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칠거리 연가
■특별기고 -칠거리 연가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02.2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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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실 시인

김복실/시인, 문협 장흥지회장, 전남도의원

장흥 사람들은 칠거리를 모르면 자응 사람이 아니다.

동교다리를 중심으로 시곗바늘 방향으로 세기 시작하여 읍사무소 옆 신흥 가는 길까지 일곱 개의 길이 있어 이름하여 칠거리라고 불러왔다.

첫 번째길 하천 둑은 금성여객, 장흥여객, 광성여객 등의 차부에는 버스들이 시동 걸린 채 기름땀을 흘리고 털 털털 소리 내며 손님 태우느라 멈춰있고, 손님들은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먼저 올라가 자리 잡으려 아우성이고 젊은이는 유리창으로 짐 보따리를 의자에 던져 자리 잡은 약삭빠른 이도 있었다.

복잡한 틈새에 끼어 “고모가 사면 고무줄 이모가 사면 이모줄 바늘 실도 있어요.” 익살스러운 그 머스마는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을까.

“부산, 유치, 동창, 영산포, 나주, 광주 출발합니다” 악을 쓰는 차장 아가씨, 하얀 장갑에 호루라기 입에 물고 교통 신호를 하는 순경 아저씨의 열띤 몸동작에 자동차는 지킬지 몰라도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질서 속에 질서 있는 칠거리는 항상 북적거려도 사고 없이 잘 돌아갔다.

차부 첫 번째 집 담배 가게는 장흥에서 제일 비싼 땅값이라 소문났었고, 칠거리 주변 가게는 명당이라고 다들 들먹거렸었지. 그분들은 지금도 어디서 다 잘 살고 계실까. 이층 건물 이였던 문화원을 지나 어물전 가는 길에 호수목욕탕이 있었다. 대중탕보다 가족탕이 있어서 가족끼리 함께 가노라면 애기들 씻기고 때가 둥둥 떠 있는 따슨물, 어차피 버릴 물이 아까워 빨래까지 하고 나오면 어찌나 오지던지 참 알뜰하게도 살았다고나 해야 할까.

하천부지에 판자촌 슬레이트 지붕이 늘어선 어물전 머리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많았고 장날이면 바다에서 갓 잡아 온 모든 것을 파는 곳, 생선 냄새 진동해도 배고프지 않으면 살만하다던 순박한 사람들, 지금 다 철거됐는데 어디로 다 떠났을까. 장꾼들을 맞이하는 은주장, 영암여인숙, 선술집들이 즐비했던 곳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그동안 소식 궁금했던 일가친척 만남의 장이었다.

두 번째길 잡화 평화상회, 화신상회와 서울상회 포목집은 결혼 혼숫감 이불 등이 인기였었다. 중국집 잡화상회는 없는 것이 없었고 송화식당 짜장면은 맛도 못 보던 어린 시절 탕수육 한번 먹어보기 로망이었다. 고무신집, 구둣방, 드레스미싱집, 가구점, 대창상회, 옷 점방들 양동시장처럼 생동감 넘쳤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세 번째길 광명당에서 결혼패물, 자응 사람들은 거의 했을 듯싶고 학생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문방구 형제상회, 신사복 맞춤집 화신라사, 대흥라사, 광성라사와 운성라사는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성복 맞춤집 교복도 만들던 미모사 언니는 어디서 살고 계실까.

큰 도매상점 이었던 흥성상회, 금강상회, 범미상회 가계는 1975년 장흥 대형 슈퍼마켓이 생기고 소비문화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구멍가게 이름이 너도나도 슈퍼마켓이 유행처럼 번져갔다. 그 길은 강진으로 가는 찻길까지 복잡한 금남로 같은 길이었다.

남흥식당 곰탕집은 배고픈 사람, 냄새 한 모금에 시장기를 달래보려 군침만 삼키다가 먹고 싶어 환장 병만 났다. 법원 검찰 상류 급 공무원 드나드는 신덕관, 다래식당, 한식집 솜씨 좋던 아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홍제의원, 남인의원, 십자의원, 재중의원, 호생의원이 있었지만, 머리 터지면 된장 바르고 감기 걸리면 고춧가루 소주에 타 먹고 웬만하면 참아버리고 병원 찾는 일 별로 없이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 어느 날 칼부림 나게 싸워 피를 너무 많이 흘러 수술 중 피가 부족하다며 O형 피를 가진 자는 병원으로 빨리 와 달라는 앰프 방송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절, 소파수술하고 마취 덜 깬 모습으로 차 놓칠까 봐 비틀거린 모습으로 나오는 아낙네들. 가난에 허덕거리며 살다가 못 먹어 폐병까지 앓던 아제는 병원에 한번 못가보고 결국 세상을 떠났던 그 시절 한 많은 세상 살았던 사람들 지금은 모두 고인 됐겠지.

네 번째길 커브길 대동상회 큰 전방에는 갖고 싶은 것 많이 진열되어있어 부러웠던 그 집 딸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길 건너 이층 다리다방, 정원다방에서는 커피에 달걀노른자 동동 띄워 모닝커피 배달했던 마담, 레지들은 어디서 둥지 틀고 살고 있을까. 부레옥에서 만든 아이스케끼를 나무 상자 담요 속에 넣어 짊어지고 동네마다 악을 쓰며 땀을 뻘뻘 흘리며 팔고 다녔던 까까머리 애들도 지금쯤 할아버지 되었을 것이고, 중앙양장점, 월평양장점은 장흥에서 상류층들이나 드나들며 멋쟁이 소리 듣던 여인네들은 꼬부랑 할머니쯤 됐을 것 같은데 모두 어디에 살고 계실까.

농협, 조흥은행 직원들은 남의 돈 만져도 흐뭇했을 것 같아 부러움의 대상 이였던 사람들, 이제는 초고령이 됐을 터, 다들 잘살고 있을까. 장흥중학교 학생 이 천명이 훌쩍 넘은 시절에 장흥극장 애로영화 벽보를 보고 몰래 극장 갔다가 무섭기로 소문난 정00 체육 선생님께 들켜 혼줄 났던 학생들은 시집 장가 잘 가서 모두 어디서 살고 있을까.

중앙교회 유치원 다녔던 아이들은 그 시절 부잣집 아이들이나 다녔었는데 다들 공부 잘하여 훌륭한 사람 되었을까. 경찰서 밑에 화평여관, 중앙여관은 6개 군 (장흥, 강진, 해남, 완도, 진도, 영암) 관할 법원, 검찰청이 장흥에 있어서 완도, 진도 도서 지방 사람들은 배 타고 버스 타고 와 검찰 법원일 보고, 또는 유치장 면회 왔다가 하룻밤 묵고 가는 곳이기도 했었지요, 경찰서 밑에 자잘한 구멍가게는 팥 앙꼬 찐빵 장사가 수두룩했었다, 배고픈 시절 면회 갈 때 간식으로 넣어주기 푸짐한 것으로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

경찰서 유치장에 미결 죄수들은 별 아별 사람 다 있었다. 간통죄, 살인미수, 도둑질 등등 노름 안 하겠다고 손가락 자른 사람이 그 손으로 또 노름해서 들어왔다고 안타까워했었지. 죄수들은 먹고 남은 빵으로 주물럭주물럭 짓이겨 기막히게 잘 만든 수공예 작품을 간수들 통해 세상 밖에 보여 주었던 것들이 생각난다.

방석집이라 부르는 산호정, 남산관 요정에서는 따끈한 정종 한 주전자에 안주까지 포함 터무니없는 가격이어도 장사가 잘됐던 이유가 무엇 이였을까요.

억울한 사람 사바사바해서 풀어주겠다던 소문난 브로커들, 지금은 다 고인이 되고 말았죠. 돈 많은 사람은 유죄도 무죄가 되고 가난해서 억울한 사람 많았었지요,

미장원에서는 난로 연탄구멍에 고대기를 넣어 적당히 달궈 머리를 손질해 주던 미용사가 직장 다니는 여직원 또는 부잣집 마나님들 머리 손질해주고 중간에 공짜로 샤기 해 주기도 했었지요, 일주일 만에 머리 감았던 그 시절, 이제야 생각하면 얼마나 머리가 가려웠을까 싶지만, 그 시절엔 일 년에 여름을 제외하고는 설 명절, 추석에만 목욕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겠다 싶다.

다섯 번째 기양리 골목 호남여인숙과 35번 막걸리 주조장을 아시나요? 짐빨이 자전거 나무판자 받침대에 막걸리 1말짜리 4통 싣고 양쪽 한 통씩 두통 걸어 마을마다 운반하시던 눈 큰 아저씨 무릎 괜찮았는지 안부가 묻고 싶어진다.

읍사무소 앞 빨간 불자동차는 소방서의 상징 이었다. 서부파출소와 읍사무소 사이 여섯 번째 길은 호생병원을 지나 수퉁거리를 쭈~욱 가노라면 박림쏘 보트장이 있었다. 연애하는 처녀·총각 노 젖던 모습이 생생하다. 내가 의회에 있을 때 보트장 복원하면 토요시장 관광객들을 물 과학관으로 이동하여 놀 거리 충족시킬 것이라 주장했지만 집행부는 귓등으로 듣고 변명만 했던 일이 지금도 아쉬움만 남아 있다.

일곱 번째 길, 지금의 무지개다리 동교다리는 한번 건너려면 어찌 그렇게도 추웠던지 귓 볼은 빨개지고 맑은 콧물이 저절로 흘러 짭조름한 콧물이 입에 들어오면 소매로 쓱 문질러 닦았던 기억에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검으티티한 때가 낀 손등은 얼어 갈라져 피가 나는 애들도 많았다. 엄니는 소죽 쑤던 머슴에게 소죽 한 바가지 떠오게 하더니만 내 손을 간혹 닦아 주시던 터라 내 손은 매끄러웠던 기억에 이제야 뒤돌아보니 나는 그래도 괜찮게 살았었구나! 생각된다.

다리 밑에 돌집으로 지어진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삶은 달걀 얻어먹던 전도관도 사라지고 4차선 강변로가 생기면서 주민들은 그곳을 떠나 지금의 건산7구 취락구조 마을로 이테리식 양옥 건물로 변신하였다. 다리 건너 삼거리 문화소리사 에서 흘러나온 이름 모른 흥겨운 팝송을 듣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사춘기 시절 추위를 잊을 수 있었던 기억도 추억거리다. 모두가 바뀌고 살아 졌지만 아직도 고려상회 문방구점과 문화당 책방은 아직도 2~3세대가 경영하고 있어 역사적인 건물이라 장흥의 자랑거리다.

1966년 인구 144,543명으로 가장 많았던 시절 칠거리 차부가 좁아서 1979년 현재 터미널로 옮겨져 동교통 한들 논이였던 곳이 장흥 중심 시가지로 변해 가면서 양동시장, 금남로, 충장로 못지않게 북적거렸던 칠거리는 김빠진 맥주처럼 집값 하락과 세 들어 사는 장사꾼들이 터미널 근처로 옮겨 가는 이중고를 겪었고 점점 인구감소로 고즈넉해진 칠거리는 간혹 읍사무소 볼 일 있는 사람만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우시장 이였던 토요시장 때문에 서부가 되살아 났다지만, 중간다리 예양교가 생긴 바람에 유동인구가 7거리를 지나지 않음으로 여전히 7거리는 한산할 뿐이다.

현재 인구 약 38,000명가량으로 줄었으니 갈수록 전남이 머지않아 가장 먼저 소멸 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어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요즘 도시재생사업으로 칠거리를 살려 보겠다고 준비 중이라는데 귀추가 주목된다.

코로나19 때문에 의정 활동도 줄어 방콕하면서 뒤돌아본 칠거리의 옛 추억을 더듬어봤다. 코로나19 없는 청정 지역은 장흥과 인천시 옹진군이라고 전국 방송에 나온 후 군수는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 달라며 마을 방송하고 군민들은 코로나19 장흥 1번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터지고 말았다 전남 798번이 장흥 1번으로 확진자가 생겨 전남 806, 807, 813,번 3명으로 번져 나갔다. 더 이상 확산 하지 않도록 간절하게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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