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 ‘文林(6)/ 장흥 ’금장사 詩‘ 남긴 정오스님
■문림의향 ‘文林(6)/ 장흥 ’금장사 詩‘ 남긴 정오스님
  • 장흥투데이
  • 승인 2020.12.3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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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사미륵삼존개금기(…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 詩


정오午 국사 “금장 금당 부처 수리못해 아쉬움 커…”- 천태종 부흥 주도 사찰

저자 이산李㦃…경사교수도감사 역임, 성리학 시조 안향이 인정한 뛰어난 문인

 

 김선욱 본지 편집인-시인

《동문선》 68권의 ‘기(記)’ 편에 ‘용두산 금장사 금당주 미륵삼존 개금 기(龍頭山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가 출전된다. 저자는 ‘이산(李㦃)’이다.

이 기록은 장흥의 금장사(金藏寺)(장흥군 용두산에 있었던 절. 고려 때 이산이 지은 「금장사금당주미륵삼존개금기(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만이 전해지고 있다)의 창건부터, 무외정오(無畏丁午, 생몰 미상)가 왕사(王師)에 책봉되어 이 사찰을 하산소(下山所 : 국사와 왕사로 책정되어 산에서 내려올 때 머무르는 곳)로 삼으면서 이 절이 천태종(天台宗) 사찰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내력이며, 무외스님의 제자 굉지스님의 요청에 의해 무외가 금장사 시문을 쓴 내력과 그 시문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자 이산(李㦃) 누구?

‘용두산 금장사 금당주 미륵삼존 개금 기’를 을 쓴 이산(李㦃)은 누구인가. 그의 생몰 연대며, 관리로서 등급 등은 전혀 출전되고 있지 않다. 다만 동시대의 사람이고 고려 후기 문신으로 유학의 진흥에 힘썼던 한국 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던 안향(安珦, 1243년~1306년)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다) 이산(李㦃)과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금내학관(禁內學官 : 대궐 안에 있는 학관)과 내시(內侍)·삼도감(三都監)·오고(五庫)에서 수학을 원하는 선비와 칠관(七館)·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는 기록이 출전되고 있어, 이산이 밀직부사에 이어 경사교수도감사를 역임했던 뛰어난 문신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至是,珦請以密直副使致仕李㦃,典法判書李瑱,爲經史敎授都監使,於是,禁內學館,及內侍三都監,五庫,願學之士,七管十二徒諸生橫經受業者 -고려사절요 제22권 / 충렬왕 4(忠烈王四)/갑진 30년(1304).)

그러면, 먼저 ‘용두산 금장사 금당주 미륵삼존 개금 기’에 등장하는 정오(丁午)스님의 ‘금장사金藏寺’ 시를 살펴보자.

늙어지면서 한 물건이 항상 가슴에 걸려 있었으니 / 老來一物常礙膺

금장 금당 부처를 보수하지 못한 일이다 / 未補金藏金堂佛

오늘 아침에 바람이 불어 공중에 구름이 흩어지니 / 今朝風吹雲散空

화륜이 날아 올라 부상에 나온다 / 火輪飛上扶桑出

도솔이 장엄하게 완연히 여기에 있으니 / 兜率莊嚴宛在斯

용화의 시종을 기필할 수 있다 / 龍華侍從可云必

그대가 만일 옛날에 함께 발원한 사람이 아니라면 / 子如非昔同願人

어찌 나로 하여금 능사가 끝난 것을 알게 하리오 / 焉如使我能事畢

모름지기 앞으로 올 삼회 가운데에 / 須如當來三會中

이 인연을 말하여 같은 날을 기록한 것을 알겠도다 / 說此因緣記同目

이 시는 물론, 당시 금장사에 주석하던 굉지(宏之)선사가 스승이며 왕사(王師)이던 불일보조 정혜묘원 진감 대선사(佛日普照淨慧妙圓眞鑑大禪師)에게 미륵삼존의 개금 사실을 알렸고, 이에 정오(丁午)스님이 과거 금장사에 있을 때를 회상하며 지어서 내려준 시다.

그렇다면, 금장사는 어떤 사찰이었을까. 물론 금장사의 내력도 이산(李㦃)의 기(記)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산의 기(記)와 여타 자료 등을 종합하면, 금장사(金藏寺)는 장흥군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에 있었던 절로 고려 초인 991년(고려 성종 10) 현탄(玄坦)이 창건하였다. 이산(李㦃)의 기록에 의하면, 명진홍효(明眞弘曉) 대사 현탄이 금장사의 금당을 신축하고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을 봉안하였다. 창건된 이후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지만, 불일보조 지눌(佛日普照 知訥, 1158∼1210)이 금장사의 미륵삼존불이 퇴색한 것을 보고 보수할 뜻을 세웠지만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1307년(고려 충렬왕 33) 묘련사(妙蓮寺)의 제4세 주법이었던 무외정오(無畏丁午)가 왕사(王師)에 책봉되어 하산소(下山所)로 삼으면서 금장사는 천태종(天台宗)의 사찰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당시 정오는 금당을 개조하며 미륵삼존상의 개금(改金)에 착수하였고, 이어서 제자 굉지(宏之)가 절의 중창 불사를 지속하여 1310년(고려 충선왕 2) 2월에 낙성식을 가졌다. 이때 굉지는 스승 정오로부터 백은(白銀) 16근과 자금(紫金) 5냥을 받아 삼존상의 개금을 마쳤고 낙성식 때는 점안법회(點眼法會)를 거행하였고 백련결사가 이루어지던 탐진(耽津, 현 강진) 만덕사(萬德寺)의 승려들을 초빙하였다고 한다. 당시 고려의 천태종은 지방 사찰인 강진의 만덕사, 장흥의 금장사, 그리고 개경의 국청사(國淸寺)를 중심으로 교세를 크게 신장시켜 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 12월 전라도 장흥(長興) 금장사는 화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資福寺刹 : 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을 수행하는 사찰)이었다)로 지정되었다.

한편, 장흥군은 최근 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 금장사지(부산면 금자리 50번지 일원) 발국 조사 용역을 의뢰한 바 있다. 기간은 2020년 6월 12일∼2020년 12월 08일까지다.)

‘금장사金藏寺’ 詩를 쓴 정오

고려 말기 충렬·충선·충숙의 3대 국왕에게 왕사와 국사로 추앙되면서 불교계를 이끌던 천태종 고승으로 보통 ‘무외국통(無畏國統)’으로 불린다. 순창현(순창군)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승과(僧科)에 응시,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한 뒤 여러 곳을 유력(遊歷)하였다.

1278년(충렬왕 4) 봄에 오산현鰲山縣)용혈암((龍穴庵)에 거주하고, 1280년 여름에 상주로 옮겨 주석하였다. 1290년 봄에 괘탑암(掛塔庵)으로 옮겨 1294년 가을에 괘탑암을 중수하고, 1295년 4월에는 이 암자의 남쪽 봉우리에 능허대(凌虛臺)를, 1297년 봄에는 초은정(招隱亭)을 세웠다.(용혈암은 만덕산 백련사의 남쪽 십리쯤에 있던 부속 암자로서 백련결사의 제2세 사주였던 천인이 이곳에서 입적하였고 4세 사주인 천책 또한 이곳에 오래 주석하면서 여러 글을 남긴 곳이다. 괘탑암과 능허대, 초은정은 모두 용혈암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302년 월출산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겼다가, 왕의 청에 따라 묘련사(妙蓮社)의 제3세 법주(法主)가 되었다. 이후 대선사(1306년-‘불보조정혜묘원진감대선사佛普照靜慧妙圓眞鑑大禪師’), 왕사, 국통(1313년-‘대천태종사쌍홍정혜광현원종무외국통大天台宗師雙弘定慧光顯圓宗無畏國統’) 등에 올랐다.

정오가 왕사였을 때, 오래 지나지 않아 중앙에서 은퇴하여 하산소(下山所)에 머물게 하는 것이 고려의 상례여서 충렬왕도 큰 절을 골라 정오의 하산소로 삼으려 하였다. 그런데 정오는 예전에 장흥의 금장사(金藏寺)가 본래 큰 절이었지만 퇴색한 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기던 기억을 상기하고 이곳에 머물게 해 달라고 여러 번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정오는 장흥의 금장사에 주석하며 백은(白銀) 16근을 희사하여 법당의 미륵삼존상을 보수한 뒤 개금하는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 불사는 정오가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게 되어 직접 주관할 수 없게 되자 제자인 굉지(宏之)선사를 시켜 일을 마쳤다.

정오의 법형(法兄)에는 원혜국통(圓慧國統)이 있었고, 제자에는 선사 굉지(宏之), 대선사 승숙(承淑), 중덕(中德) 일생(日生) 등이 있었다. 문장에도 능하였는데, 《동문선》에는 그의 글 2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용두산 금장사 금당주 미륵삼존 개금 기

(龍頭山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 -이산(李㦃)

부처는 참되게 빈 것을 체(體)로 삼고, 널리 응하는 것을 용(用)으로 삼나니, 어찌 상설(像設)의 무너지고 완전함을 염두에 두고서 사람에게 화를 주고 복을 주랴. 다만 사람이 선과 악 두 길에 대해서 그가 하는 것에 따라서 그 과보(果報)를 받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어찌 의심할 것이 있으랴. 지금 금장사(金藏寺)는 실상 강남(江南)의 큰 절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집이 낡아서 예전만 아주 못하지만 그 유래는 오래 되었다. 이제 우리 왕사(王師) 불일보조 정혜묘원 진감 대선사(佛日普照淨慧妙圓眞鑑大禪師)가 일찍이 자취를 감추고 떠돌아다닐 때 우연히 이 절을 지나면서 금당주(金堂主) 미륵삼존(彌勒三尊)의 색상(色相)이 헐고 퇴색한 것을 보고 개연히 보수할 뜻이 있어서 드디어 발원(發願)하고 떠났다. 대덕(大德) 11년 정미년 여름에 묘련사(妙蓮社) 주법(主法)으로서 책봉을 받아 왕사(王師)가 되어 이 절을 하산소(下山所)로 삼았다. 이에 전에 발원한 것을 좇아 찾아가서 백은(白銀) 16근을 희사하여 자금(紫金) 5냥과 각색 진채(眞彩) 약간의 분량과 바꾸고, 공사(工師)의 비용과 경석(慶席)의 물자까지도 일체를 모두 준비하였다. 지대(至大) 원년 무신년에 이르러 주청사(周淸寺)로 옮기고, 제자인 선사(禪師) 굉지(宏之)로 하여금 뒤를 이어 이절에 머물게 하고 개금(改金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함)하는 일을 부탁하였다. 선사가 2년 기유년 가을 9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15일 갑오에 처음으로 절에 들어가서 곧 화수(畫手)인 고원사(高原寺) 주인 자성(自成)을 청하여, 10월 21일 경오에 일을 시작하고 경영하여 12월 말에 진흙을 조화하고 나무를 조각하여 진흙으로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나무로 썩은 것을 바꾼 뒤에 자금(紫金)으로 삼존의 상(像)을 고치고 감주(紺珠)로 삼존의 눈동자를 바꾸고, 화관(花冠)과 목걸이와 천의(天衣) 등속까지도 새롭게 하지 않은 것이 없고, 판자를 세워 가려서 주불(主佛)의 좌석을 만드니 사자가 몸을 떨치며 걸터앉고, 통나무를 깎아서 보처(補處)의 대(臺)를 만드니 연꽃은 발을 받들며 깔렸다. 큰 돌을 다듬어서 지면에 세워 삼존의 보대(寶臺)를 안치하였으니, 편안하고 견고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해 2월에 회화(繪畫)의 일이 끝나자, 만덕사(萬德社) 도려(道侶)들을 청하여 맞아서 점안법회(點眼法會)를 열어서 낙성(落成)하였다. 그 이목(泥木)의 공정(功程)과 회화의 묘치(妙致)가 전보다 나음은 있어도 예전 체제를 빠뜨림은 없었다. 선사가 장계(狀啓)로써 왕사께 알리니 왕사가 시로써 선사에게 부치기를,

“늙어지면서 한 물건이 항상 가슴에 걸려 있었으니 老來一物常礙膺… (앞에서 시를 수록하였으므로 이하 생략한다)…” 하였다.

왕사가 원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므로 이 시도 아울러 싣는다. 삼가 금당기(金堂記)를 상고하건대, 처음에는 금당이 없었고 절 주인 명진홍효(明眞弘曉) 대사 현탄(玄坦)이 송(宋) 나라 순화(淳化) 2년 우리 성종(成宗) 10년 신묘년(991년) 2월에 비로소 창건하였는데, 이 해로부터 지금 경술년까지는 3백 19년(13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주지(住持)하여 지나온 자가 얼마며 왕래하며 첨앙(瞻仰)하고 예를 드린 자가 또한 한두 사람이 아니로되 모두 참고 그럭저럭 세월만 보냈다. 우리 왕사가 한 번 본 뒤에야 드디어 퇴락하고 파괴된 나머지를 금빛 얼굴로 바꾸었으니, 어찌 시절과 인연을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옛적에 대가섭(大伽葉)이 금박(金薄)으로 고불(古佛)을 치장하여 광채가 나게 하여, 이 인연으로 91겁(劫)에 천상과 인간에서 몸은 항상 금빛이고 마음은 항상 즐거움을 받다가 마침내 영산회(靈山會)에 이르러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것을 듣고 기(記)를 받아서 부처가 되어 광명여래(光明如來)라고 이름하였으니, 우리 왕사가 앞으로 받을 과보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선사가 편지를 보내어 기를 짓기를 청하여 영원히 전하려 하기에 대강 날과 달을 기록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식 (역) | 1968”

-東文選卷之六十八 > 記 >

龍頭山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李㦃]

佛以眞空爲體。泛應爲用。豈以其像設之壞也完也爲念。而禍福於人哉。但人於善惡二途。隨其所作。獲其果報耳。如斯之理。何足疑焉。今夫金藏寺。實江南之巨利也。代遠屋老。殊不如古者。其來尙矣。今我王師佛日普照淨慧妙圓眞鑑大禪師。甞晦迹雲游。時偶經是寺。見金堂主彌勒三尊色相剝落。慨然有修補之志。遂發願而去。及大德十一年丁未夏。自妙蓮社主法。受冊爲王師。乃以玆寺爲下山所焉。於是追尋前願。捨達嚫白銀一十六斤。易檀金五兩。幷眞彩各色若干。至於工師之費。慶席之資。一皆周備。至至大元年戊申。遷周淸寺。俾弟子禪師宏之繼住玆寺。囑以改金事。禪師於二年己酉秋九月。發京師。十五日甲午初入寺。卽請畫手高原寺主人自成。以十月二十一日庚午始事經營。至十二月之終。調泥刻木。泥以補壞。木以易朽。然後以紫金改三尊之像。紺珠換三尊之瞳。至於花冠瓔珞天衣之屬。無不新之。立遮板爲主佛之座。則獅子奮身而踞。斲全木爲補處之臺。則蓮華承足而敷。鍊巨石。峙地面而安三尊之寶臺。可謂安且固矣。至明年二月。繪事乃畢。邀請萬德社道侶。設點眼法會以落之。其泥木之功。繪畫之妙。有加於前而無闕於古制也。禪師以狀聞于王師。師以詩寄禪師云。…(시 부문 생략)… 王師之願。可見於此。故幷載之。謹案金堂記。初無金堂。有寺主明眞弘曉大師玄坦。於宋淳化二年我成宗十年辛卯二月。始創之。自是年至今庚戌。凡三百一十九年矣。其間住持而經歷者。凡幾許。往來而瞻禮者。亦非一二人也。皆忍視而姑息焉。及我王師一見。然後遂換金容於剝落破壞之餘。豈非待時節因緣者也。昔大迦葉。以金薄治瑩古佛。由此因緣。九十一劫。天上人間。身恒金色。心恒受樂。乃至靈山會上。聞說法華。受記作佛號光明如來。則我王師之當來果報。豈可量哉。禪師以書請爲記。傳之無窮。粗記日月耳。

원감국사와 금장사

한편, 차 마시기를 즐겨하며 다시도 많이 남겼던 원감국사도 금장사와 관련, 차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즉 국사가 금장사 선사로부터 햇차(중갱차)를 선물로 받은 기쁨을 담은 ‘금장대선사가 보내준 차에 감사하며 謝金藏大禪惠新茶’가 그것이다. 이 시를 통해 송 황실의 공납품이던 증갱차가 국사에게까지 전달되어 국사가 매우 기뻐했다는 점을 알 수 있어 관심을 끈다.

慈貺初驚試焙新    자비로워라 새로 덖은 차 보내 주다니

芽生爛石品尤珍    난석에서 나온 싹 더욱 귀한 품종일세

平生只見膏油面    평생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차(가루차)만 보다가

喜得曾坑一掬春    기쁘게도 한 움큼 증갱차를 얻었네

*당나라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원源’에 “차의 상등품은 난석에서 나오고 중품은 돌 자갈 섞인 양토에서 난다’ 했다. 茶經云 茶之上者生爛石 中者生礫壤

원감국사는 이 시에서 증갱차(曾坑茶-소동파가 즐겨 마셨다는 중국 차의 한 종류)라는 햇차를 받은 감회를 잘 표현했다. 증갱차는 정배(正焙)라고 불렀는데, 황실용 차를 만드는 북원(北苑)에서도 증갱 지역에서 생산하는 증갱차를 최고품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감국사도 매우 기뻐했음이 이 시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당시 이 증갱차에 대한 동경은 대단했는데, 흔히 ‘소동파(蘇東坡)’로 불리며, 중국 북송 시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천재 시인(예술가)였던 소식(蘇軾, 1036~1101)이 “한 줌의 증갱차/제후에게 공납되는 차이라 曾坑一掬春, 紫餅(饼)供千家”(《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23)라고 읊은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 증갱차는 중국의 제후나 명사만이 마실 수 있었던 차였던 것이다.

이처럼 송대 명사들도 선망하던 증갱차를 금장대선사가 보냈으니, 물욕을 여읜 원감국사라할찌라도 그 기쁨과 고마움이 어떠했을지 시 행간에 잘 묻어난다. 또한 당시 증갱차를 구하여(수입하여) 선물할 정도로 금장사의 사세가 대단했음도 이 시에서 유추할 수 있다.

▲2020년 11월.. 금장사지 발굴 현장/김희태 제공
▲2020년 11월.. 금장사지 발굴 현장/김희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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