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보림백모단차(寶林白毛團茶) 재현과 활용방안에 대한 小考(상)
■특별기고 보림백모단차(寶林白毛團茶) 재현과 활용방안에 대한 小考(상)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08.2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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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서예가,야천서학연구원장

■특별기고

보림백모단차(寶林白毛團茶) 재현과 활용방안에 대한 小考(상)

이정호/서예가,야천서학연구원장

 

 

 

 

 

 

 

 

 

 

가. 전통차 재현의 어려움

세종실록지리지에 전국 19개의 다소(차를 생산, 가공, 유통업무 등)중 13개소가 우리 장흥에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조선의 말엽까지 차 생산의 대표지역으로 손꼽고 있어 오늘날에 이르러 장흥은 농업경영으로 차를 재배하기보다는 야생차를 수확하여 가내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수제하여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어 하동, 보성, 제주 지역등과 달리 산업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청태전은 불행하게도 일본인의 조사자료(조선의 차와 선)에 의하여 그 면목이 전래되어 오고 있었다. 그나마 최근 생산자와 행정의 노력에 의해 장흥의 대표 전통차인 청태전이 ‘국가중요농업문화유산 제12호(2019년)’으로 지정됨에 따라 그 유산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우리 군은 이미 연구용역을 통해 청태전을 복원하고 농가마다 제품 표준화를 시도하고 시장을 넓혀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인지 최근 녹차의 고향인 보성에서도 고려시대 뇌원차 복원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듯하다. 고려시대 명차라고 하는 뇌원차는 다른 전통차와 차별성을 갖기 때문에 역사 문화적인 가치가 크다는 게 복원연구사업의 이유인 것 같다.

역사적 복원이란 무슨 의미 일까. 청태전과 뇌원차는 원래 당나라 다성으로 불리는 육우(陸羽)가 다경(茶經)을 썼던 때 녹차류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이 차의 제다는 찻잎을 찌는 일 곧, 살청작업부터 시작된다. 찌고 찧어서 덩이로 만들면 떡차이고 조잡하게 찧거나 잎차를 긴압하면 단차가 된다. 살청 작업은 발효를 중지 시키고 녹색을 유지함이 목적이지만 제조과정에서 찻잎의 주요 성분인 카테킨과 테아닌, 카페인등의 산화작용으로 발효차 색깔과 맛이 나타났다. 따라서 본래 떡차류는 녹차류이지만 보관 중 품질의 변화로 갈색 산화차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떡차류와 단차류는 중국의 당, 송대의 산물들이며, 이러한 차류들이 과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다가 이들은 문명, 과학의 진보로 산업화에서 사양화되기도 하고, 음다풍의 변화로 유행에 밀려나면서 현재에는 역사자료나 박제된 유물로 보관되어지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지나간 유물들을 다시 대중화 하거나 상품화 할 필요성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반드시 활용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전통과 역사의 유물들이 변화를 통해 재창조 된 사례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복식과 음식은 유행에 민감하다. 유행은 일정한 주기를 갖고 순환되는 특징이 있고, 순환은 시대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발전적인 재창조로 거듭난다. 따라서 우리지역에 과거 성행되었던 청태전의 복원 사업에 이어서 초의스님이 만들었던 보림백모 단차의 재현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다인들이 요청에 따라 자료를 뒤져보고 있으나 뚜렷한 증거가 될 만한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몇 가지 근거 사료를 가지고 추정이 가능하다고 사료된다.

초의가 24세인 1808년에 48세인 다산을 스승으로 예를 갖추며 불자인 그가 유학과 시문을 배운다. 이 시기 다산은 강진에서 전전하다가 백련사 혜장스님과 교유하며 혜장스님으로부터 사원의 다도를, 스님은 다산으로부터 차 제조법을 전수하였다. 또한 다산은 치병을 위해 1805년 겨울에 혜장스님에게 이른바 차를 구걸하는 <걸명소>를 지어 보내니 이 글에는 당대의 다경 내용이 잘 나타나 있어 다산의 차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듯 다산은 강진생활 이전부터 차를 즐겼으며, 차에 대한 전문지식 또한 혜장이나 초의보다 높았다. 다산은 강진생활에서 신병치료를 위해 중국 차자료를 바탕으로 본인이 직접 제다와 음다법을 경험을 통해 전수하고 있으며 다도관과 철학이 분명하였다. 또한 다산은 해배되기 1년 전에 <경세유표>에 <각다고>를 써서 중국의 차 전매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과 산차, 편차, 말차등 시대 변화에 따른 제다법과 음다법을 제시, 차 문화를 이래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지식을 갖춘 다산과의 교류를 통해 초의는 자연스럽게 차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고 우리 차, 특히 사원에서 쓰인 차에 대한 연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조선시대 차의 변천은 표와 같이 중국차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차의 변천]

초기의 증제떡차(餠茶) → 연고차(당,송시대) → 생배차(生焙茶-어린생잎을 찧어 불에 쬐여 만든 떡차, 약용차 : 이운해의 부풍향차보) → 증배잎차(蒸焙茶 : 이덕리의 동다기) → 증배차떡(삼증삼쇄 茶餠 : 다산) → 초배잎차(명나라, 炒焙茶) 및 증배단차(蒸焙團茶 : 초의)

나. 초의는 어떤 차를 만들었나?

초의의 차와 관련한 대략적인 연보를 살펴보자.

15세에 남평 운흥사로 출가하여, 1808년 24세 때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머물고 다산과 제자의 예를 갖춘다. 30세에 추사와 교유하고 1828년, 43세에 만보전서의 다신 전을 등초하면서 체계적인 차 연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45세(1830년)에 다신전을 정초하였고, 1831년 한양 경화사족에게 폐백으로 보림백모차를 가져가 전다박사란 칭호를 얻었다. 추후 1837년 53세에 이르러 동다송을 기초하였다. 1841년 56세에 덖음차(초청산차)를 완성하여 주변 지인으로부터 평가 받음 이는 추사와 주변의 다인들의 조력의 결과로 보인다.

초의차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 중 다산의 제법에 의해 만들어진 떡차로 보는 견해와 덖음산차로 보는 견해가 충돌하여 왔다.

떡차(병차 餠茶)는 당나라 육우 <다경>의 기록처럼 거친 찻잎을 찌고 찧어서 떡 모양으로 성형한 것(청태전)이고, 이와 비슷한 다산의 차떡(茶餠)은 차의 센 기운을 덜기 위해 삼증삼쇄법으로 만든다는 차로 곡우 때 딴 찻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서 아주 곱게 빻아서 돌 샘물로 반죽해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찍어낸 것으로 먹을 때는 더운물에 넣으면 죽처럼 풀려서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당,송대의 연고차류)을 말한다.

또한 단차(團茶)는 차떡과 떡차를 모두 포함하나 가루내지 않고 잎차상태에서 덩이로 긴압(緊壓)한 차이다(보이차). 때문에 잎차는 단차나 산차가 될 수 있지만 잎차가 곧 산차는 아니다.

위와 같이 차의 형태를 분류하여 보면 초의가 만들었다는 보림백모는 어떤 형태였을까. 당시의 자료에서 그 실제를 파악해 보자.

한편 요즘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소위 초의제다법에 의한 초의차라는 것은 덖음 잎차인 산차(散茶)인데 다신전과 동다송에 전제된 제법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한 바와 같이 다신전과 동다송은 그 원전이 중국의 <다록>과 만보전서이다. 따라서 초의는 24세 때부터 해남 대둔사에 머물면서 차를 접했고 다양한 방법으로 제다를 연구함에 중국의 자료와 주변의 추사와 다산을 비롯한 많은 다인의 시음평가를 거쳐 나름대로 차를 몇 가지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초의가 대흥사 생활을 할 때부터 중국의 제다법과 다산의 영향으로 소형 떡차류(錢茶)를 만들었고, 45세 이후에는 단차(團茶)를, 55세 이후에는 산차(散茶)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구체적인 실체의 파악을 위해 지금까지 알려진 추사와의 편지내용 및 지인과의 교류시의 자료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추사와의 편지를 통해서 본 ‘초의차’

①1838년 : “매번 볶은 방법이 조금 지나쳐서 정기가 삭는 듯~”

②1842년 : “차포는 과연 훌륭한 제품이오, 능히 차 삼매경을 투득하여 이르렀구려.”

(이때까지는 초의는 ‘초청산차’를 만들어 보낸 것으로 판단된다.)

③1843년 8월 : “차전(茶甎)은 모두 훌륭하였소~”

(이 편지에서는 돈차가 아닌 차전, 즉 벽돌처럼 생긴 상당히 큰 전차가 나오므로 초의가 다양한 차를 만들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④1844년 5월 : “차 시절이 지났는데 몇 덩이나 만들었소? 색과 향이 다 좋을 텐데 더운 날씨에 부쳐오면 마침내 손상될까 걱정되니~”

(떡차를 얼마나 만들었냐는 물음과 상하기 쉬운 철이니 시원한 가을에 보내라는 당부이다.)

⑤1847년 6월 : “지난번 보내준 차떡은 벌써 다 먹었소~”/ “절에서 만든 소단차 30,40덩이를 좋은 것으로 가려보내주길~”

(이 편지부터는 추사가 제주에서 나온 3년 후로 과천에 있으면서 걸명한 편지이다. 이 때부터는 소단차-작은 떡차-도 함께 만들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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