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 ‘文林(10)’/고려 말 이색 등의 장흥시(4)
■문림의향 ‘文林(10)’/고려 말 이색 등의 장흥시(4)
  • 김선욱
  • 승인 2021.02.1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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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장흥서 유배 …詩 1편, ‘중령산황보성기’ 남겨

목은 이색, 장흥 詩文 총 4편… 장흥고문학에 큰 족적 남겼다
이색의 지인 정추(鄭樞), 김구용(金九容)도 장흥 시 1편식 남겼다

 

김선욱/ 본지 편집인, 시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말년에 이르러 장단(長湍 : 파주)으로 폄척(貶斥)되며 유배생활을 시작한 것은 1389년(창왕1) 12월이었다.

이듬해인 1390년(공민왕 1년) 4월에는 함창(咸昌 : 상주의 옛 지명)으로 폄척되었는데 5월에 청주(淸州)에 이르러 수재가 발생, 다시 장단으로 돌아갔다가 8월에 또 함창으로 폄척되었으며, 12월에야 용서를 받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계속되어 1391년 6월에 또 함창으로 폄척되었다가, 12월에 소환(召還)되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렇지만 다시 1392년 4월에 강(江: 한강) 밖으로 나가라는 왕의 분부로 금주(衿州 : 시흥시의 고려시대 지명)로 갔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 : 여주)으로 옮겼다.

迦智英公惠枳茶走筆奉謝-《목은시고, 제16권》

그리고 이해 7월에 고려의 패망과 조선이 건국되면서 장흥부(長興府-남벽사역南碧沙驛)로 유배(流配)되고, 그해 겨울 10월에 석방되어 한산(韓山 : 서천군 일대의 옛 지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395년(태조4) 11월 태조가 사자를 보내 공을 불러서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였고, 이듬 해인 1396년 5월 공의 나이 69세 나이로 지병으로 작고하였다.

이색의 장흥에서의 유배는 고작 3개월 정도에 불과했지만, 장흥 고문학사에서는 큰 변화를 주기에 족했다.

그의 장흥 유배와 무관해 보이는 정세운 관련의 시문 2편 외에도, 장흥 유배로 인하여 지었을 ‘가지산 영공이 차茶를 선사하였으므로 붓을 달려 받들어 사례하다 迦智英公惠枳茶走筆奉謝’(이 시의 주인공인 영공서사도 목은의 오랜 벗이었다)라는 시 한 편과 산문 ‘중령산황보성기 中寧山皇甫城記基’를 남겼기 때문이다.

또 그와 오랜 수하 동료요 벗이기도 했던 정추(鄭樞,1333〜1382)도 장흥 시문을 남겼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즉 목은의 오랜 벗이었던 김구용(金九容)도 장흥을 찾지는 않았지만, 장흥도호부 부사로 제수 받아 장흥부로 떠나는 길을 전송하는 시 한 편을 이 무렵에 남겼다.

이처럼 고려 말엽에 목은 당자를 비롯하여 목은과 인연이 깊었던 문인들에 의해 장흥시문학이 아연 활기를 띠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고, 그만큼 고려 말 장흥고문학에서 목은의 존재 가치는 크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제 고려 말 외지인의 의한 장흥 시문학을 고찰해 보자

①가지산(迦智山)의 영공(英公)이 차(茶)를 선사하였으므로, 붓을 달려 받들어 사례하다

迦智英公惠枳茶走筆奉謝( 《목은시고, 제16권, 詩》

천지간의 맑은 기운이 십분 온전하여라 / 乾坤淸氣十分全

노선사와 짝한 신령한 차를 부쳐주었네 / 寄向靈芽伴老禪

병 많은 동갑 친구 심신이 몹시 쇠약한지라 / 多病同庚昏耗甚

타심통이 있는 곳에 동정의 생각 보임일세 / 他心通*處示哀憐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1

-목은시고 제16권 / 시(詩)

*타심통(他心通) : 불교 용어인 타심지통(他心智通)의 준말. 다른 사람이 각각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두 자유자재로 헤아려 아는 불가사의한 심력(心力)을 말한다.

*가지산(迦智山)의 영공(英公) : 가지산은 구산 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던 보림사를 뜻한다. 보림사의 주석이었을 영공은 고려 말기 선승(禪僧)으로 이름은 찬영(粲英)이고 호는 고저(古樗)다(생몰은 미상).

당시 조계종의 고승으로 알려진 영공은 목은과 동갑 친구였다고 한다. 《고려사》 등 기록에 의하면, 그는 내원당 감주(內願堂監主) 판조계종사(判曹溪宗事)로 송월헌(松月軒)에서 거처하고 있었고, 공민왕이 한때 그를 왕사로 삼으려고 했으나,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璘)과 좌상시(左常侍) 윤소종(尹紹宗) 등이 반대하였다. 《고려사, 120권, 윤소종전尹紹宗傳》. 포은 정몽주마저 ‘그의 왕사 추대를 반대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고 기어이 영공을 왕사로 삼은 것으로 확인된다(포은 정몽주도 반대하였으나 임금이 한창 불교에 현혹되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더구나 기록에는 이미 찬영이 호인 고저공(古樗公)이 왕사 직분으로 나오기 때문이다.《포은집, 포은선생본전圃隱先生本傳》

목은의 영공의 시(迦智英公惠枳茶走筆奉謝) 말고도 목은이 영공에게 쓴 시 한편이 《목은 시고》에 출전되는데, 그 시제에서 당시 찬영의 직위와 거처며 그가 목은의 오랜 벗이었다고 적시되고 있다.《포은집, 포은선생본전圃隱先生本傳》.

▲定州途中 -《東文選》 卷之二十一/鄭樞

②정주도중定州途中

-정추(鄭樞 鄭樞, 1333〜1382)

정주관 밖에 풀은 어지러운데 / 定州*關外草萋萋

모래밭에 사람 없고 해는 기울려 하네 / 沙磧無人日向西

바다를 지나오는 비린 바람이 전사의 뼈에 불어 오는데 / 過海腥風吹戰骨

흰 느티나무 많은 곳에 말은 자주 울더라 / 白楡*多處馬頻嘶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東文選》 卷之二十一/七言絶句

*정주(定州) : 당시 장흥부가 있었던 관산을 가리킨다. 이전에는 정안현(定安縣)이었고, 장흥부로 승격된 이후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된 일이 있었는데, ‘정안현(定安縣)’의 ‘정자(定字)’와 ‘회주(懷州)’의 ‘주자(州字)’을 따 ‘정주(定州)로 불리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다음은 ‘장흥(長興)=정주(定州)에 관한 2건의 기록이다. … ① “장흥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오차현(烏次縣)이니 신라 때 오아(烏兒)로 고쳤고, 고려 때 정안(定安)으로 고쳤다가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고치고,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13년 계사년(1413년)에 관아를 수령(遂寧)으로 옮겼다. 정주(定州)ㆍ관산(冠山)이라고도 한다”《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 州와 郡, 長興》 ②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시켰고, 원종(元宗) 6년 을축(1265년)에 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1310년)에 다시 장흥부로 강등시켰다. 고려 말에 왜구(倭寇)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로 옮겼고, 본조(조선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壬申元年,1392년)에 성(城)을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쌓아서 부(府)의 치소(治所)로 삼았고, 태종(太宗) 13년 계사(1413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성이 좁다 하여 또 읍을 수령현의 옛터에 옮겨서 성을 쌓았다. 별호는 정주(定州) 【성종(成宗) 때 정한 것이다.】 또는 관산(冠山)이라고 한다”《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長興都護府》

*백유(白楡) : 껍질이 흰 느릅나무 또는 ‘별〔星〕의 이칭인데, 여기서는 흰 느티나무로 국역했지만, 다른 곳에선 별로 해석하기도 했다. 고악부(古樂府)의 농서행(隴西行)에 “하늘 위엔 무엇이 있는가, 가지런히 백유가 심어져 있네 天上何所有 歷歷種白楡”라고 하였다.

驪江*樓送李長興 -惕若齋 金九容

여강루에서 이 장흥도호부사를 전송하다

驪江*樓送李長興 -惕若齋 金九容

회주 남쪽 가는 길은 일천 여 리 懷州*南去千餘里

오늘 여강 누대에 비단자리 펼친다 今日江樓綺席開

여기서 소환할 날 응당 멀리 않으니 從此召還應末遠

반드시 매화 한 가지 꽂고 돌아오라 梅花필항목 一지來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惕若齋先生學吟集卷之上 通善郞晉陽大都護府判官兼勸農兵馬團練判官男明理編’詩

*여강驪江 : 여강은 여주시 신륵사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의 중류의 강. 이 시를 쓴 김구용(金九容)이 여강으로 귀양 와서 당(堂)을 짓고 육우당(六友堂)이라고 하였다. 육우(六友)는 강, 산, 눈, 달, 바람, 꽃을 이름한다. 이곳에 김구용의 친구였던 이색(李穡)이 지은 기문이 있고, 정추(鄭樞)도 부(賦)를 지었다. 여강루는 곧 육우당을 가르킨다.

*회주(懷州) : 장흥부(長興府)를 이른다.

*매화 : 매화가 상징하는 ‘굳은 기개, 지성’으로 고을 수령의 도리를 하고 오라는 당부.

고려 말 정추 시인-목은 이색과 절친이었다.

정추(鄭樞,1333〜1382).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권(公權), 호는 원재(圓齋)다. 조부는 판선공(辦繕公) 정책(鄭㥽)이고, 부친은 설곡(雪谷) 정포(鄭誧)이다. 정포는 충혜왕 때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지냈으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추의 가문은 문민으로 유명했다. 사서에 전해지길,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정씨가전(鄭氏家傳)’에서 ‘서원(西原)의 대성(大姓)’이라 하였다.…윗대에 대장군(大將軍) 정의(鄭顗)가 고려조(高麗朝)에서 충절로 드러났으며, 첨의찬성(僉議贊成) 정해(鄭瑎)로부터 청하군(淸河君) 정책(鄭㥽),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정포(鄭誧),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 정추(鄭樞)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에 이르기까지 문학(文學)으로 5대를 이어 왔다”-《기언, 제56권 속집, 유림, 寒岡先生文集 序》

인척인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의 죄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큰 고초를 당하였다. 신돈은 반대파 숙청을 위한 무고의 기회로 삼으려 거짓 자백을 강요했으나 정추는 폭압적 문초에도 굴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가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발탁되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가 1382년에 병사하였다. 문재로 이름이 있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한 당대의 명필이었다. 시문집인 《원재집(圓齋集)》을 남겼고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시 15편과 표전, 명(銘) 5편 등 20여 편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정추는 특히 목은 이색과 절친했다. 목은은 그의 사후 49재에 조의, 하며 그를 참하는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목은은, ‘보법사(報法寺)로 가서 원재(圓齋)의 사십구일재(四十九日齋)에 참석하다 赴圓齋七齋于報法寺’ : 세교도 원재를 끝으로 시들시들 世交零落到圓齋(세교는 보통 대대로 이어 오는 교분의 뜻. 여기에서는 세상 사람들과의 교분)/늘그막까지 유유해라 사불해였네 老境悠悠事不諧 (사불해事不諧: 후한 광무제가 과부가 된 누이 호양공주의 배필로 송홍(宋弘)을 속으로 지목하고는, “귀하게 되면 친구도 바꿀 수 있고, 부유해지면 아내도 바꿀 수 있다.[貴易交 富易妻]”라는 민간의 말을 인용하고 그의 의중을 슬며시 알아보려고 하였는데, 송홍이 “빈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되고, 어려움을 함께한 아내는 버려서는 안 된다.[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는 말을 들었다고 대답을 하자, 광무제가 공주를 돌아보면서 “일이 뜻대로 안 되었다.[事不諧矣]”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後漢書 卷26 宋弘列傳》) …이제는 그대가 죽었으니 허탈하기 그지없네)/적막한 성남의 끝이 없는 이 감회여 寂寞城南無限意/향불 한 가닥 푸른 산에 피어오르네 香煙一穟碧山崖 《목은시고, 제33권 詩》)

장흥 시 남긴 김구용-고려 말 저명한 문인

김구용(李穡 金九容,1338〜1384)은 고려후기 대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김제민(金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이다.

16세 때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고 이어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해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1375년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을 때,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데 대해 간언을 올렸다가 유배되었는데, 거처하는 곳에 육우당(六友堂)이라고 편액을 걸고는 시주(詩酒)로써 스스로 즐겼다.

1381년(우왕 7)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절제 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다.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다가 요동에서 체포되어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에서 병사하였다.

목은 이색(李穡)은 그의 시집 《급안시집》 발문에서 “지금 나는 경지(敬之)와 함께 성균관에 재직하고 있는데, 경지가 생도를 가르치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날마다 시집을 한 장씩 베껴 쓰면서 무더운 여름에도 그치지 않는 것을 매번 보고는 내가 더욱 중하게 여겼다. 及今與敬之同在成均。每見敬之授徒餘暇。輒屛靜處。日書一紙。豐暑弗輟。予益重之。蓋敬之生長外家。故知慕尤深。性喜文墨。故不怠如此。繕寫甫訖”-(《급암시집》, 급암시집 발문及菴詩集跋, 李穡)고 소개하고, 그의 시에 대해 “선생의 시는 담담한 듯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아름다운 듯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으며 주제를 세운 것이 진실로 원대하여 읽을수록 더욱 맛이 나니, 초연히 현묘한 시법을 깨달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그의 시가 후세에 전해질 것은 확실하다 先生詩似淡而非淺。似麗而非靡。措意良遠。愈讀愈有味。其亦超然妙悟之流歟。其傳也必矣。先生之外孫齊閔”-《급암시집》, 及菴詩集序, 李穡,

김구용은 사장(詞章)을 잘해,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김구용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문집으로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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