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2 / 서남해 지역의 중심고을 ‘장흥(長興)’
역사산책2 / 서남해 지역의 중심고을 ‘장흥(長興)’
  • 전남진 장흥
  • 승인 2018.06.08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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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梁基洙/장흥향토사연구회장

양기수 향토사학자
양기수 향토사학자

 

장흥군의 위치를 지정학적으로 보면 한반도의 서남해 중심에 위치한다. 그런데다 산과 들과 바다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역을 경계하는 형태가 마치 황소의 뒷다리 형태이기 때문에 어느 풍수가는 ‘그 어느 고장보다도 굳건하고 풍족한 고장’이라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농경을 중심으로 하던 불과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장흥군의 수장(首長)은 한반도의 서남해안의 중심고을로 국가를 보위하고 주민안위를 살펴왔었다. 이렇듯 장흥군이 한반도 서남해의 중심고을로서의 본격적인 역할을 시작한 때는 고려시대부터이다.

백제시대의 현재 장흥군 영역에는 오차현(烏次縣),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계천현(季川縣), 마사량현(馬斯良縣)으로 당시 4개현이 위치하였다. 이 4개현은 신라 경덕왕(景德王)대에 오차현은 오아현(烏兒縣)으로 고마미지현은 마읍현(馬邑縣)으로 계천현은 계수현(季水縣)으로 그리고 마사량현은 대로현(代勞縣)으로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에 속하였다. 이는 다시 고려시대에 이르러 오아현은 정안현(定安縣)으로, 마읍현은 수령현(遂寧縣)으로, 계수현은 장택현(長澤縣)으로 대로현은 회령현(會寧縣)이 되었다.

이렇게 변천을 거듭해 온 고을들이 현재 이름인 장흥(長興)이라는 고을이 된 시기는 고려 인종(仁宗) 때로 인종비(仁宗妃)인 공예태후(恭睿太后)에 의해 얻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장흥이라는 고을의 이름을 얻게 된 상황을 살펴보자. 고려의 인종은 1122년 이자겸(李資謙)에게 옹립되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최사전(崔思全)과 척준경(拓俊京) 등을 시켜 난을 평정한 후 이자겸을 귀양 보냈고, 이자겸의 딸이자 왕비인 두 왕비(이자겸의 셋째와 넷째 딸)를 폐출(廢出)하였다. 당시 궁중의(宮中醫)이자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최사전(崔思全; 탐진 최씨 시조)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정안후(定安侯)에 봉하여진 임원후(任元厚)의 딸이자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인 공예태후(恭睿太后)를 비(妃)로 천거하였다.

공예태후는 1126년(인종4) 18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불리면서 인종의 총애를 받아 1127년(인종5) 4월에 장남인 의종(毅宗; 晛)을 출산하였다. 1129년(인종 7) 5월에 공예태후가 다시 회임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는지 인종은 직접 연덕궁을 방문하여 공예태후를 왕비로 책봉하였고, 1130년(인종 8)에는 둘째 아들인 대녕후 경(大寧侯 璟)을, 다음해 10월 17일에는 명종(明宗; 晧)을 낳았다. 이후 원경국사(元敬國師) 충희(沖曦)를, 1144년(인종 22)에 신종(神宗: 旼)을 출산하여 5형제와 승경(承慶)·덕녕(德寧)·창락(昌樂)·영화(永和) 등 4명의 공주(公主)를 낳았다.

이에 인종은 공예태후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공예태후의 고향인 정안현(定安縣)을 ‘길이 번창하라’는 의미의 ‘장흥(長興)’이라는 이름을 내려 장흥부(長興府)로 승격하였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보이나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한 기록에 정확히 장흥부의 승격년도가 기록되지 않았으나 고려사 공예태후 열전편의 기록을 보면, 공예태후가 둘째 아들인 대령후(大寧侯)를 낳자 인종이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리는 내용을 보면 .

“그대는 천부의 자질을 지니고 존귀한 왕비의 자리에 있으면서 짐의 좋은 짝으로 즐겨 내조의 공을 세웠고,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는 일을 자신의 직분으로 삼았다. 곧 득남의 상서에 부응하여 아들을 낳는 경사를 맞았으니 짐은 크게 경탄하고 가상히 여겨 넉넉한 은혜와 예우를 베푸노라.” 하였다.

이로보아 장흥부의 승격은 1130년(인종 8)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이후 장흥부는 회령(會寧), 수령(遂寧), 장택(長澤), 탐진(耽津; 현 강진군 강진읍) 4개의 현(縣)과 한때 두원현(荳原縣; 현 고흥군 두원면)과 도양부곡(道陽部曲; 현 고흥군 도양면)을 속현으로 관리하여 왔다.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 관리해왔다.

고을 이름이 장흥이라 바뀐 장흥부(長興府)는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라는 직책으로 중앙관리가 내려와 행정을 관리하게 되는 변화를 갖게 된다.

정안사에 봉안된 공예태후 영정
정안사에 봉안된 공예태후 영정

 

당시 지금의 장흥군 영역이었던 정안현(定安縣; 현 관산,대덕)이나 장택현(長澤縣; 현 장평,노동)은 보성(寶城)의 속현(屬縣)이었고, 회령현(會寧縣; 현 안양,회천)이나 수령현(遂寧縣; 현 장흥,부산,유치)의 경우는 영암(靈巖)의 속현으로 중앙의 관리(官吏)가 현(縣)에 주재하여 관리하지 않고, 지역의 토착 가문(土豪)이 대를 이어 관리하여 왔다. 이토록 지역 행정을 관리하는 토착인을 향리(鄕吏)라 하고 그 향리의 수장을 호장(戶長)이라 하였다. 그들은 군사와 재정이라는 행정의 중심체계가 향리조직 안에 마련되어 상하 서열이 있었고 업무도 분담하여 처리하였다. 오늘날 군청이나 면사무소와 같은 기관을 주·군·현(州·郡·縣)에 따라 주사(州司), 군사(郡司), 현사(縣司) 등으로 불렀다.

호장(戶長)의 일반적인 직무는 호구장적(戶口帳籍)의 관장, 전조(田租) 및 공물(貢物; 중앙 관서와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여러 군·현에 부과, 상납하게 했던 물품)의 징수 상납, 역역(力役; 노동력)을 동원하는 일 등을 수행하였다. 그 밖에 군사적 기반과 전투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궁과(弓科) 시험을 거쳐 주현일품군(州縣一品軍)의 별장(別長)에 임명되어, 지방 군사조직의 장교로서 지역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향리가 맡아오던 장흥지역이 장흥부(府)로 승격되어 지부사(知府事)라는 명칭의 수령 1명, 차관 1명, 판관(判官) 1명, 법조(法曹) 1명을 포함한 4~5명이 파견되어 업무를 담당하고 그 아래에 지방관인 지부사를 도와 행정 실무 처리를 향리층(鄕吏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 초기에 고려 정부에서 지방 세력을 인정했으므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은 속현이 많았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왕권이 그들보다 우위에 있으려면 그들을 감시하는 세력이 필요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각 도에 지금의 도지사와 같은 감사 혹은 안찰사(조선시대에는 관찰사라 했다)라는 직책의 지방관을 조정에서 파견하여 여러 부·목·군·현의 상태를 감찰하게 하였다. 지방관은 부·목·군·현의 체계로 되어 있고, 부사, 목사, 군수, 현령 이란 직책의 수령이 각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오늘날처럼 군 안에 여러 현(縣)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군(郡)이 있으면 그 옆에 현(縣)이 있는 형태로 하였다. 때문에 장흥에 지방관의 파견으로 장흥에서 인근 속현까지 관장하여 다스리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정의 중심고을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도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 모든 군현이 도 관찰사를 통하여 정부의 지시를 받고 보고하며, 도로부터 업무 감찰을 받도록 일원화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교통과 숙박이 불편하여 노비 변정(辨正 : 어떤 사실이나 대목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바로잡음) 사업, 진휼(賑恤 : 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린 자 혹은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자 등의 구제), 지방에서 치르는 감시(監試 :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시험 : 소과), 의녀 양성과 선발 같은 것을 관찰사가 근무하는 감영(監營) 소재지에서 처리할 경우 왕래와 관리가 불편하여 지방간의 불평 등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지방적인 특성과 관련되어 과거 시험, 학교, 인재 선발, 진휼, 지방 제사, 공물, 진헌물의 조달이나 제조, 사신 접대, 양전(量田 : 농지를 조사·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 등에서 계수관(界首官)이 이 분야의 정사(政事)를 주관하거나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계수관(界首官)은 흉년으로 공물(貢物)의 진상(進上), 신년의 표문(表文; 임금에게 올리던 문서)과 하례(賀禮) 등을 정지할 때는 일반 군현을 면제하고 계수관에서만 시행하게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계수관은 군사 제도로서 각 도의 습사(習射 : 활쏘기를 익힘), 취재(取才 : 하급관리의 등용), 검열(檢閱 : 군사상 기강, 교육, 근무, 작전 및 장비의 상태 따위를 점검), 도시(都試 : 무사를 선발하는 특별시험), 군사훈련, 화약 제조, 무기 제조, 군기 조달 등은 감영(監營) 단위로 시행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계수관 단위로 시행되었다. 때문에 민사 행정상으로 각 군현은 상하 관계가 아니었으나 지방의 군사조직(鎭管)이 계수관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군사행정에서는 상하 관계가 설정되었다. 지방의 군사조직 체제가 철폐된 후기에도 속오군을 관리하는 군사행정 단위로 사용되어 계수관이 중간 행정 단위로서도 기능하였다.

이러한 계수관(界首官)을 1430년(세종12)에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맡게 되어 장흥부사는 계수관으로서 당시 2도호부(都護府: 담양․순천), 3군(郡: 무진․보성․낙안), 7현(縣: 고흥․능성․화순․동복․옥과․진원․창평)을 관장하였다.

한편 1457년(세조3) 군제(軍制)를 정비하면서 전라도의 수군 편제를 좌·우 절도사영에 있는 수군절도사인 수사(水使,정3품)의 휘하에 수사를 보좌하는 본영의 우후(虞侯,정4품)와 직접 수군을 통솔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인 첨사(僉使,종3품)가 있고 그 다음으로 각 포구의 만호(萬戶,종4품)가 배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편제에 의하여 장흥부사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임하면서 관할영역이 시대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진도군, 강진현, 해남현을 관할하였는가 하면, 회령포 만호진(會寧浦 萬戶鎭)외에 해남 3개소, 완도 2개소, 강진 1개소, 고흥의 3개소를 관장하였기도 하였다.

이러함으로 인해 1555년(명종10) 5월에 침입한 이른바 을묘왜변(乙卯倭變)으로 왜구가 지금의 해남군인 영암의 달량포(達梁浦)에 침입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직접 출동한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 한온(韓蘊)등이 전사하고 강진의 병영이 약탈을 당하는가 하면 회령포진성이 소각 당하는 등의 수난을 당해야 했다.

이렇듯 장흥부사(長興府使)는 국가보위는 물론 장흥과 인근 고을의 주민안위까지 살펴온 한반도의 서남해안의 중심고을로서의 수장(首長) 역할을 해왔다. 때문에 장흥인들은 어느 고을의 사람들보다도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모범되게 살아오면서 장흥의 문물과 문화를 인근에 전파하여 왔다. 이러한 장흥인의 영화는 1910년 합방이후 장흥군의 위상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지방자치단체장을 뽑아 우리군민 스스로가 우리 장흥을 꾸려 온지가 24년째다. 어쩜 우리의 지방정치도 성년을 넘긴 나이다. 오는 6월이면 다시 지방선거가 있어 장흥을 위해 일하게 될 사람을 선출한다. 그들을 선출하는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지역을 위해 군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 그들의 능력과 역량이 충분하였으면 한다. 우리 장흥이 한반도의 서남해 중심고을로 다시 영화를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朝天)♣

< 관산읍 당동마을 소재 정안사>

정안사에 봉안된 공예태후의 영정

<장흥읍 동동리 옛 장흥동헌>

<1905년 2월에 장흥부에 부임하여 1907년 4월

산청군수로 전보한 이장용 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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