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우리마을/장흥읍 상리
■우리동네 우리마을/장흥읍 상리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8.1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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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조선조 벽사역 중심부 마을- 평야 넓어 부촌 많아
중소기업체 대한트랜스 김봉균회장, 장흥신문 전대표 신평근 고향
장흥의 전통 ‘버꾸농악’ 전승돼 와-풍물도구등 창고에 갇혀 있어
하늘에서 본 상리
하늘에서 본 상리

■위치 및 환경

2017년 말 상리의 주민은 56호에 117명(남63 여54)이다.

상리는 장흥군청 소재지로부터 2㎞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장흥읍 주변부의 대표적인 마을 중의 하나이다. 사자산에서 예양강(汭陽江) 쪽으로 뻗어 내린 낮은 구릉의 평야지에 위치하고 있다. 장흥읍에서 북동쪽으로 원도리- 관덕리-축내리를 지나 맨 북쪽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 바로 위에 조성된 바이오산단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마을 위로 해당리, 금산리 등의 제암산 기슭의 마을들과 이어져 장흥읍의 북동부 지역을 함께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조에는 원도리, 관덕리의 벽사역을 중심으로 벽사역 중심부에 형성된 마을이기도 했다.

상리는 탐진강변의 평지에 조성된 마을이지만 마을 주변으로 비옥한 옥토가 많아 예로부터 부촌이 많았다. 마을 바로 아래로 원도리와 관덕리에 벽사역과 찰방이 있었고 관덕리 바로 위쪽으로 형성된 축내리는 중리(中里)라고 했으므로, 중리 위쪽에 위치한다 하여 마을 이름이 ‘상리(上里)’라 불렀다.

마을 바로 아래에 관덕리와 경계에 등성이가 있었는데 그 등성이에 당집이 있었고 이로 인해 당집이 있는 등성이를 당등(堂)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마을의 연혁

상리마을 사람들
상리마을 사람들
상리마을 사람들
상리마을 사람들

상리는 1067년도(고려 문종21) 당시, 정부의 공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이던 역참(驛站)의 관아와 마방(馬房)있던 벽사역(碧沙驛)에서 지형적으로 위쪽에 위치하므로 벽사리(碧沙上里)라 하였다. 다만, 1457년도(조선 세조3)에 벽산역(碧山驛)이 벽사역(碧沙驛)으로 이름이 바뀌고, 찰방(察訪)이 집무하면서 전라좌도(全羅左道) 9개소의 역승(驛丞)을 관리하게 되어 보다 많은 역무를 수행하는 종사자 등이 늘어나게 되고, 특히 이 마을이 웅치면(熊峙面)과 회천면(會泉面) 등을 지나는 길목이 되면서 마을이 더욱 성장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른 것으로 여겨지며, 상리라는 마을이름은 1789년에 작성한 호구총수(戶口總數)의 부동면 편에서 보이고 있다.

1910년에 발간된 장흥읍지(庚戌誌)에 의하면 상리(上里)는 부동면(府東面)에 속하였고 김해 김(金), 천안 전(全), 온양 방(方)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어떤 연유로 이곳이 형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상리는 현재 3개 반(113~170번지, 땅등, 샘깨)이 운영되고 있다.

■마을의 자랑

▲마을 주민 위안경로잔치가 열린 2010년 5월 8일, 재경향우들이 고향을 찾아왔다.
▲마을 주민 위안경로잔치가 열린 2010년 5월 8일, 재경향우들이 고향을 찾아왔다.

1980∼1990년경에 장흥을 대표하는 버꾸농악이 상리에서 재현되어 왔다.

상쇠인 고(故) 이사권씨가 중심이 되어 이 마을 풍물패를 이끌었으며, 연연히 전승되어 오며 장흥읍 주요행사 때마다 시연팀으로 참가했다. 현재는 김주호씨가 상쇠를 맏고 있지만 풍물놀이는 하지 않으며 현재 풍물도구들은 마을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2000년 11월에 마을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마을회관이 건립되었다. 이 사업을 위해 주민들이 1천5백만원을 성금을 모았고, 장흥군으로부터 3천만원을 지원받아 68평 규모의 마을회관이 건립할 수 있었다.

2003년에는 상리가 민방위 마을로 선정되었으며 8월에 경로잔치 때 서울 향우 35명이 참석했다.

2004년 8월에는 오전 9시에 방영되는 ‘까치가 울면’ 프로에 마을 주민 전체가 출연, 방송되기도 했다.(장흥 동초등학교에서 촬영)

이후 장흥군으로부터 퇴비증산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포상금 5백만원을 하사받기도 했다.

마을의 교육을 담당하는 서당이 1950년대까지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신교육의 발달로 서당이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폐쇄되었고, 방학동안에만 학생들을 대상으로 노인회관에서 명심보감, 천자문 등을 가르쳤다. 당시 선생은 축내 거주하는 분과 상리의 김병규 선생이 봉사를 하였다.

■마을의 조직

마을의 조직으로는 개발위원회, 새마을 지도자회, 부녀회, 노인회등이 조직되어 있다

개방위원회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마을 발전을 위한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하여 조직된 행정적 조직체로서 위원장은 마을 총회에서 선임(임기 2년)했으며 이장, 총무, 감사를 포함하여 7명을 회장단으로 구성했다. 위원장은 김갑성, 정동철, 조동렬, 김경수, 김성자, 방문기에 이어 현재는 김갑성이 역임 중이다.

새마을 지도자회 역시 마을 총회에서 회장을 선출했는데 현 회장은 방문기다.

부녀회는 예년에는 부녀자 전원이 회원이 되었으나, 최근들어 고형화로 인해 활동할 수 있는 부녀자들이 감소되면서 43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 회장은 박옥련이다.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자동 회원으로 가입되는 노인회는 그동안 남녀 통합 노인회로 운영되었는데 현재 남자 회원은 17명, 여자회원은 26명이고 회장은 윤연휘, 총무는 정동기다.

이밖에 민간 조직체로서 대동계와 마을총회가 있다. 대동계는 1919년에 조직된 가장 전통있는 모임으로 마을 주민 전체가 회원으로 참여했다. 해마다 1월 1일(양력)에 대동회는 마을회관에서 개최되며 마을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을 협의 결정하는 마을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현재 회장은 김갑성이다.

마을 총회는 매년 12월 30일에 개최되며, 전주민이 참여하고 개발위원장이 의장이 되는데 1년 동안 대소사에 대한 감사를 거쳐 마을 주민에게 그 결과를 보고한다. 또 차년도 개발위원장, 이장, 노인회장 등 임원을 선출하고 차년도 인건비, 농기계 사용료 등을 결정한다. 총회 경비는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상포계도 운영되어 나왔다. 상포계 역시 마을 전체 주민이 계원이 되며 상포 운영에 관한 일을 운영하는데 청년들은 운상을 책임지고 장년 및 노인 계원들은 산일을 맡으며 여자 계원들은 음식을 준비하는 데 참여한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장례가 장례식장에서 치러지게 되면서, 상포계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개발사

1970년대에 마을 앞에서 금성 등 북쪽으로 오르는 1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으나, 바이오산단 조성으로 산단 진입도로로서 기능을 위해 2015년 마을 앞에서 바이오산단까지 2차선 도로로 확포장 공사가 추진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개발 사업으로 초가집에서 지붕은 기와, 슬래트 양철 지붕으로 개량되거나 슬라브조 벽돌집으로 개량 신축되었으며, 최근 들어 스래트 및 철조기와 등으로 개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난방은 1970년 까지는 전 주민이 땔감으로 난방 해결을 하였다. 이때 땔감은 주로 제암산 영골재나 탁골재 등에서 확보하였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연탄으로 난방을 대용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부터는 연탄, 화목, 석유 보일러 등으로 교체하였고, 일부 가옥에서는 태양광이나 태양열 온수 시스템을 설치해 사용해오고 있다.

식수의 경우도 그동안 마을의 각 3개 반마다 식수를 제공하는 공동 우물이 있었지만, 점차 작두샘이나 각 가정마다 지하수 개발로 식수로 사용해 오다가 2012년에 광역상수도가 보급되면서 각 가정마다 식수가 공급되었다.

주택의 경우, 1970년도에 초가집의 지붕을 함석, 스레트 등으로 대부분 개량하였고, 1980년 도에 들어서며 시멘트 기와지붕으로 개량되었고 1990년도에 들어서며 슬라브 집이나 콘크리트집이 개축 및 신축되고 있다.

가로등은 1990년도에 마을 앞 도로변이나 주요 골목에 모든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마을의 전기시설은 1971년에 마을 전 가구에 보급되었다.

통신수단인 전화는 1977년에 일부 가정에 보급 되어 오다가 1990년도에 거의 전체 가구에 보급되었다.

마을에서 읍네로 오가는 버스는 하루 5회 운행되고 있다.

■마을의 주요 인물

▶김봉균(1940~)=1972년 서울에 (주)대한트랜스의 전신인 대한전기공업사를 창업하였고, 2000년 12월에 ㈜대한트랜스라는 법인으로 전환하여 국내에서 가장 큰 네온 트랜스 제조업체로 기업을 육성했다. 2017년 말 대한트랜스의 시장 점유율은 약 60%로, 매출도 약 250억원에 이르고 있다. 2003년 한국전기제품안전진흥원 이사장 및 한국전자파연구원 이사장, 2005년 한국전기 제품안전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김봉균의 고향사랑도 남달라, 재경장흥중고동문회장, 재경장흥읍민회장, 재경장흥군향우회장, 장흥관광추진위원장(고향사랑 벚꽃헌수운동), 장흥중고장학재단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신정식외 외 신평근 ‧ 신명희=신정식(1924~1999)은 상리 224-1번지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때 강제 징집, 해방되기 1년 전에 만주 관동대부대에 배속되어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바로 광복이 되어 귀국, 경찰관으로 복무하였다. 여순 반란 때 지리산 토벌작전에 참여하였으며 구례, 강진, 광주, 장흥경찰서에서 33년간 복무하였다. 정보과 형사 복무 중 간첩검거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경찰 퇴직 후, 조모(송유님), 부모(신채규, 김본심)의 2대에 걸친 효자・효부상에 이어, 신정식 부부(부인 엄공순)도 86세 부친 99세 모친 봉양으로 효자・효부상을 받아, 신정식 가문은 3대에 걸쳐 ‘효도가문’이 되었다.

신정식의 장남인 신평근(1945~)은 1992년 장흥지역의 최초 지역신문인 장흥신문사 설립에 산파역을 맡으며 초대 편집인 겸 주간을 역임하였으며, 1993~1997년 장흥신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신정식의 3녀인 신명희(1953~)는 서울 숭의여자대학교 졸업 후 도미, 미국에서 회계사 자격을 취득했다. 특히 신명희 남편은 패트릭 히키는 네바다 주 하원의원(3선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네바다주 정부와 한국정부간의 자매결연을 주도하고 있으며 미국 서부지역 한국 교민의 많은 민원을 해결해 주는 ‘한국 열혈 지지자’로 한국 정부로부터 명예 영사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역대 이장

△1963. 1. 1 마천수 △1963. 1. 29 김재식 △1967. 1. 18 김영호 △1968. 2. 1 윤연휘

△1971. 1. 2 윤연휘 △1974. 1. 1 신정식 △1976. 1. 1 윤연휘 △1979. 2. 1 고문평 △1982. 3. 1 김영호 △1985. 4. 23 김재식 △1996. 1. 26 서강열 △1996. 4. 26 김재식 △1999. 1. 22 김갑성 △2013. 1. 24 김종주

▶새마을 지도자

△1990. 1. 2 윤연휘 △2003. 3 김경수 △2007. 4 김갑성 △2017. 1. 1 방문기

▶기타 인물들

△김두용 : 대전교도소 교정감

△김광철 : 변호사

△김종주 : 장흥군이장연합회 회장 역임

상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사라져버린 새정박, 울창한 팽나무로 둘러쳐진 사장거리를 그리워 하고 있다. 선조들은 특히 이곳을 수호신으로 받들며 넘치는 온정과 순박한 마음으로 살았다. 다른 마을에 비해 마을 자산도 풍부했고 많은 주민들이 풍류를 알아 명절이면 다채로운 풍물과 풍속을 즐기며 한마음이 되곤 하였다. 장흥전통의 버꾸농악이 전승되어오기도 했었다. 이제 많은 주민들이 고령으로 마을이 활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한 마음이 되어 주어진 세파와 환경에 잘 순응하며 상리 마을이 우리 아들딸의 영원한 고향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고향을 지켜나가고 있다.

글 김선욱/ 사진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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