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장흥 차 문화 ‧ 차 산업 융성기를 열어야 한다
사설 - 장흥 차 문화 ‧ 차 산업 융성기를 열어야 한다
  • 김선욱
  • 승인 2021.09.1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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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백모차 재현’ 그 의미와 활성화를 위하여

중국의 차의 재배와 차 문화는 특히 당나라 8세기 후반, ‘차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는 <다경(茶經)>이 다성(茶聖) 육우(陸羽, 733년∼804년)에 의해 절정기를 맞는다.

당대(송-당)에 주로 마셨던 차는 산차(散茶), 말차(末茶), 병차(餠茶) 등 4종이 있었는데, 그 중 고급차로서 병차가 중심이었다. 그 병차는 ‘엽차를 쪄서 으깨어 굳히고 굽거나 건조시켜 제다한 덩어리차(떡차)였다. 요즈음의 보이차 처럼 뭉쳐진 찻잎 덩어리 형태의 차였다. (물론 크기나 형태는 달랐다). 중국 절강성 장흥현의 ‘육우 기념관’에는, 당시 육우의 제다법 중 ‘병차 제다’ 모형이 구체적으로 전시돼 있는데, 오늘날 장흥의 청태전 제다와 거의 동일하다).

육우가 <다경>에서 설파한 병차 제다‧음다법은, 따온 찻잎을 시루에 쪄서 공이와 절구로 찧은 후 그 찧은 찻잎을 차틀에 넣어 덩어리차로 박아내어 건조시킨 후 그 병차를 갈아 가루를 내어 끓여 마시는 것이었다.

당나라 때 신라를 비롯 삼국으로 건너 온 삼국시대의 차 역시, 현재의 덖음차라기보다 찻잎을 쪄 빻아 형태를 고정시킨 덩어리이차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때도 토산차로서 떡차(餠茶), 뇌원차(腦原茶), 유차(孺茶) 등 단차(團茶, 차의 모양이 둥글게 생겨, 단차라고 불렀다), 즉 덩어리차가 유행됐다.

고려 때 떡차는 익힌 찻잎을 찧어 떡처럼 만든 차로, 동전 모양의 돈차(錢茶), 둥근 달 모양의 단차, 인절미 모양의 떡차 등 여러 형태에 크기도 큰 것 작은 것 등 다양했다.

뇌원차 역시, 새로 나온 잎을 쪄 찧어 만든 덩어리차로. 맷돌로 가루를 내어 타서 마시는 형태의 단차요 어용차로, 팔관회‧연등회 등 여러 국가행사에 사용하였다. 뇌원차의 단위는 각(角)으로, 각은 당시 고려 속어인 편(片), 즉 조각이란 뜻이어서, 뇌원차 역시 엽차가 아니고 떡 모양의 단차였던 것이다. (<고려사열전> 최승로조崔承老條에, 왕이 부의賻儀로서 뇌원차 200각, 대차[大茶, 大國茶, 中國茶] 10근을 보냈고, <고려사> 문종 3년에는 최보성崔補成 등에게 뇌원차 30각角을 내리고 있다).

유차 역시 덩어리차였다. 유차는 토산차 중 으뜸으로 치던 차로, 그 향기와 단맛이 각별하여 왕실(王室)의 어용물(御用物)이었다고 한다.

이규보는 차시에서, 운봉(雲峰)에 사는 노규선사(老珪禪師)가 조아다(早芽茶)라는 차를 보내오자 이를 스스로 유차(孺茶)라고 이름하고, 시를 지었다.(雲峯住老珪禪師得早芽茶示之予目爲孺茶師請詩爲賦之). 이 시중에 “… 남쪽 사람은 맹수도 두렵지 않아 / 험난함을 무릅쓰고 칡넝쿨 휘어잡고 / 간신히 채취하여 불에 말려 단차 만드니 /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리려 하네… 南人曾不??? .冒險衝深?葛?, 辛勤採摘焙成團, 要냉頭番獻天子…”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분명히 이 차를 ‘단차’라고 표현하고 있다(辛勤採摘焙成團).

조선조 전기까지만 해도 차 문화는 여전히 왕실과 사대부 지식인, 사찰을 중심으로 계승됐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는 고려 때부터 이어져온 차 산지가 기록돼 있는데, 강진·장흥·순천·하동 등 35곳(이중 장흥부에만 13개 다소가 있었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로 조선의 차는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조선 차 문화는 후기에 다시 부흥한다. 그 중심에는 다산 정약용(1762~1836), 다성(茶聖)으로 불린 초의선사(1786~1866),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있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차 문화 융성의 시작은 다산에서 출발하고, 초의로 수렴되었고, 당대 차의 명인으로서 초의의 성가와 초의 차 확장은 추사의 조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이 당시 떡차를 재현‧복원하여 보림사, 백련사 등에 전수하고 초의에게까지 전수하였으므로, 이들 3인이 주로 마신 차도 떡차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보림사를 구심점으로 전승되어 온 떡차, 당나라 때 육우에 의해 제다되어 삼국시대, 고려조 등을 거치며 전승되어왔던 그 돈차요, 병차요, 덩이차였던 그 떡차가 특히 일제강점기까지 장흥에서 ‘청태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오다 10여전 전, 장흥의 청태전 복원사업에 의해 장흥의 고급 전통차로 부활되며 국내 모든 차 중 최고급차로 가치가 증명되면서 1000년 역사를 가진 세계적인 명차 반열에 오르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녹차의 수도’라고 이름 지으며 ‘다향(茶鄕)’으로 차 박물관도 조성하고, 해마다 보성세계차엑스포도 개최하며 보성의 녹차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쳐 온 보성군이 장흥 청태전 사업에 시샘이 났던지, 지난해부터 ‘보성 뇌원차’ 복원하여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도전을 추진하는 등 열을 올리고 있다. 자칭 ‘보성 뇌원차’라는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웅치면 약산마을 일대의 ‘가을평 다소’에서 뇌원차를 만들었을 것이므로, 그들이 복원하는 뇌원차가 ‘보성 노원차’라는 것인데,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웅치면은 과거 천포면‧회천면과 함께 근 7세기 간에 걸쳐 장흥부에 속했던, 장흥 땅이었다.

여튼지간에, 과거 장흥 삼비산이 보성의 일림산으로, 판소리 서편제의 본향으로서 장흥 서편제의 역사‧전통 이미지가 ‘서편제 보성소리 축제’로 인해 보성군 서편제로 빼앗겼듯이, 정유재란 때 이순신 수군로 복원 과정에서 그 역사적 근거지가 장흥 해창‧회령포(회진)에서 회천면 지역으로 빼앗겼듯이, 또 1000년 전통의 떡차로서 ‘장흥 청태전’의 전통과 그 가치가 ‘보성 뇌원차’에 의해 밀려 낙후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최근 ‘보림 백모차’가 재현되었다.

다성 육우의 병차가 전승되어 1000년 만에 육우의 최고급차 청태전이 재현‧복원되었고, 이어 한국의 다성으로 불린 초의의 최고급 단차인 보림 백모차도 장흥에서 재현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보림 백모차’는 초의에 의해 제다된 여러 차 중에 최고급차였다. 이른바 조선조 여러 차 중 최고 브랜드로서 가치와 명성을 지닌 당대 최고급차였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행정당국의 의지나 경제적 지원 없이 순수 민간사업으로 추진되어 아직은 최고급차로서 대중화‧상품화에 걸림돌이 많다는 것이다.

7세기동안 전남 서남부에서 핵심적인 요충지요, 전남의 사림(士林)‧문림(文林)‧의림(義林)의 중심 고을이었던 장흥이었다. 또 차 문화에서도 보림사 개창 이래 주류가 되었던 장흥이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장흥에서 육우 당대 최고급차 청태전과 조선조 최고 브랜드였던 보림 백모차의 재현‧복원은 장흥이 한국의 전통적인 최고급차의 메카로서 장흥 차 문화 르레상스를 열 수 있는 그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만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장흥의 전통 고급차의 전승과 현대적 활용을 위해, 장흥 고유의 독특하고 차별화된 차 문화 육성과 차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장흥군이 보림 백모차에 대한 ①상품화‧학술연구‧기록화 사업 ②관련 문화 콘텐츠 창출 ③제다(製茶)의 가치 공유와 확산 등 각종 관련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그 육성 방안을 추진하여, ‘보성 뇌원차’를 뛰어넘는 경쟁력 있는 장흥의 차 문화 융성기를 활짝 열어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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