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문림의향’고을, 운암(雲巖) 정두흠(鄭斗欽)을 알려야한다.
특별기고- ‘문림의향’고을, 운암(雲巖) 정두흠(鄭斗欽)을 알려야한다.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08.3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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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집(雲巖集)』번역하고 운암선생을 독립유공자 추서한다.
문병길(문화관광해설사)

 

 

 

 

 

 

 

 

 

 

운암 선생은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던 고급 관리였다.

정두흠(鄭斗欽:1832~1910)선생은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출신으로 1910년 경술년 한일합방 때 순절(殉節)한 애국지사이다. 운암(雲巖) 정두흠은 <손명사(損命詞>을 남기고 순절하였다. ‘손명사’는 “목숨을 버리며 알린다.”는 뜻이다. 순절 당시 유묵은 확인 되지 않고, 공의 문집인 『운암집(雲巖集)』에 <손명사(損命詞> 2수가 전한다.

운암 정두흠선생 자(字)는 응칠(應七)이요, 호는 운암(雲巖)이며 진주인(晉州人)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종2품직) 정철주(鄭哲周)이며, 어머니는 영광김씨(靈光金氏)로 김희(金희:王+義)의 딸이다.

어려서 부터 재기(才氣)가 총명하여 젊은 날에 능주 개천사에서 공부하면서 16세에 남주독보(南州獨步)로 칭송받았다. 그래서 장흥부사 김기석(金箕晳:재임기간 1848. 2~1849. 6)의 권유(勸誘)로 승지(承旨) 최상관(崔相琯)에게 사사(師事)했으며, 32세 때 향해(鄕解), 동당(東堂), 회시(會試)를 거친 후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 선생에게 수업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879년(고종16) 48세 나이에 식년문과에 을과 7위로 급제하고 진중(陣中), 정시(庭試), 전시(殿試)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곧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1880년에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1881년(辛巳), 1882년(壬午)에 차례로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侍墓) 6년하고 1887년(丁亥) 56세 때 다시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持平)되어 임금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청하고, 그해 10월에 뇌진지변(雷震之變)을 당하여 백성이 크게 동요함에 죄와 상을 분명히 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백성을 위무(慰撫)하도록 진청(秦請)하였다.

1888년(戊子) 정월 종묘대제(宗廟大祭)에 공(公)이 대축(大祝)겸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어 업무를 맡았던바 임금께서 친임(親臨)하시어 보시고 관복(官服)한 벌과 녹미(祿米) 3석, 해조물 등을 특별히 하사(下賜)하였다.

운암선생은 고급관리로서 고종임금에게 바른 말을 했다.

공은 관직에 있으면서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 청파매관소(請罷賣官疏), 청납직언소(請納直言疏)를 올려 정치 도의를 바로 잡을 것, 매관(賣官)의 폐단을 없앨 것, 직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개방할 것 등을 촉구하는 시폐(時弊)를 올려 시정(是正)토록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1892년(壬辰)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유치 운월리로 돌아와 망화대(望華臺)를 설단(設壇)하고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읍소(泣訴)하면서 서회(敍懷)의 시를 읊었다.

그리고 한양 조정과 나라를 걱정하며 인근에서 모인 제자들을 가르쳤다. 운암(雲巖)선생은 역대 장흥출신들 관리 가운데 중앙무대에서 가장 바른 말을 많이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의 문집 『운암집』은 4권 2책으로 쇠퇴해가는 국운을 개탄하여 지은 시들이 많아 강개한 뜻이 넘치고 있다. 탄임오군요(嘆壬午軍擾)․상시감음(傷時感吟)․탄의상개제(嘆衣裳改制)․창의감음(倡義感吟)․환향(還鄕) 등에는 조선의 몰락과정과 함께 그의 애국심이 잘 나타나 있다.

만언소(萬言疏)는 정치의 정상화를 위한 조정의 자구책에 대해 진언한 것이다. 명덕(明德)․독경(篤敬)․총명(聰明)․수성(修省)․기강(紀綱)․근검(勤儉)의 6개항을 지적하여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삼락설(三樂說)은 인간의 행위 가운데 즐거운 것 세 가지와 즐겁지 못한 것 세 가지를 열거한 것이다. 부귀자로 독서하지 않는 것, 술이나 마시고 인의(仁義)를 행하지 않은 것, 윗사람에게 아부하여 녹봉이나 탐내는 것이 세 가지 즐겁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반면, 부모가 모두 살아 있고, 친구 간에 믿음이 있고, 자신을 수양하여 천년을 마칠 수 있는 것이 세 가지 즐거운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운암선생의 손명사(損命詞:목숨을 버리며 알린다)가 전한다.

운암선생이 마지막 가는 길에 남겼던 손명사(損命詞) 2수는 아래와 같다.

1. 有客來傳無國報(유객래전무국보) 어떤 객이 와서 전하길 나라가 없어졌다 하기에

癲狂心事淚凄然(전광심사루처연) 미칠듯한 심사에 눈물 흘리며 처참해지네

擧跟寧蹈靑山土(거근영도청산토) 발꿈치 들고 어찌 청산의 흙을 밟으랴

閉戶不見白日天(폐호불견백일천) 문 걸어 닫고 대낮의 하늘을 보지 않네

負帝貞忠慙陸秀(부제정충참육수) 황제를 업고 죽은 육수부의 정충에 부끄럽고

攘秦大義憶齊連(양진대의억제련) 진나라 물리친 제나라 노충련의 대의를 생각하네

國破難容無求罪(국파난용무구죄) 나라가 망함은 용납이 어렵고 구제할 수 없는 죄이니

莫如身死逐先賢(막여신사축선현) 이 몸 죽어 선현을 따르니만 못하리라

2. 許國斯身問幾年(허국사신문기년) 나라에 이 몸 의탁한지 몇 년 되었나

愛君每祝太平宴(애군매축태평연) 임금 사랑으로 늘 태평전승 빌었건만

一朝盡人洋夷手(일조진인양이수) 하루아침에 오랑캐 손에 끝장이 났네

末境殘傷餓虎咽(말경잔상아호인) 굶주린 호랑이 목에 걸린 마지막 참상

禮義可憐箕聖域(예의가련기성역) 예의와 의리 가련하다, 기자(箕子) 성인의 강역

彛倫誰復漢陽天(이륜수복한양천) 그 누가 회복하랴, 조선하늘 사람 도리

屋社無歸身可殉(옥사무귀신가순) 사직이 무너졌으니 이 몸도 순신(殉身)하리라

下倍先帝地黃泉(하배선제지황천) 신하로서 선제(先帝) 받들어 황천에서 살아가리.

운암(雲巖)의 손명사(損命詞)는 매천(梅泉)의 절명시(絶命詩) 에 대비될 수 있다.

운암(雲巖) 선생은 문과급제자 ‘제도권 관료’인 반면에, 매천(梅泉) 선생은 과거시험 1차(사마시)에 그친 ‘초야 선비’라는 차이점이 있기에, 서로 지향점이 달랐다.

운암 선생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신 고급 관리로서 충군보국(忠君輔國)이었으며, 매천(梅泉)은 지식인으로서 인의(仁義)에 가치를 더 두었다. 어쨌거나 매천(梅泉)의 <매천야록>의 명성을 감안하더라도 운암 선생과 공의 손명사(損命詞)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운암선생 문집을 문화원에서 번역한다.

장흥문화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고전 국역사업 일환으로 공의 문집『운암집』번역을 위촉받은 홍순석 명예교수(강남대 한문학 전공)가 번역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공의 문집 『운암집』에 당대 명망가, 판서, 고관들이 등장한다. 민영환 산정(山亭)에서 시회를 했으며 이항로(1792~1868), 조성하(1845~1881), 이건창(1852~1898) 등과 종유 또는 교류하였고 그 무렵 장흥부사 이학래(재임기간1880. 8~1882.12), 이용태(재임기간1892. 8.~1894. 3) 박헌양(재임기간1894. 4 ~1894. 12)이 언급되었고 장흥출신 선비들의 만시(挽詩)도『운암집』에 기록되었다.

국난수습에 애쓰다 돌아가시거나, 을사조약 울분으로 자결한 선현들인 신헌(1810~1884), 조병세(1827~1905), 민영환(1861~1905), 송연재(1836~1905), 홍만식(1842~1905), 김봉학(1871~1905)등 이다. 매천 황현(梅泉,1855~1910) 역시 민영환. 홍만식, 조병세, 최익현, 이건창을 기리는 ‘오애(五哀)시’를 남겼다.

운암(雲巖)은 1906년에 자결한 면암 최익현(1833~1906)에 대해 “억(憶)면암 연재 양兩 선생(先生)”기록도 남겼다.

문화원에서 운암선생 독립유공자 추서사업을 하고 있다.

8월 29일은 한일합병의 경술국치의 날이다. 운암(雲巖) 선생은 1897년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친 점,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1906년 면암 최익현 순국 등 소식을 접하고 비통해 하다가 결국 당신도 경술국치 치욕의 변(變)을 듣고 망화정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의고선성문(擬告先聖文)을 짓고 탄식하기를 “내가 어떤 면목으로 저 하늘의 해와 달을 대할 것이며, 살아서 설 곳이 없고 죽어 돌아갈 길만 있다.”라고 하였다.

자손에게 명하여 말하길 “나는 마땅히 대궐 아래서 죽을 것이다. 갈 채비를 서둘러 하라.” 하였다. 자손들이 차마 행하지 못하고 이 날 저 달 계속 수개월 미루었다.

또한 노쇠하여 갈 수가 없자 충의를 위하여 마침내 자기집 방에서 약을 먹고 머리를 부숴 기진하고 유혈이 자리에 가득하여 홀연히 순절(殉節)하였으니 바로 1910년 10월 25일 공의 나이 69세였다.

이듬해 1911년 10월에 부인 한씨(韓氏)도 공의 소상(小祥)을 지낸 후 “國破夫死인데, 吾何獨生하리요”라고 말하면서 같은 방법으로 음독 자결하여 열(烈)을 다하기 위해 공의 뒤를 따랐다.

운암선생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니 죄를 구할 수도 없어 선현(先賢) 따라 죽는 것보다 나을 일 없다”라고 하셨다.

운암선생과 같은 시기에 호남에서 순절한 애국지사는 셋 인데, 정두흠 선생은 장흥에서, 곡성에서는 정재건(鄭在健), 김제에서는 장태수(張泰秀)가 각각 유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정재건 선생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고, 장태수 선생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흥문화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두흠 선생의 독립유공자로 추서사업을 하고 있는데 공의 후손 정제하(1936년 장동면 봉동리 이거) 가족을 빨리 파악했으면 한다.

유적으로 유치 운월마을에 망화대(望華臺)가 있으며 그곳에 유적비(높이 1m, 폭 40cm)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조선시대 학자(學者)로 명성을 얻었던

망화대기(望華臺記)가 전하고 있으며 운암(雲巖)선생의 세거를 알리기 위해 후손들이 유치면 운월리 엿마지기등 입구인 배고픈 다리 옆 바위에 “지평 운암 정공유적(持平 雲巖 鄭公遺蹟)”이라 1962년에 새겨 놓았다.

※참고자료: 남도 정자여행: 장흥 망화대(望華臺), 예양칼럼(17): 운암 정두흠 선생,

『운암집』, 운암 정두흠의 <손명사(損命詞) 결자부분 복원, 유치면지(1993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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