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가는 청년들에게 보임
군대에 가는 청년들에게 보임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05.1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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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스님 (보림사 주지. 시인. 수필가)
일선 스님 (보림사 주지. 시인. 수필가)

 

도량에는 지금 철쭉이 한창입니다. 서로가 먼저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경하면 더욱 철이 든다고 경책을 하고 있습니다. 숲은 해맑은 동자승의 얼굴처럼 점점 연둣빛 물감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한편 전방의 군부대에는 철이 늦어서 이제사 노오란 민들레가 피어오를 것만 같습니다. 이제 입대한 병사들은 고된 훈련 속에서 꽃을 보는 여유를 가지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난겨울은 군인들에게도 기록적인 폭설과 추위가 너무나 혹독했다고 합니다. 십여 년 전 가까웠던 거사님과 눈밭에서 훈련하는 병사들을 위해서 특별히 전문 주방장과 마련한 짜장면을 차에 싣고 전방에 다녀온 추억이 무용담처럼 떠오릅니다. 법당에 나오는 병사들 삼백여 명분의 짜장면을 준비해 가지고 갔었습니다. 고된 군대 생활 속에서 맛보는 짜장면은 어머니표 음식처럼 달콤하여 병사들은 아이들처럼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의미가 없는 고통이 없기에 혹독한 추위를 견디듯 군 생활을 잘 넘기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초청 법사로서 한 마디 일러 주었습니다. 또한 초병이 경계를 놓치지 않듯이 자기 자신을 끝없이 주시하여 서 있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군에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여 홀로 당당하게 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가까운 신도 아들 몇몇이 최전방 군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즈음 군 생활은 일과 후 영상 통화도 되고 부식도 좋아졌으며 월급도 올랐다고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편 부모들이 자식을 믿고 먼저 정신적으로 독립을 하는 기도를 열심이 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군에 있는 자식을 믿지 못하고 간섭하는 헬리콥터 엄마가 되지 말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모처럼 자식을 독립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 문경 봉암사에서 사십 여 년 전에 첫 안거를 마치고 최전방으로 군에 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 한국 북쪽에는 전강선사가 선풍을 떨쳤지만 이미 입적하셔서 남긴 육성테이프를 들으면서 나태할 때마다 간절한 발심을 했습니다. 한편 남쪽 통도사에는 경봉선사가 큰 선지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통도사 극락암으로 찾아가서 공부를 점검받고 군에 가는 억울한 심정을 누르며 수행에 도움이 되는 선지식의 법문을 청했습니다.

경봉 조실스님께서는 팔십 노구로 병석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내가 왜 일어나는지 아느냐고 묻고 봉암사에서 왔다 고하니 바로 봉암사에 봉이 몇 마리나 있더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런 답을 못하고 있으니 ...,...이라고 왜 답을 못하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깨닫지는 못했지만 병석에서 베풀어 주셨던 자비스런 가르침에 선지식의 은혜가 한량이 없었습니다.

최전방의 훈련소에 도착하니 대남 방송이 들려오고 고된 훈련 속에서 긴장된 마음을 가눌 길 없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세상과의 만남에 있어 새로운 경험은 더욱 하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병 훈련을 반쯤 마쳤을 때 악마의 발톱이라는 별명을 가진 교관에게 전직 승려 생활이 탄로가 나서 고기가 나오면 놀리는 바람에 먹지를 못했습니다. 삼복더위가 찌는 훈련 속에서 고기를 먹지 못해서 체력이 바닥나 힘센 동료들과 함께하는 훈련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구보를 하면 항상 선두 그룹에 들었습니다. 또한 밤이 오면 병사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취침 염불로 반야심경을 독경하라는 새로운 소임을 부여받았습니다.

봉암사 서암 조실스님께서는 군에 가면 승려라는 흔적을 지우고 보통 사람으로 군 생활을 마치라고 했는데 전직이 탄로가 나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이 무상하고 생사가 두려워서 출가를 하여 그간 고행하고 정진을 해서 맑은 경계를 얻었지만 마치 유리 독에 갇힌 것과 같아서 답답했습니다. 그것은 생사를 싫어하고 따로 편안한 열반을 구하려고 번뇌가 일어나면 회광 반조해야 하는데 원수처럼 끊어버린 잘못된 수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얻은 경계는 편안하고 맑아 시비가 끊어진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답답하고 무기력하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군 생활을 통해서 얻었던 경계를 버리고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온갖 시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고 웃으며 살고 있으니 이를 범부 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비 속에서 시비하지 않는 참으로 보통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생사가 곧 열반이어서 생사나 열반의 양변에 머물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삼복더위 속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통신 가설로 주특기를 받아서 연대 본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임무는 전방과 연결된 선로가 단선이 나면 무거운 방철통을 등에 지고 험한 산악을 넘어서 연결하는 소임으로 전직 수행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보직이었습니다. 고참들은 서툴고 잘못을 해도 전직을 참작해서 잘 봐주었습니다. 한편에서는 격려를 해주니 야간 보초가 끝나면 침상에 앉아서 모두가 잠드는 시간에 좌선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자대 생활이 일 년 가까이 지나면서 전방 부대에서는 지뢰 제거 작업으로 많은 동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때 동기였고 이름이 같았던 친구는 아버지가 장성이었지만 전방에 지원하였는데 안타깝게 사고로 희생되었습니다. 기족들이 장례식에 참여 하였는데 성악가인 누나가 소프라노로 동생이 좋아했던 꽃구름을 불러서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잠잠했던 생사문제가 다시 절박해 졌습니다. 부대장님은 동계 훈련이 끝나고 취침 염불을 통한 부대 안전을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부대에는 법당이 없어서 취사장을 임시 법당으로 쓰라고 하며 법회 준비를 해오라는 특별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송광사에 달려가서 방장 구산큰스님을 뵙고나니 제대는 언제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억겁 전에 이미 마쳤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더니 주장자로 사정없이 후려갈겼습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았던 시자스님이 따로 보자고 하는 바람에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군에 가서도 먹물이 안 빠져서 순간적으로 건방지게 큰스님 앞에서 선문답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조계총림 구산 방장스님은 절구통 수좌로 소문난 종정을 지낸 효봉선사의 제자입니다. 한편 구산선사는 자비와 인욕의 도인으로 원주실에 걸려있는 석굴암 부처님 사진과 글씨 십여 점을 써주셨고 병사들을 위해서 떡값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마침내 어려운 가운데 부대가 사고 없이 오래도록 편안하라고

군 법당 장안사를 개원하였습니다. 초청 법사로 봉암사 조실 서암큰스님을 모시고 맏사형님 절에서 온 신도님들과 훈련병 삼백여 명이 동참해서 성대하게 전법의 문을 열었습니다. 한편 모처럼 푸짐하게 떡과 과일로 병사들을 위문하니 인기가 더하여서 장병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주마다 삼백여 명이 넘는 훈련병들에게 떡을 주려고하니 너무나 지원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조실스님께서는 신도님들을 통해서 많은 지원을 해주셨고 여러 차례 초청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안심을 하였고 많은 포교를 하여 찾아오는 부모와 형제들이

좋아해서 커다란 보람을 느꼈습니다.

한편 사단 법당에서는 법사님이 한 달에 두어 번씩 법회에 지원을 나왔습니다. 그래서 함께 전방을 두루두루 지원하였는데 법사님이 참으로 자상하고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제대를 일주일 앞두고 기념으로 마지막 철책선 근무자들을 위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밤을 새워 근무하는 병사들을 찾아서 따뜻한 커피와 간식을 전해주고 위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위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운전병의 실수로 그만 십여 미터 계곡으로 차가 굴렀습니다. 법사님은 안타깝게 그 자리에서 순직하셨고 나는 문 밖으로 튕겨 나와서 무사했지만 동행했던 법당 후임병은 큰 장애를 입었습니다. 법사님의 부친은 당시에 정역의 대가였던 이정호 선생으로 충남대 총장으로 계셨으며 큰아들은 성대 유학대 학장이었고 누나는 신학자로 이대 교수였던 다종교 집안이었습니다. 정역의 대가였던 선생은 사고 현장에 달려와서 우리 집안은 다종교로 서로 존중하며 사이좋은 신앙을 해왔는데 참으로 안타깝다고 하면서 오히려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참으로 생사가 호흡지간에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크게 발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입대하기 전에 얻었던 유리 독에 갇힌 것처럼 맑은 경계가 큰 사고가 났는데도 깨지지 않아서 사고로 인한 후유증이나 충격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맑은 경계를 얻어서 죽음을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큰 사고가 났으니 보통 사람으로 돌아와서 고통이 있어야 수행의 진로가 나오는데 맑은 경계가 깨지지 않아 무기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체험에 머물러 수행을 하면 안 된다고 선사들은 경책했습니다. 수행이란 오로지 자기를 버리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애욕을 이기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몸은 더러우니 집착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부정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정한 육체는 무상하니 더 이상 살아야할 가치가 없다 고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식관을 가르쳤는데 처음에는 숫자를 셈하게 하는 사마타 수행을 가르쳤습니다. 다음엔 호흡이 길면 긴 줄 알고 짧으면 짧다고 알고 들어오면 들어온다고 알고 나가면 나간 줄 아는 호흡을 따르는 관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지와 관을 겸수하면 몸은 호흡과 하나 되어 금방 가벼워지고 선정에 들어가니 이것이 지관수행입니다.

영가현각선사는 천태의 지관수행을 통하여 구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증명해 줄 사람이 없어서 육조스님를 찾아왔습니다. 영가선사가 선채로 석장을 두드리며 무상이 신속하다고 아만을 표출하였습니다. 이에 육조스님은 어찌 사문으로 덕행을 갖추지 않느냐고 꾸짖으며 참으로 빠르고 더딤이 없는 줄 모르냐는 말에 바로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이처럼 수행이 익을 대로 익어지면 선지식을 찾아서 탁마를 하고 끝없이 수행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부처님은

지관수행의 기초 과정을 통하여 자세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선사들은 오히려 오랜 시간동안 닦을 것이 없는 한마디 격외 구로써 일대사를 요달하는 새로운 방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통 수행자들은 지관수행을 통하여 수행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하지만 근기가 수승한 사람들은 바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으니 마른 똥막데기란 한마디에서 지관수행의 오랜 시간을 바로 뛰어넘어 여래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조사선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오래 살펴보고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간화선에서는 수행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리하여 의심이 다하고 다하여 구경에 이르면 중생심도 다하여 비로소 일대사를 요달하게 됩니다.

철쭉

남을 공경하고 받들며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향기를 감추고 있나니

철이 쭉 든 사람이라

나만이 잘났다는 것을

내가 못났다는 것을

세우는 철모르는 사람

철은 특별한 시절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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