승격되면서 치소(治所)가 비좁다는 이유로 장흥위씨(長興魏氏)는 약 200여 년간 거주했던 장원봉(壯元峯) 수령현(遂寧縣)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 수난시대의 주인공은 14세 판사공(判事公)과 아들 15세 통선랑공(通善郞公), 16세 자온 자량(自良), 자공, 자검 등 3대라 할 수 있다. 통선랑공(通善郞公)은 우여곡절 끝에 장원봉(壯元峯)에서 평화촌 다산등(茶山嶝)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그 시기는 아무래도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가 수령현(遂寧縣) 치소(治所)로 이전된 1414년(태종 14년 甲午) 전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장흥위씨(長興魏氏)의 평화촌(平化村)시대가 시작되었다. 비록 도호부의 치소(治所) 소재지를 피해 왔지만 지방관료들의 감시와 핍박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판사공(判事公)의 현손인 습독공(習讀公) 유형(由亨)은 조선이 건국한지 한 세기에 가깝거나 넘을 때의 인물이었으나 관(官)을 의식하여 다산등(茶山嶝)에 산정(山亭)을 짓고 주변에 동백(冬栢)과 대(竹)를 심어 정자(亭子)를 가리었다. 건너편에 있는 치소(治所)에서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묘소 좌향(坐向)은 유향(酉向)으로 강진 화방산(華坊山)이 정봉이나 제대로 분간하기 어렵다. 묘소의 방향도 식별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지방관료들의 핍박이 심해서 자기방어를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습독공(習讀公)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과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과 같은 인물들과 산정제(山亭齋)에서 차(茶)를 마시고 수작(酬酌)하였다. 산정제(山亭齋)의 산정(山亭)은 다산제(茶山齊)로 바뀌었고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지고 없다. 1936년(丙子)에 백산제(栢山齋)를 짓기 전에 허술한 제각인 초가지붕의 다산제(茶山齊)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루속히 다산제와 산정천이 복원되어 찻 속에 담긴 습독공과 추강의 흔적이 우러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3)무계고택(霧溪古宅)은 정화사(淨化寺)라는 암자가 있었던 곳이다.

절터위에 세운 무계고택은 1988년 3월 16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정화사(淨化寺)를 상징하는 듯 정화사(淨化舍)라는 현판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불교에서는 차 마시는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으로 인식한다.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차를 마시는 일련의 수행을 통하여 다선일여의 경지를 이루고자하였던 정화사(淨化寺)가 지금은 정화사(淨化舍)라는 현판이 있는 무계고택(霧溪古宅=고영완고택)이다.

(4)다소(茶所)의 지명(地名)이 살아있는 두 곳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Pyeonghwa-ri, 平化里] -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억불산 앞에 자리하며 탐진강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정화, 내정, 웃정, 봉댓골, 작살골마을 등이 있다. 정화마을은 본리가 시작된 마을로, 고려 때 정화소(丁火所)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정마을은 정화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웃정마을은 정화의 위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봉댓골마을은 봉태사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작살골마을은 작살(자갈)이 많았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두산백과)

*장흥군 장동면 용곡리[ Yonggok-ri ] - 자연마을로는 거개, 교촌, 두룡, 용산 등이 있다. 교촌은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두용과 용산의 위쪽에는 폭포를 축소해 놓은 듯한 모습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용추(龍湫)가 있다. 마을의 지명은 용추에서 용이 승천했다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두산백과)

*그 외는 비슷하게 남아 있는데, 가령 요량(요良)은 요곡(안양면 운흥리)으로 운고(雲高)는 운곡(대구 강진군 용운)으로 가좌(加佐)는 가지(장흥읍 해당리)로, 안칙곡(安則谷)은 안국(부산면 내안리)으로, 웅점(熊岾)은 웅치(熊治:보성군 웅치면)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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