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 ‘文林(8)/고려조 정세운의 찬시(2)
■문림의향 ‘文林(8)/고려조 정세운의 찬시(2)
  • 김선욱
  • 승인 2021.01.2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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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인 정세운 장군 찬시贊詩 …6편 출전
무명자 운기 시인 –시 3편, 鄭 장군 기억, 그 충절 기려
조선 사서들-’鄭장군 홍건적 대파’ 공훈 典範으로 내세워
'동문선' 목은 이색의 정세운 찬1
'동문선' 목은 이색의 정세운 찬2

 <지난호에 이어>

다음은 무명자의 세 번째 시다.

영동사 565〔其五百六十五〕

김용이 예전엔 일신과 한패 되어 모반하더니 / 金鏞昔黨日新謀

지금은 홍두적 위해 원수를 갚아준 듯하네 / 今爲紅頭似報讎

우에게 유시하여 세운 죽인 뒤 우를 죽이고 / 諭祐殺雲仍殺祐

득배와 방실도 한꺼번에 모두 베어 죽였다오 / 得培芳實一幷劉

*원주 : 장수들이 개선하고 돌아오자 김용(金鏞)이 그 공 이룬 것을 시기하여 거짓으로 교서(敎書)를 만들어 조카 김임(金琳)을 시켜 안우(安祐) 등에게 은밀히 일러서 정세운(鄭世雲)을 죽이도록 하였다. 안우 등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정세운을 초청한 뒤 장사(壯士)들을 시켜 좌중에서 정세운을 격살(擊殺)하였다. 김용은 일이 새나갈까 두려워 먼저 김임을 베어 죽였다. 또 안우 등이 정세운을 멋대로 죽였다고 왕에게 아뢰어 안우를 행궁 문밖에서 죽이고 사람을 보내 이방실(李芳實)을 용궁현(龍宮縣)에서 죽였으며 김득배(金得培)를 기주(基州)에서 죽였다. 諸將凱還。金鏞忌成功。矯旨爲書。使其姪金琳密諭祐等誅世雲。祐等置酒邀世雲。令壯士於座上擊殺之。鏞恐事泄。先斬琳。又以祐等擅殺世雲白王。殺祐於行宮門外。遣人殺芳實於龍宮。殺得培於基州。

▪원문= ⓒ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2000

▪역=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상아(역)| 2014

한 마디로 정세운(鄭世雲)은 1361년(공민왕10) 겨울 홍건적(紅巾賊)이 고려에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하였을 때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20만 대군으로 적을 물리쳤던 장흥 출신의 명장이었다.

이러한 정세운의 공훈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 와서도 여러 편의 시문으로 작시되기도 했으며, 나아가서 정 장군의 이야기가 영웅담이 되고, 귀감이 되고, 전범의 사례가 되며 널리 회자되었다.

다음의 여러 사서 등에 출전되는 예가 이를 웅변하고도 남는다.

■여러 사서들- 전세훈 공훈, 전범으로

“…고려 말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용맹한 군사 30여 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송도를 함락시켰는데, 우리 태조 및 정세운(鄭世雲)이 일거에 그 20만 명을 깨뜨리고 그 괴수 관선생(關先生)을 목베고 두목 반성(潘誠)을 쫓아 깨뜨렸습니다. 이에 천지가 평정되어 고려 왕실이 다시 안정을 찾았습니다. …麗氏之末, 紅巾賊率豼貅熊羆之師三十餘萬, 來陷松都, 我太祖及鄭世雲, 一擧而破其二十萬, 斬其魁關先生, 逐破頭藩, 於是乾淸坤夷, 麗室復安…(《승정원일기, 고종 3년 병인, 9월 12일, …동부승지 이항로의 상소)

“…신축년(1361)에 홍건적이 경성을 함락하자 임금의 어가가 몽진하였는데, 선생은 어가를 호종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다. 임금은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보내 적을 토벌하게 하고, 박춘(朴椿)과 선생의 차자인 백진(白晉)을 좌병관으로 삼으니, 적의 우두머리 사류(沙劉)를 베고 크게 승리하였다. …辛丑。紅賊陷京城。宮駕播越。先生扈駕至福州。遣摠兵官鄭世雲討賊。以朴椿及次子晉爲佐兵。斬賊魁沙劉。大捷之…(《담암일집》,淡庵先生逸集附錄卷之二, 附錄下)

“…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 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至於將帥, 亦不及焉。 當麗季紅巾賊之亂, 鄭世雲以二十萬兵, 結陣於天壽門前”-(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1번째 기사)

“… 이해 정월. 최영(崔瑩) 등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 교외에 주둔하였다.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이 모든 장수를 독려하고 진군시켜 도성을 포위하자 여러 장수가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휘하의 친위병 2000명을 이끌고 앞장서 성에 올라가 대파하여 적의 괴수를 벴다. 적도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밟고 밟히니 쓰러진 시체가 성 안에 가득하였다. 10여 만 명의 목을 베고, 원나라 황제의 옥새ㆍ금보(金寶)ㆍ금은ㆍ동인(銅印)ㆍ병기 등을 노획하였다.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 만 명은 달아나 압록강을 건너가 버리니 적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 崔瑩等率兵二十萬, 屯東郊, 摠兵官鄭世有督諸將, 進圍京城, 諸將四面進攻, 我太祖以麾下親兵二千人, 奮擊先登, 大破之, 斬賊魁. 賊徒自相蹈籍, 僵屍滿城, 斬首一十餘萬級, 獲元帝玉璽ㆍ金寶ㆍ金銀ㆍ銅印ㆍ兵仗等物, 餘黨破頭破藩等一十餘萬遁走鴨綠江而去, 賊遂平.” (《천동상위고》(숙종 때 최천벽崔天璧 저술), 제11권, 경위성변점經緯星變占, 공민왕恭愍王 11년 3월)

“…조발하여 모은 군사가 이미 많은 상황에서 예기(銳氣)를 쌓고 용맹을 길러 우리의 무력을 떨쳐 저 추악한 오랑캐를 포획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우리의 영토를 보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세를 보아가며 진격하여 저들이 만약 제 발로 와서 죽을 곳을 찾는다면 정세운(鄭世雲)의 뛰어난 전공을 세울 수가 있고 거란의 수레가 한 대도 남지 않고 복몰(覆沒)될 것입니다. …調聚旣殷, 蓄銳養勇, 張我武烈, 攝彼戎醜, 一以保我疆宇, 一以觀勢進勦, 彼若自來送死, 則世雲之雋功可就, 契丹之隻輪靡遺 ”(《승정원일기》 53책, 인조14년(1636년),9월 20일, ‘나주 유학 정모의 상소)

…내년에는 그들을 거느리고 명 나라를 친다고 큰소리를 친다 하니, 이러한 적의 흉계를 본다면 반드시 물러갈 이치가 없습니다. 옛날 홍건적의 난리에 정세운(鄭世雲)이 주장(主將)이 되자, 일시에 명장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여러 도의 병사 20만과 연합하여 겨우 이길 수 있었으니, 오늘날의 사정으로 본다면 그 형세가 어떠합니까? …聲言明年。欲驅率入犯大明云。觀此賊兇計。必無退還之理。昔紅巾之亂。鄭世雲爲主將。一時名將雲集。合諸道兵二十萬。僅能克之。以今觀之…(《西厓先生別集卷之三》, 書, 與李孝彦)

*호언 이호민 : 조선시대 예조판서, 대제학, 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며 시문에 뛰어났던 문신. 자서로 《오봉집(五峰集)》 16권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산현의 인물편에서는 아예 전세운의 이력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정세운(鄭世雲) : 공민왕을 따라 원 나라로 들어가 숙직하여 지켰고, 여러 번 승진되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 공이 일등에 책록되어 군부판서 지문하성사(軍簿判書知門下省事)가 되었으며, 기철(奇轍)을 죽이는데 일등의 공로로 기록되었다. 공민왕 8년에 홍건적이 서경(西京)을 함락하자, 세운이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가 되어 황주(黃州)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홍건적이 서경으로 쳐들어와 목책을 쌓고 성을 수리하므로 공격할 계략이 없으니, 원컨대 놀라 들먹이지 말고 민심을 안심시키십시오.” 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여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安東)로 피난을 가니, 정세운은 추밀겸 응양군상장군(樞密兼鷹揚軍上將軍)으로 따라갔다. 그는 성품이 충직하고 결백하여 주야로 조심하고 분개하면서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다. 이에 왕은 정세운으로 총병관(摠兵官)을 삼고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를 제수했다. 공민왕 11년에 그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서울을 회복했으나, 이윽고 안우(安祐) 등에게 살해당했다. 공이 일등으로 책록되어 첨의정승을 추증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광산현光山縣, 인물)

정세운-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고려사’ 등-정세훈운 활동 이력

*공민왕이 원元에 있을 때 호종했던 대호군(大護軍) 정세운(鄭世雲) 등 공신들[燕邸隨從功臣]을 녹훈(錄勳)하였다. 《高麗史 世家 卷제38 恭愍王 元年 1351년》

*원이 사신을 보내 장사성의 토벌을 지시하다. 정세운(鄭世雲)·최영(崔瑩) 등과 서경(西京)의 수군(水軍) 300명을 불러들이고 또한 날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0일까지 연경(燕京)에 집결시켜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라고 지시하였다.《高麗史 世家 卷제38, 恭愍王 3年(1354년)》

*정세운(鄭世雲)을 지문하사(知門下事) 관직에 임명하다. 《高麗史 世家 卷제39 恭愍王 7年1358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 등 기철 처형에 공을 세운바, 일등공신을 부여하다

(기철奇轍 등이 원 황실의 인척에 연결되어 권세를 부리면서 비리를 멋대로 저질렀다.…후에는 반역을 도모할 목적으로 사사로이 병장기를 제조하고…상국의 사신을 사칭해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민심을 어지럽혔으며… 마침내 비밀리에 모이는 시기를 알려 한꺼번에 반란을 도모하였다)《高麗史 世家 卷제39 恭愍王 8年 1359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로 임명하다.

《高麗史 世家 卷제39 恭愍王 9年(1360년)》

*정세운을 서북면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로 임명하였다.《高麗史 世家 卷제39 恭愍王 10年(1361년)》

*왕 일가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날 때 참정(參政) 정세운(鄭世雲)도 호종하다《高麗史 世家 卷제39 恭愍王 10年(1361)》

*왕이 복주(福州)에 도착하여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교서(敎書)를 내려 파견하였다. 《高麗史 世家 卷제39 恭愍王 10年(1361년)》

*정세운(鄭世雲)을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임명하였다 《高麗史 世家 卷제39 恭愍王 10年(1361년) 12월》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황상(黃裳), 한방신(韓方信), 이여경(李餘慶), 김득배(金得培), 안우경(安遇慶), 이구수(李龜壽), 최영(崔瑩) 등이 병사 200,000명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에 진을 치자,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진격시켜서 개경[京城]을 포위하도록 하였다.《高麗史 世家 卷제40 恭愍王 11年(1362) 1월 17일》

*김용(金鏞)이 왕의 명령을 위조하여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를 비밀리에 회유하여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살해하였다. 《高麗史 世家 卷제40 恭愍王 11年(1362년) 1월 22일》

*김용이 안우·김득배·이방실을 모함하여 죽이다. …김용(金鏞)은 평소에 정세운(鄭世雲)과 함께 왕의 총애를 다투었고, 또 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 등이 큰 공을 이루어 왕이 중하게 여길까 염려하여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이로 인하여 죄를 씌워 모두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거짓 왕명으로 글을 만들어 그의 조카인 전 공부상서(工部尙書) 김림(金琳)을 시켜 몰래 안우 등을 설득하여 정세운을 도모하게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이 물러갔다가 밤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정세운을 죽이라고 한 것은 임금의 명령입니다. 우리들이 공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왕명을 받들지 않으면 그 후환을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득배가 굳이 할 수 없다고 하니 안우 등이 강요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부르게 하였다. 그가 도착하자 안우 등이 장사(壯士)에게 눈짓하여 앉은 자리에서 그를 쳐 죽이게 하였다. 鏞素與世雲爭寵, 又恐祐·得培·芳實等成大功, 爲王所重, 欲使祐等殺世雲, 因以爲罪, 而盡殺之. 乃矯旨爲書, 使其姪前工部尙書金琳, 密諭祐等, 令啚世雲. …祐·芳實乃退, 及夜復來言曰, “誅世雲, 君命也. 我輩成功而不奉命, 其如後患何?” 得培堅執不可, 祐等强之, 於是置酒, 使人邀世雲. 旣至, 祐等目壯士, 於坐擊殺之… 《高麗史 列傳 卷제26 諸臣 안우》

*정세운(鄭世雲)의 승전보가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왕이 내첨사(內詹事) 이대두리(李大豆里)를 파견하여 정세운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高麗史 世家 권40 恭愍王 11年(1362) 1월 23일》

*김용(金鏞)이 왕을 살해하려고 흥왕사 행궁(行宮)을 침범할 때 왕의 피난에 호종했던 공신들을 1등으로 ‘홍건적의 난리 때’ 정승(政丞)으로 추증된 정세운(鄭世雲)등을 2등으로 녹훈하다.

《高麗史 世家 卷제40 恭愍王 12年(1363년) 윤3월》

*정세운, 경성 수축을 반대하다 : 경복흥이… 공민왕(恭愍王) 초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임명되었으며, 판추밀원사 참지문하정사(判樞密院事 叅知門下政事)를 역임하였고,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로 승진하였다. 그때 경성(京城)의 수축(修築)을 의논하였는데, 경복흥이 정세운(鄭世雲)·유숙(柳淑)과 함께 말하기를, “지금 사방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 민(民)이 상처받고 굶주리고 있는데, 만일 성곽을 쌓게 되면 민이 장차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역사(役事)를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高麗史 列傳 卷제24 諸臣 경복흥》

*김원명이 신돈을 왕에게 소개-정세운이 죽이자 간언 : 공민왕 꿈에 어떤 사람이 칼을 뽑아 자기를 찔러 죽이려고 하는데, 어떤 승려가 구해주어서 모면한 적이 있었다. 다음 날 태후에게 고하고 있을 때, 마침 김원명(金元命)이 신돈(辛旽)을 알현시키는데 그 모습이 매우 닮았다. …신돈이 글을 알지 못하여 항상 서울(京都)을 다닐 때 불법(佛法)을 전하는 척하며 여러 과부를 꼬여내어 간음을 하곤 하였다. …이승경(李承慶)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라를 어지럽힐 자가 반드시 이 중놈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세운(鄭世雲)은 〈그를〉 요망한 승려라고 여겨 죽이고자 하였는데, 왕이 은밀히 피하게 하였다. 이승경과 정세운이 죽자 머리를 기르고 행각승 행세를 하다가, 다시 와서 임금을 알현하고 비로소 궁궐에 들어와 정권을 잡게 되었다.… 恭愍王夢, 人拔劒刺己, 有僧救之得免. 明日, 以告太后, 會金元命以旽見, 其貌惟肖. 王大異之, 與語聰慧辨給, …旽目不知書, 常遊京都, 勸緣誑誘諸寡婦, …李承慶見之曰, “亂國家者, 必此髡也.” 鄭世雲以爲妖僧, 欲殺之, 王密令避之. 承慶·世雲死, 髮而爲頭陀, 復來謁王, 始入內用事. 賜號淸閑居士, 稱爲師傅, 咨訪國政, 言無不從, 人多附之. 士大夫之妻, 以爲神僧, 聽法求福而至, 旽輒私焉. 《高麗史 列傳 卷제45 叛逆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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