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영웅’ - 장흥인 정세운 장군 찬시贊詩
‘불세출의 영웅’ - 장흥인 정세운 장군 찬시贊詩
  • 김선욱
  • 승인 2021.01.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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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의향 ‘文林(7)/고려조 정세운의 찬시
목은 이색, “정세운 공훈, 구주대첩 영웅 강감찬 장군과 대등하다”
조선조 정도전 1편, 무명자도 3편 시-정鄭 장군 기억, 그 충절 기려

김선욱/본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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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포은 이색이 장흥 관련 시 2편( ‘스스로 탄식하다自歎’, 증시중정공화상찬贈侍中鄭公畵像贊)을 작시한다.

이 2편의 시는 모두 장흥 출신의 정세운 장군에 대한 시다. 이로써 이색의 시 2편은 장흥 출신은 아니지만 외인으로 작시된 고려조 장흥 시의 세 번째, 네 번째 시가 된다. 먼저 이색의 시 주인공인 된 정세운이 누구였는가부터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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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장흥 출신으로 ‘불세출의 영웅’이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본관은 광주(光州)로, 당시 장택현(현 장평면, 백제 때 계천현季川縣이었다 통일신라 때 계수현季水縣으로 개칭되고, 고려 성종 때 장택현으로 개칭됐다) 출신의 무장이었다. 공민왕을 보필, 호위하며 기철(奇轍,?~1356 : 고려 후기 문신이요 친원파 권문 세족의 일원으로 후에 반역을 꾀했던 인물)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또 홍건적 난으로 개성이 함락당하면서 고려가 절체절명의 위란에 빠졌을 때 고려군 총대장으로 20만 대군을 지휘하며 홍건적을 물리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던 장군이었다.

당시 그의 공훈이 ‘구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과 대등하다고 평가됐을 정도였다(姜公遠矣 公則儷美-목은 이색). 그러나 그는 그의 공훈을 시기하던 동료, 후배들의 음모로 인하여 살해되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 정세운(鄭世雲, ?~1362)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고려 말 마지막 문인이요 대학자였으며 충절의 표본이었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은 그의 불행(살해)을 한탄하는 시와 그의 충절 등을 찬미하는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정세운의 불운을 한탄하는 시는 목은 시문집인 《목은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를 찬하는 시문은 《동문선》‧《목은집》에 출전되어 있다).

고려조 충절의 표본이었던 장흥인 정세운을 찬미하거나 그의 불운을 회억하는 시문은 목은 이색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조에서도 조선 초기 최고의 학자였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1342∼1398)을 비롯하여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1741~1826)에게 이어져 정세운 관련된 시는 4편이나 출전될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지금까지 확인된 정세운 관련 시문이 6편에 이르고 있는 셈이다. 역대 장흥 출신 인물에 대하여 찬미 시문의 6 편의 출전은 장흥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1. 목은 이색 - 정세운 시 2편

우선 정세운에 관한 목은 이색의 시문부터 살펴보자. 당대에 최고의 석학이요 대표적으로 절의를 지킨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위명을 떨쳤던 목은 이색에게 정세운은 관료의 동료요 후배였다.

이색은 13531∼1354년에 향시, 회시 등에 합격하여 국사원편수관에 제수되며 관직에 올랐는데 그때가 그 나이 26세였다. 또 정세운은 그로부터 2,3년 후인 병신년, 즉 1356년에 공민왕이 태자로 원나라에 갔을 때 공민왕을 숙위했던 인물이었다. 이로 보아 이색과 정세운은 연배가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색은 정세운을 찬하는 글(贈侍中鄭公畵像贊)에서 정세훈을 ‘아우’로 표현하고 있다(弟曰世文).

이색이 장흥 출신의 정세운(鄭世雲)의 불운을 한탄한 시와 그의 충절을 찬한 시를 보자.

①‘스스로 탄식하다自歎’(丁酉正月 1357년 정월) - 이색

목은 시집 '자탄'
목은 시집 '자탄'

물 끓듯 시끄럽게 시비가 분분하여라 / 沸似蜩螗雜是非

나는 듯이 빠른 총마를 모두가 미워하네 / 摠嗔驄馬疾如飛

채찍 멎고 세밀히 들어 보면 기쁨직하나 / 停鞭細聽雖堪喜

장계를 자세히 보면 감히 행여 어길쏜가 / 案狀詳看敢或違

납촉(밀납 초)이 다 타도록 긴 밤을 지내기도 하고 / 蠟燭燒殘過永夜

첩황을 두루 찾느라 해가 저물기도 하네 / 貼黃尋遍掛斜暉

익재의 감식안을 누가 능히 벗어나랴 / 益齋藻鑑誰能遁

가만히 앉아 응양군 지휘 듣는 걸 보노라 / 坐見鷹揚聽指揮

*시비 : 정세훈 공과에 대한 시비 *빠른 총마 : 정세운을 의미

*익재의…능히 벗어나리 : 익재는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호이다. 이색은 이제현의 문인이었다. 당시 이색은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7년동안 공민왕을 곁에서 모셨고, 홍건적의 재차 침입 때 왕을 안동까지 호종하여(정세운도 왕을 호종하였다) 호종 1등공신에 오르기도 하였고, 익재는 조정의 최고위직에 있어 정세운·이색·익재는 동시대 인물이었다.(당대 최고 원로였던 익재는 정세훈 살해된 후 5년을 더 살았다). 이 시로 보아, 익재도 정세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첩황貼黃 : 조서(詔書)를 보충하거나 고치는 것 *응양군 : 정세운이 홍건적의 재차 침입 때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으로 왕을 호종했음으로 ‘응양군’은 정세운을 이른다.

▪원문=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역=한국고전번역원|임정기(역)

-《목은집》 목은시고(牧隱詩藁) 제4권, 시詩

②증시중정공화상찬(贈侍中鄭公畵像贊) - 이색

아아, 정공이여, 겉으로는 소박하며 안은 확고하였다. / 於維鄭公 樸外確中

공민왕의 공신으로 병신(丙申)년에 출발하였다. / 玄陵功臣 發于丙申

적(賊)이 중국에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우리 영토에까지 침입하였다. / 賊徧中國 侵我邦域

우리는 그들의 무력을 피하였는데 공은 마침내 적을 내쫓았다. / 我避其鋒 公乃出敵

이미 그들을 무찔렀는데 부하가 공을 해쳐버렸네. / 亦旣殲之 而下害而

해친 자들도 다 없어졌으니 아아,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없었던가, / 害而俱亡 嗚呼不思

강공(姜公)은 옛날 일이지만 공의 위대함, 그와 맞서리로다. / 姜公遠矣 公則儷美

우리 광평군 아니었으면 누가 그리며 누가 기록했으랴. / 匪我廣平 孰圖孰志

송악산(松嶽山) 푸르른데 우리 명당(明堂) 웅장할사, / 松山蒼蒼 壯我明堂

정공의 영향은 영원하게 전하리라. / 鄭公之風 播于無窮

*공민왕의…출발하였다 : 정세운은 병신년, 즉 1356년에 공민왕이 태자로 원나라에 갔을 때 공민왕을 숙위(宿衛 : 호위)했다. *해친 자들도 다 없어졌으니 : 정세운을 설해한 자들 *강공(姜公)은 옛날 일이지만 :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했을 때 이를 물리쳤던 강감찬(姜邯贊, 948∼1031)을 이른다.

*광평廣平 : 고려 말 권신이던 이인임(李仁任, ?~1388)을 이른다. 홍건적의 재차 침입 때 정세운 총병관 밑에서 크게 활약하여,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임명과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던 인물이었다(후에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실각되었다). 이 찬의 서문에, ‘광평군이 정세운의 이름은 영원히 전하여질 것이지만, 화상이 없으니 정공의 화상을 그려서 철 따라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서 화상을 그렸다는 설명이 나온다.

-《동문선》 제51권, 찬(贊)의 일부/ 《목은집》, 목은문고 제12권, 찬讚

▪원문=ⓒ한국고전번역원 ▪역= ⓒ한국고전번역원|임창순(역)|1968

찬贊이란, 인간의 훌륭함, 사물의 아름다움 등을 찬양하는 한문체의 글을 말한다. 원래는 신명(神明)에게 바치는 글이었으나 후세에 변하여 잡찬(雜贊)·애찬(哀贊)·사찬(史贊) 등으로 나누어졌다. 잡찬은 인물·서화(書畵)·문장 등에 대한 찬으로 대표적인 예는 족자나 액자로 된 회화 속에 쓰여진 시(詩)·가(歌)·문장 등이 있다. 예부터 많은 학자·지명인사들에 의한 여러 가지 찬이 전해진다(김희태).

이 찬(贊 : 이색의 《목은집 11권》에도 ‘증 시중 정공화상에 제한 찬 병서贈侍中鄭公畫像讚 幷序’가 출전되는데, 여기서는 贊이 아닌 讚으로 표기돼 있다)에서 이색은 ‘정세운의 공훈이 구주대첩 강감찬 장군의 공훈과 맞선다’라고 표현했다. 이색이 찬한 ‘정세운 화상 찬’은, 앞 부분은 서문이 나오고 끝 부분에서 이 찬을 수록하였는데(이색의 ‘贈侍中鄭公畵像贊’ 전문은 뒤에 소개하기로 한다), 여기서 이색은 강감찬의 탁월한 공훈을 거론하고, ‘강 장군이 개선할 때 현종이 직접 교외까지 나아가 맞이하고 시를 지어주며 표창했지만, 정세훈의 살해라는 불행을 직면했으니, 그런즉 곧 정세운의 불행은 공민왕으로서의 큰 슬픔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색이 정세운에 대한 시문 2편을 남겼다는 것은 이색과 정세운이 각별했으며 그만큼 정세운의 불운한 죽음을 이색이 안타까워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더구나 정세운의 출생지 장흥은 이색의 유배지기도 하여 더욱 각별한 의미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392년 태조1 … 7월에 장흥부로 폄척(貶斥-벼슬을 박탁하여 유배시키다)되었다가, 10월에 용서되어 한주韓州로 돌아갔다. 洪武廿五年 壬申…七月。國家革命。貶長興府。十月。蒙宥歸于韓州)(《목은고牧隱藁》,牧隱先生 年譜)

2. 조선조-정세운 시 4편 출전

정도전의 시- '출성 갑진 봄'
정도전의 시- '출성 갑진 봄'

조선조에 들어와서 정세운 관련의 시는 4편이나 출전된다.

조선 초기 대학자요 문신이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1342~1398)의 시 1편과 영조·정조 때의 문인 무명자 윤기(尹愭, 1741~1826)가 남긴 시 3편이 그것이다.

먼저 정도전의 시를 보자.

③ 출성 갑진 봄(出城 甲辰春) - 정도전

성을 나와 남쪽 바라니 갈 길은 멀고 먼 데 / 出城南望路悠悠

동풍 불어 때는 바로 이월 초순 / 正是東風二月頭

뉘라서 도성문에 버들을 심었느냐 / 誰向都門種楊柳

해마다 꽃이 날아 남의 시름 더해 주네 / 年年飛絮使人愁

★저본底本 : 정세운이 동문 밖에다 버들을 심었는데, 뒤에 총병관이 되어 홍건적을 평정했지만 삼원수(三元帥)에게 살해되었다. 鄭世雲種柳於東門外。後以摠兵官平紅寇。爲三原帥所害。

*갑진 봄 : 고려 공민왕 13년(1364). 이 시는 정세운이 살해(1362년 살해)된 지 2년 후이던 고려조 1364년에, 불운한 정세운을 기억하며 작시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역=한국고전번역원||임정기(역)

-《삼봉집》 제2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무명자 윤기도 《무명자집(無名子集)》에서 정세운 관련 시 3편을 남겼다. ‘영동사 563〔其五百六十三〕’ ‘영동사 564〔其五百六十四〕’ ‘영동사 565〔其五百六十五〕’가 그것이다.

《무명자집》은 작자 윤기가 600편의 시를 칠언절구로 읊어 6책으로 편집한 시집이다. 윤기는 살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제자로 남포 현감(藍浦縣監), 황산 찰방(黃山察訪) 등을 거쳐 호조참의(정3품)에 올랐던 문신이었다. 그는 《무명자집》 외에도 220수가 담긴 《반중잡영泮中雜詠》를 남겼으며 섬세한 감수성으로 자신의 내면을 묘사하였고, 권력자의 횡포와 양반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한 시인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었다.

무명자 윤기의 3편의 시는 다음과 같다.

④ 영동사 563(詠東史]其五百六十三) - 윤기

▲<무명자집>-정세훈 시 3편

영호루 아래에서 배를 띄우고 놀면서 / 映湖樓下泛舟遊

세운에게 소탕 근심 데면데면 맡겼다오 / 謾付世雲掃蕩憂

어이해 애통 조서를 내리도록 권하였나 / 何用勸王哀痛詔

그대가 공 이룬 뒤를 염려해야 했으리 / 還須慮爾功成秋

★저본底本=왕이 태후를 모시고 남쪽으로 몽진하여 복주(福州)까지 갔다. 영호루(映湖樓)에 거동하여 배를 타고 놀았다.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제군(諸軍)을 감독하여 홍건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정세운은 성정이 충직하고 강개하여 밤낮으로 근심하고 번민하며 홍두적 소탕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그리하여 왕에게 애통조(哀痛詔)를 속히 내리도록 권하였다. 王奉太后。南奔福州。幸映湖樓。乘舟遊賞。以鄭世雲爲捴兵官。督諸軍討紅頭賊。世雲性忠淸慷慨。日夜憂憤。以掃蕩爲己任。勸下亟下哀痛詔。

*영호루에 … 놀면서 : 공민왕 10년(1361) 12월 을미일의 일이다. 《高麗史 卷39 恭愍王世家2 10年》 *그대가 … 했으리 : 공민왕 11년(1362) 1월 갑자일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간 뒤,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金鏞)이 동월 기사일에 왕의 명을 가탁하여 안우(安祐)와 이방실(李芳實) 등에게 정세운을 살해하게 한 것을 이른다. 《高麗史 卷40 恭愍王世家3 11年》

*왕이…갔다 : 공민왕 10년(1361) 12월 임진일. ‘복주(福州)’는 경북 안동(安東)의 옛 이름이다. 홍건적(紅巾賊)은 원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반란을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쓴 까닭에 이렇게 불렀다. 그중 한 무리가 두 차례에 걸쳐 고려까지 침범하였다. 특히 공민왕 10년(1361) 10월에 홍건적이 10여만 군사를 이끌고 2차 침입하자, 공민왕은 몽진을 떠나 동년 12월 임진일에는 지금의 안동인 복주(福州)에까지 이르렀다. *애통조(哀痛詔) : 재해나 국난을 당했을 때 내리는 임금이 자신을 탓하는 조서이다.

▪원문=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2000 ▪역=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상아(역)|2014

-《무명자집》, 시고(詩稿) 제6책, 시詩

⑤ 영동사 564〔其五百六十四〕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충성을 떨치고 / 鄭安金李奮忠誠

신이한 위엄 지닌 태조의 병력도 합세했다오 / 聖祖神威復合兵

사류와 관선생 베고 남은 적병들 달아나니 / 直斬沙關餘賊遁

위대한 공 즉시 이루어 경성을 수복했다오 / 偉功倐報復京城

★저본底本=총병관 정세운, 도원수(都元帥) 안우(安祐), 원수(元帥) 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 등이 우리 태조(이성계)의 군대와 연합하여(여기서 태조라고 했으나, 실제 고려 공민왕이었다) 홍두적(紅頭賊)을 쳐서 적의 괴수 사류(沙劉)와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어 죽이고 적군 20여만 명을 참수했으며 원나라의 옥새 2과(顆)와 금보(金寶) 1과(顆) 등을 노획하였다. 남은 적들은 달아나서 돌아갔다. 捴兵官鄭世雲,都元帥安祐,元帥李芳實,金得培等。與我太祖軍合擊紅賊。斬賊魁沙劉關先生等。斬首二十餘萬。獲元玉璽二顆金寶一顆等物。餘賊遁還。*경성(京城)을 수복했다오 : 홍두적 무리가…고려까지 침범하였고, 공민왕 10년(1361) 10월에 10만의 군사로 제2차 침입을 하자, 공민왕은 몽진을 떠났고, 11년(1362) 1월 을축일에 개경이 수복되자 공민왕은 개경을 떠난 지 1년 3개월 만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총병관(摠兵官) … 돌아갔다 : 원주(저본)에 ‘적군 20여만 명을 참수했다’고 하였으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모두 고려는 20만 병력과 이성계 친병(親兵) 2천명으로 홍두적을 격파하여 홍두적 10여만 명을 베어 죽이고 그 잔당 10여만 명은 도주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갔다고 되어 있다. 《高麗史 卷40 恭愍王世家3 11年》 《高麗史節要 卷27 恭愍王2 壬寅11年》

▪원문=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2000 ▪역=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상아(역)|2014

-《무명자집》, 시고(詩稿) 제6책, 시詩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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