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 한잔을 마시며
홍차 한잔을 마시며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04.1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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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수 시인. 수필가

 

유용수 시인. 수필가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노을 묻은 강가로 눈이 쏟아지고 있다. 오가는 자동차의 불빛 사이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만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2월 밤, 적요가 짓누르는 밤. 밤을 끌고 가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다. 삶은 안녕하신지, 오늘하루만이라도 평온하셨는지, 끓어오르는 분노의 가래톳 하나는 잘 삭히셨는지, 기다리던 전화는 잘 받으셨는지 토닥토닥 안부를 묻는다. 눈은 그치질 않고 쏟아진다. 얼마를 더 쏟아내야 직성이 풀릴지 모르겠다. 며칠 전 양지바른 곳에서는 푸릇한 흙의 냄새를 맡았다. 복수초는 이미 화려한 자태를 뿜어내 어두운 산길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봄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며칠 후면 복수초를 뒤따라 산 아래 보아둔 홍매가 필 것이고, 다음은 매년 찾아가 안부를 전하던 노루귀꽃이 피어야 내겐 완연히 봄이 오는 것이다. 자연은 그렇게 더 머무르지 않고 느리게도 가지 않는다.

산기슭에 우람한 소나무 한그루가 쓰러졌다. 그가 침묵으로 하늘을 향해 오르던 올곧은 길은 사라지고 없다. 소나무는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에 잊혀 진다는 것이다. 그냥 잊히는 것이 아니길 바래보지만 마냥 지나가던 산바람마저 풋풋한 소나무 가지 끝에 머물렀던 황홀한 기억을 잊은 채 허덕허덕 산 밖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눈이 내리고 산은 침묵으로 눈을 받아들이며 무릇 많은 생명을 품고 아등바등 이다. 하지만,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지금쯤 몸을 달구고 있을 것이다. 소나무 옆 푸른 춘란이 어김없이 하얀 궁대를 끌어 올렸다. 가느다란 궁대는 조금씩 살을 찌우며 맑은 향기를 품고서 남모르게 기나긴 겨울밤을 견디어 왔다. 춘란은 온몸을 찢어내는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그냥 핀 꽃은 없다. 홀로 핀 꽃도 없다. 억지로 피우게 할 수도 없다. 오직 스스로 생살을 찢고 피어야만 화려한 꽃을 볼 수 있고 맑은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웃으며 피는 꽃은 없다 / 꽃도 아프면 운다

아프게 핀 꽃이라야 / 향기롭다

우리 모두 그렇다

유용수 시 꽃도 아프면 운다

오늘 밤은 더 깊은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하얀 눈과 깊은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생명은 숨을 죽이고 무릇 때를 기다리는 저 절정의 순간을 음미하면서 겨울밤을 보듬고 이겨내고 있다. 이것이 자연에서 말하는 춘화현상春化現象이다. 겨울을 거치지 않는 식물은 꽃을 피울 수 없다. 혹한의 고통을 이겨내야 꽃이 피는 것을 춘화현상이라고 한다. 지금 자연은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절대적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겨울이 오지 않는다면, 식물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산 밭둑에 매년 봄날이면 붉은 개 복숭아꽃을 나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자드락길 옆 뽕나무도 열매도 맺지 못한다. 이것은 재앙이다. 모든 식물은 춘화현상을 겪어야만 꽃이 핀다. 우리의 인생도 비슷하다. 유리온실에서 꽃처럼 자라난 아이가 거칠고 험한 세상 밖으로 나와 극한의 추위를 견디어내야 사람 사는 세상의 기둥이 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는가.

그 어떤 영원불변한 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왜 변하지 못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허덕거리는가. 집착과 고통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일심은 무엇이고 여래는 무엇인가. 혐오와 집착의 독을 제거할 참 나의 행복을 묻고 있다. 숲의 회랑은 바람 한 줌 붙들었고, 쪼개진 햇살은 참괴한 몸을 붙들고 있다. 가난하지만 초라하지 않기를 바라며 토닥토닥 나를 다독이고 있다. 가슴 깊은 곳에 박힌 옹이 하나를 뽑아내고 싶다. 아둔한 삶을 위로 받고 싶다.

창밖에서는 눈바람이 한창이다. 어느 날부터 명징한 자리에 앉아 동살처럼 비추다가 지나가는 삶을 되짚어보고 있다. 짊어지고 일어나지도 못 할 아둔한 것들을 낑낑 거리고 있었을까. 지리산 벽소령고개에 살아가는 노루는 단 한 평의 땅을 소유하지 않아도 지리산을 휘졌고 다니고 있지 않는가. 되묻고 되물어도 가슴으로 파고드는 더러운 욕망과 부족함을 헤쳐 오면서 사고는 편향적으로 휘돌고 있음을 어쩌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은 어찌 할 것인가. 홍차 한잔을 머금고 눈을 감고 또 한 번 되묻고 있다.

먼 곳에서 경적이 들린다. 그리고 겨울밤이 깊어간다. 오랜만에 차를 다렸다. 움츠리고 굳어있던 찻잎이 몸을 풀었다. 묽은 홍차 한잔에 겨울밤을 달래고 있는 이 순간을 나는 잊지 않는다. 오늘 하루도 무언가 부족하고, 무언가 불확실하다.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하지만 욕심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또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 스스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오유지족吾唯知足의 삶을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맑은 바람과 하얀 눈을 맞이한다. 바람은 멈칫거림 없이 쏟아져 들어와 묵혔던 더러움을 씻어내고 있다. 홍차 한 잔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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