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 ‘文林(10)’/ 장흥 詩 남긴 진정국사 천책
■문림의향 ‘文林(10)’/ 장흥 詩 남긴 진정국사 천책
  • 김선욱
  • 승인 2021.01.2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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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결사 4대 맹주 천책 스님- 장흥 詩 남겨
다산 정약용, “최치원·이규보와 함께 3대시인”평가했던 시인
당대 사찰 성세한 장흥의 용두산 금장사 大禪師의 讚詩 남겨
천책스님이 주석했던 백련결사운동의 산실인 백련사
천책스님이 주석했던 백련결사운동의 산실인 백련사

백련결사의 4대 맹주였던 진정국사 천책이 쓴 차시 ‘금장 대선사에게 드리다(寄金藏大禪師)’가 천책의 문집 《호산록湖山錄》에 장흥 시로 출전된다.

먼저, 금장사는 어떤 사찰이었는가부터 알아보자

금장사(金藏寺)는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에 있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다.

《동문선》의 기록에 의하면, 금장사는 고려 초인 991년(고려 성종 10) 명진홍효(明眞弘曉) 대사 현탄(玄坦)이 金堂(금당 : 본존상을 모신 법당)을 신축하고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을 봉안하면서 창건되었다.(…삼가 금당기(金堂記)를 상고하건대, 처음에는 금당이 없었고 절 주인 명진홍효(明眞弘曉) 대사 현탄(玄坦)이 송(宋) 나라 순화(淳化) 2년 우리 성종(成宗) 11년 신묘년 2월에 비로소 창건하였는데, 이 해로부터 지금 경술년까지는 3백 19년이 되었다. …謹案金堂記。初無金堂。有寺主明眞弘曉大師玄坦。於宋淳化二年我成宗十年辛卯二月。始創之。自是年至今庚戌。凡三百一十九年矣”(《동문선》 제68권,記, 龍頭山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

창건된 이후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1300년대 초반에는 “지금 금장사(金藏寺)는 실상 강남(江南)의 큰 절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집이 낡아서 예전만 아주 못하지만 그 유래는 오래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今夫金藏寺。實江南之巨利也。代遠屋老。殊不如古者。其來尙矣”(《동문선》 제68권,記, 龍頭山金藏寺金堂主彌勒三尊改金記) 。

그리고 1307년(고려 충렬왕 33), 묘련사(妙蓮寺)의 제4세 주법이었던 무외정오(無畏丁午)가 왕사(王師)에 책봉되어 금장사를 하산소(下山所)로 삼게 되고, 금당을 개조하며 미륵삼존상의 개금(改金)에 착수하였고, 이어서 제자 굉지(宏之)가 절의 중창 불사를 지속하여 1310년(고려 충선왕 2) 2월에 낙성식을 가지게 된다.《동문선기》

그런데, 금장사 중창은 1300년 초반이었고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 1206∼1245)은 1200년대 초반 사람이니, 금장사의 중창역사 거의 1세기 전의 금장사와 금장대선사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장흥 지역에서는 큰 사찰이었을 것이고, 금장대선사가 뛰어난 저서도 집필할 만큼 법력이 뛰어나 ‘대선사’로 불리울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당시 금장 대선사는 천책 스님에게 최고의 명차 중 하나인 중국산 몽령차(蒙嶺茶 : 중국 唐代부터 靑나라 때까지 황실에 진상되던 공차貢茶)를 선물을 보냈는데, 당시 원감국사에게도 최고의 중국산 명차인 증갱차(曾坑茶 : 중국의 제후나 명사만이 마실 수 있었던 최상급 차)를 선물로 보냈다. 이는 금장사가 최고급 중국산 명차들을 수입할 정도였다는 데서 당시의 사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원검국사의 시 ‘금장 대선사가 새 차를 보내 주어 사례하다 謝金藏大禪惠新茶’ 시에서 “기쁘게도 한 움큼 증갱차를 얻었네 喜得曾坑*一掬春”라는 시구가 나온다.)

이때 금장사 대선사는 천책스님에게 자기가 집필한 저술들과 함께 몽령차를 보냈고, 천책스님은 이에 감사하는 사례시를 남긴 것이다.

이제 천책스님이 ‘금장 대선사에게 드리다(寄金藏大禪師)’ 는 시 전문을 보도록 하자.

이제 천책의 ‘금장대선사에 드리다 寄金藏大禪師’의 시 전문을 보자.

 천책스님 영정

금장대선사에 드리다 寄金藏大禪師*

일찍 출가하여 석씨 성이 되었으며出家曾姓釋

나라를 복되게 한 것이 태공망과 한원씨 버금가네 福國合師軒*

일찍이 무의실*에 들어거 早入無衣室

마침내 향기로운 비단의 문을 열었네 終開郁錦門

할의 우레 소리는 두 귀를 놀라게 하고 喝雷驚聵二

법의 비는 어두운 두 귀에 맑은 물을 뿌리네 法雨洒昬二

도의 소리는 끈이 없이 전하며 道韻傳無極

쟁쟁한 소리는 만세에 드날리네 錚二萬世喧

(이상은 선사의 덕행을 기린 것이다 右讃先師德行)
*현존하는 《호산록》은 상책 12권이 빠진 채 하권 34권이 전하는데, 이 판본은 ‘대홍사본’과 ‘일기암본一技庵本’이 있다. 대홍사본에는 이 시에 ‘삼수오율(三首五律)’이라는 각주가 있는데, ‘선사의 덕행을 기린’ 이 시가 대홍사본에는 수록돼 있지 않다

*태공망 : 강태공(姜太公), 낚시꾼의 딴 이름. 주나라 태공망(일명 강태공)으로 전력과 지략이 뛰어나 주나라 건국의 주역이 된 인물

*무의실 : 무위자(無衣子) 실을 의미한다

 

붓끝은 삼매의* 바다요 筆端三昧海

비단 위에는 몇 번이나 꽃을 피웠다 錦上幾番花

찬란함은 가치를 다투며 전하고 燦爛爭傳價

진기함은 가난도 건널 수 있네 珍奇可濟貧

한 번 읊으니 재주는 한권을 이루고 一吟才畢軸

열 번을 휘몰아치니 다툼은 보자기에 숨네 十襲競藏巾

서법은 힘참을 더욱 높이고 書法更遒勁

철문*은 감히 손님을 기다리네 鐵門堪待賓

<이상은 대선사의 저술을 참미한 것이다 右大禪著述>

*삼매: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 심일경성이라 하여,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력.

*철문: 남조(南朝) 진(陳) 나라 때 지영선사(智永禪師)가 오흥(吳興)의 영흔사(永欣寺)에 갔는데, 글씨를 청해 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모여들어서 그의 문지방이 모두 닳아져 없어지므로, 쇠[鐵]로 문지방을 포장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소식(蘇軾,1037~1101, 소동파), '힐서부'(黠鼠賦)- "번쩍번쩍 벼락이 칠 때에도 껄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것이니(소동파)의 ‘증상주보은장로시贈常州報恩長老詩’에도 “憑師爲作鐵門限 準備人間請話人”이란 구절이 있다.

일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며 一心求佛敎

갖가지로 온갖 인정을 끊네 萬事斷人情

오히려 예와 지금을 알지 못하니 尙未通今古

어찌 무겁고 가벼움을 알 수 있는가 焉能辨重輕

알지 못함을 어리석게 여기나 평실*을 알고 慙非解苹實

어리석은 이를 미나리를 올리네 癡等獻芹莖

(열자에서는 미나리를 귀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列子云美芹黃

분수 넘치게 고귀한 저술을 열람하였다 分外覽高傳

기이함이여, 이름 할 수 없구나 奇哉不可名

<이상은 노승의 회포를 서술하였다 右叙老僧懷胞>

(본 시는 대홍사본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평실苹實 : 주나라 소왕이 강을 건널 때 한 말이나 되는 물건이 배에 부딪쳐 소옹이 이상히 여겨 공자에게 물었더니, “그것을 평실이다 오지 패자만이 먹을 수 있는 상서러운 열매다”다 하였다. 이후 감미로운 과실을 평실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금장선사의 저술을 이른다..

*열자 列子 : 기원전 4세기경), 중국 전국시대 도가(道家) 사상가. 노자, 장자와 함께 도가 3대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열자(列子)》 8권 8편이 남아 있다.

*열자…귀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列子云美芹黃 : 밭을 가는 농부가 미나리를 상납했다는 ‘야인헌근(野人獻芹)’말이 있는데, 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왕을 먼저 생각하는 충성심을 나타낼 때는 말로도 쓰인다. 《열자(列子)》 권卷 7 ‘양주편(楊朱篇’)에 나온다. 한 농부가 있었다. 미나리를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 마을에 사는 미나리를 바쳤다. 미나리를 맛 본 부자가 맛이 없다며 그것을 바친 농부를 비웃었다.

귀한 차는 몽령에서 이어지고 貴茗承蒙嶺 *

이름난 샘물은 혜산에서 길을 듯 하네 名泉汲惠山*

마귀를 물리치니 졸음이 가버리며 掃魔能却睡

손님을 맞아 다시 한가로워질 때 對客更圖閑

감로는 털구멍으로 스며들고 甘露津毛孔

(공산의 운제상인이 차를 베푼다고 함) 公山雲濟上人設茶云云 *

맑은 바람은 겨드랑이를 두드리네 淸風鼓腋閒

어찌 신령스런 약을 먹은 뒤라야 何須飮靈藥

동안에 머문다고 하는가 然後駐童顏

*몽령蒙嶺 : 중국 사천(四川) 몽정차(蒙頂茶)를 이른다. 몽정차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녹차(绿茶)이며, 산지는 차마고도의 출발점인 사천성四川省 아안시雅安市의 몽정산蒙顶山이다. 몽정차는 唐代부터 靑나라 때까지 황실에 진상되는 공차貢茶로 대접을 받았다.

당대唐代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차와 거문고琴茶’ 시에서 “칠현금 곡 중에서 녹수 하나 알아듣고/차 많아도 몽산차가 오래 친숙하네 琴裏知聞唯淥水 茶中故舊是蒙山”(녹수는 곡명曲名, ‘맑은 물’을 뜻하기도 한다) 라고 읊었을 정도였다.

* 혜산惠山 : 혜산천(惠山泉)을 가리킨다. 혜산은 혜산(慧山)으로 쓰기도 한다. 이 샘은 중국 강소성江蘇省 무석현(無錫縣 서쪽에, 제일 높은 봉우리에 섬처럼 생긴 위치에 혜산사惠山寺가 있고, 여기 샘물이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특히 육지에서 가장 맑아 천하 제2의 샘으로 불리운다. 이 혜산물로 차를 달이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대홍사본에는 각주가 없다.

편안하고 한가로움은 판각에 의지하고 安閑依板閣

고요하고 적막함은 솔 빗장을 잠갔네 寂寞閉松扄

낙엽은 붉은 숲을 떠나버리고 落葉辭林赤

아득한 산 봉우리는 푸른 바다를 건너네 遙岑度海靑

높은 난간은 어찌 저녁을 지나칠 것이며 高軒何晩過

아름다운 계절을 헛되이 보낼까 두렵네 佳節恐虛經

오랜만에 만남은 잠깐 즐길 뿐이지만 邂逅但行樂

산중에는 만남의 예도 고통도 없네 山中無禮刑

(서신에 가을에 방문하겠다는 말이 있기에 이렇게 썼다 書中有杖曉 垂訪之言故及此)*

<이와같이 암자를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右待訪庵>

*대홍사본에는 각주가 없다

 

진정국사 천책은 누구인가.

백련사(白蓮社) 2세 사주인 정명국사 천인 동문수학한 법형제로서 만덕산 백련사 제4세 사주(社主)가 되어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창도한 천태종의 대중불교 운동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국사의 지위에까지 오른 고승이었다.

천책은 그의 법명이고 자는 몽저(蒙且), 호는 내원당(內願堂)이며 속명은 신극정(申克貞)이다.

천인보다 1년 뒤인 고려 희종 2년(1206) 병인년에 태어났다.

23세 때(1228) 봄, 드디어 출가의 뜻을 실천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와 함께 국자감에서 공부하던 유생 둘이 당시 만덕산에 머물고 있는 고승 요세가 〈법화경〉으로 법회를 크게 열어 승속을 감화시키고 있던 만덕산 백련암에서 머리를 깎았고, 요세로부터 천책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 요세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성실하게 수행을 하며, 승속이 함께 모여 수행정진을 하는 백련결사 운동의 천인과 함께 주역이 된다.

1243년, 상주목사 최자가 공덕산(功德山)에 미면사(米麵寺)를 중수하고 천책을 주지로 초빙, 미면사를 중심으로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어 이곳은 동백련(東白蓮), 만덕산은 남백련(南白蓮)이라 부르게 되었다.

1245년에 요세가 입적하고 남백련의 사주(社主)는 천인이 계승하였다.

1248년에 천인이 백련사 주맹을 제자인 원환(圓晥)에게 맡기고 입적하였다. 하지만 원환은 무슨 이유인지 백련사를 오래 이끌어 가지 못하였고, 천책이 만덕산으로 돌아가 제4세 사주로서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시문집 《호산록(湖山錄)》《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3권을 썼고 《선문강요집(禪文剛要集)》 1권도 남겼다(이 둘은 다른 사람의 저술이라는 견해도 있다),

천책은 특히 문장력이며 시문이 뛰어나 후대까지 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동문선≫에는 석진정(釋眞靜-‘眞靜’은 ‘眞淨’의 오기)이라고 소개된 시 다섯 편이 실려 있다.

조선 후기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은 천책이 수행하였던 용혈암을 찾아가 천책을 생각하면서 그의 뛰어난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료를 모으고 자신이 감수한 〈만덕사지(萬德寺志)〉를 편찬하였으며 ‘題天頙國師詩卷’이라는 글을 썼다. 장약용은 그 서문에서 “고려 때까지의 시인 셋을 들라면, 최치원·천책·이규보를 들어야 한다”고 천책스님의 문학을 평가했다.

다음은 천책국사(天國師)의 시권(詩卷)에 대하여 정다산이 쓴 ‘題天頙國師詩卷’이란 글이다.

이것은 고려(高麗)의 명승(名僧)으로 진정국사(眞靜國師)의 호(號)를 받은 천책(天)의 시문(詩文) 유집(遺集)이다. 본래는 4권 2질(帙)이었으나 그 절반은 이웃 절의 수좌승(首座僧)*에게 도둑을 맞았다. 연담 유일(蓮潭有一)이 언젠가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얻지 못하였다. 내가 보기로는 천책(天)의 시는 감정이 넘치고 내용이 힘차서 승려의 담박한 병폐가 없다. 그의 학문은 해박하고 널리 통달하였으며, 그의 재주는 용사(用事)에 민첩하여 위로는 감산(憨山)*과 수레를 나란히 할 수 있고 아래로는 몽수(蒙叟)*와 어깨를 겨룰 수 있을 정도인데, 아깝게도 그 이름이 이미 없어졌다. 만약 예술가의 사화를 주도하는 자로 하여금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서 세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최치원(崔致遠)ㆍ천책(天)ㆍ이규보(李奎報)가 뽑힐 것이다.

내가《동문선(東文選)》을 보니, 천인(天因)의 시문(詩文)이 몇 편 실렸는데, 천인은 천책의 재전(再傳) 제자이다. 천책은 본래 만덕산(萬德山)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용혈(龍穴)에 옮겨 살았었다. 내가 다산(茶山)에 온 이후부터는 해마다 한 번씩 용혈에 놀러가는데, 천책을 생각하고 슬퍼하며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처럼 뛰어난 인물이 어찌하여 불교(佛敎)에 빠졌단 말인가. --題天頙國師詩卷 : 此高麗名僧天頙賜號眞靜國師者詩文遺集也本四卷二帙其半爲隣寺首座僧所竊蓮潭有一嘗欲鉤取之竟不得余觀天頙之詩濃麗蒼勁無蔬筍淡泊之病其學博洽該貫而其才敏於用事上之可以駢駕憨山下之可以拍肩蒙 叟惜乎名已泯矣若使操衝藝苑者揀三人於羅麗之世則崔致遠天頙李奎報其額也余觀東文選》,錄天因詩文數篇天因者天頙之再傳也天頙本萬德山人移棲龍穴余自棲茶山以來歲一游龍穴憶念天頙未嘗不嗟傷悼惜以若賢豪胡乃陷溺於佛敎也-다산시문집, 14, ,題天頙國師詩卷 /한국고전번역원|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2002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84

*수좌승(首座僧) : 수좌는 지덕(智德)이 높은 중에게 조정에서 주는 이름. 즉 국사(國師)의 존칭으로 우리나라는 신라(新羅)와 고려 때에 있었음.

*감산(憨山) : 명(明) 나라의 고승(高僧) 덕청(德淸)을 가리킴. 당시에 감산대사(憨山大師)라고 불렀음.

*몽수(蒙叟) : 청(淸) 나라 왕신(王宸)을 가리킨 듯함. 왕신은 ‘몽수’라는 호 이외에도 퇴관납자(退官衲子) 등 많은 호가 있는데, 왕신은 특히 시(詩)에 뛰어났음.

김선욱 본지 편집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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