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고제환(高濟渙)과 장흥민란(長興民亂)
■특별기고 - 고제환(高濟渙)과 장흥민란(長興民亂)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09.1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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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지/시인, 칼럼니스트
고산지/시인, 칼럼니스트
▲고제환 장흥군수가 태어나 자란 장흥읍 평화리

 

-이 글은 장흥읍 평화리 출신의 시인인 고산지(본명 고영표)의 글로, 200자 원고지 70매의 장문의 글로, 편집상 필자의 양해를 얻어 200자 원고지 40여 매로 축약, 2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나라의 상앗대가 되어서

1.

방패(防牌)보다는 망루(望樓)가 되고 싶었네

나라의 유익한 상앗대가 되고자

34세(1843년)의 나이에 선전관(宣傳官)되어서

여덟 살(1843년)에 왕이 된 헌종을 호위했네

열넷의 나이로 헌종(1849년)이 승하하자

보성군수 임명되어 보성 땅에 부임했네

안동김씨 김문근(철종의 장인)은 젊은 실학자(實學者)

남병철(南秉哲,1837년 登科)을 유난히 총애했네

훈련대장 김병국과, 대제학 김병학, 좌찬성 김병기의 권세

막을 자가 없지만 남병철은 그들의 눈에 가시였네

성별(性別)을 바꾸는 일 외, 못할 일 없다던 김병기

남병철에게 전라감사 감투 주어 외직으로 쫓아냈네

삼정(三政)은 문란하고 매관매직(賣官賣職) 성행하니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 수탈(收奪) 여념 없고

고혈(膏血 )짜는 아전(衙前) 횡포 하늘까지 닿았네

부임(赴任)한 고제환 고을 재정(財政)을 살펴보니

대여(貸與) 양곡(糧穀) 8만석 사라지고 없었네

환곡(還穀) 8만석, 뉘가 착복(着服)하였을까?

군내(郡內) 부호(富豪) 38명, 명륜당(明倫堂)에 소집(召集)하여

환곡(還穀) 8만석 대상(代償)을 강요했네

포탈(逋脫)된 세금징수, 공권력(公權力)을 발휘하자

안동김씨 검은 손이 암암리에 작동(作動)하네

경술복합상소(庚戌伏閤上疏) 빌미삼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전라감사(全羅監司) 남병철(南秉哲), 중추(重推)로 소환되고

부임한지 9개월에 파출(罷黜)된 고제환 삼척부도(三陟府徒)

3년 반에 별세초(別歲抄) 방질(放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네.

2.

가렴주구(苛斂誅求) 세도정치(勢道政治) 삼정(三政)이 무너졌네.

매 20년마다 해야 하는 양전(量田)이 실종(失踪)되니

멀쩡한 정전(正田)이 은결(隱結)로 바뀌었네

은결(隱結)에서 거둔 세금(稅金) 착복(着服)하는 수령방백(守令方伯)

이속(吏屬)과 야합(野合)하여 도결(都結)이 성행(盛行)하니

수령(守令)·이서(吏胥) 횡령환곡(橫領還穀)

수탈(收奪)하는 늑대강징(勒貸强徵)

늑탈(勒奪)하는 세곡작전(稅穀作錢)

인징(隣徵)·족징(族徵)·동징(洞徵)의 가혹한 징포(徵布)제도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 끝이 없는 군정문란(軍政紊亂)

삼정(三政)문란으로 수탈(收奪)이 계속되자

백성(百姓)들이 일어섰네, 민중(民衆)이 일어났네.

영남(嶺南)에서 붙은 불, 삼남(三南)으로 번지었네.

정남진(正南津) 장흥골 풍성한 농수산물로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외 대모갑(玳瑁甲)을 공납했네.

대모갑(玳瑁甲)이 귀해지자 수령(守令)·이서(吏胥) 합작하여

대모갑 대신에 대전납(代錢納)을 권장했네.

불편함을 해결하는 선행으로 알았더니

4-50량 하던 대전납(代錢納) 해마다 늘더니 3,400량이 되었네.

정방현(鄭邦賢)과 임재성(任在星)이 국로(國櫓)를 찾아와서

수령(守令)·이서(吏胥) 횡포(橫暴)에 울분을 토로했네.

임술(壬戌)년 춘궁(春窮)기는 유난히 힘들었네.

동헌(東軒) 앞에 모여든 천여 명의 백성들

관아(官衙)를 습격하자 목청을 높이었네.

국로(國櫓)가 나서서 백성들을 설득했네.

방백 없는 동헌 습격, 의미가 없다면서

이방 주찬우 등 오리(汚吏)부터 찾으라네

하리(下吏) 주신우 집 파괴(破壞)되어 불에 타자

전라감사 정헌교(鄭獻敎), 고제환을 나포(拿捕)하여

반란의 괴수로 의금부로 송치(送致)했네

국로(國櫓)가 체포되자, 흥분한 백성들

관아를 습격하여 공해(公廨)를 불태웠네.

전라감사가 민란을 진압하자 향리(鄕吏) 이향유

수백 명을 동원하여 국로(國櫓) 거처 파괴했네.

잡초 무성한 빈터 스산한 솔바람소리

그날의 기억, 찾을 길 없고 사랑채 흔적만 남았네

상앗대의 꿈을 꿨던 목민관(牧民官) 고제환

두 번의 유배(流配)에도 꺾이지 않았네

65세 늙은 나이, 무산도호부사 명을 받고

80세 장수하여 내금위장(內禁衛將) 발령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었네.

- 졸시(卒詩)

1. 세도정치의 배경과 장흥민란(임술민란)의 원인

영조 이후 조선역사의 중심은 사도세자思悼世子였다. 정조, 순조, 헌종은 사도세자의 적손嫡孫이었으나, 철종哲宗은 사도세자의 서손庶孫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고종高宗은 1815년 은언군恩彦君의 동생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의 양자로 입적한 남연군南延君의 손이다. 왕가의 손孫이 귀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등극한 왕이나, 입적하여 왕이 된 이들의 친족親族과 외척外戚의 세도정치 피해는 오롯이 백성의 몫이었고, 이는 임술민란(壬戌民亂=三南民亂)의 원인이 되었다.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할 때, 11살의 나이로 울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정조는 사도세자 사후,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어 24살에 왕위를 이어받았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외척제거와 남인南人 채제공蔡濟恭을 등용하여 탕평책을 폈다. 노론 벽파(僻派=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연하다고 주장)정권이 들어서자, 사도세자의 죽음을 억울한 죽음으로 규정하되 관련자들은 처단하지는 않겠다는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반포했으나 정조가 갑작스레 사망을 했다. 1800년 11살의 순조純祖가 왕위를 이어받고 정순왕후(定順王后. 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1804년부터 순조가 직접 국정을 관장하면서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시작된 세도정치 여파로 삼정三政이 문란紊亂하게 되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헌종憲宗은 순조의 손자로, 아버지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8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았고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의 비.안동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순조는 죽기 전에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영趙寅永에게 헌종을 부탁했다. 헌종이 14세가 되던 1840년(헌종 6)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2. 고제환高濟渙의 생애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인 고제환高濟渙의 고조부 고만거高萬擧는 종.형제가 과거에 함께 급제하자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연자시戀子詩 5언절구 70수를 남겠다.

고제환의 증조부 고석겸高碩謙은 무과에 급제 진해현감을 지냈으며 1770년[영조] 평화리에 입향한 장흥고씨 평화파의 입향조이다. 연자시를 가슴에 품고 스스로를 경계했던 증조부처럼 고제환도 연자시戀子詩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국로[國櫓 나라의 방패, 나라의 노]라는 호를 가진 고제환高濟渙은 의금부義禁府에 두 번이나 송치된 특이한 인물이다. 1843년 12월 26일[헌종 9년] 3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그는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16세의 헌종憲宗을 호위護衛했다.

1849년 6월 6일, 23살의 나이로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조정은 6년 넘게 헌종憲宗을 모셨던 고제환을 7월 25일자로 보성군수에 임명했다. 보성군수 재직 9개월 만에 발생한 고재환의 1차 옥사獄事는 전라관찰사 남병철의 기를 꺾기 위한 김문기[안동 김씨]의 덫이었다. 1850년 5월 9일[철종 1년] 보성군의 경술복합상소를 근거로 김문기는 관찰사 남병철과 보성군수 고재환 그리고 능주목사 김진화를 의금부로 송치했다.

1853년 10월 10일[철종 4년] 사면되어 고향 장흥에 은거한지 10년 후 고제환은 세도정치의 폐단 삼정문란이 원인이 된 임술민란 때 장흥민란의 괴수로 지목되어 1862년 5월 25일[철종 13년] 2차 옥사獄事를 겪는다. 두 번의 귀양살이 끝에 순종純宗이 태어난 해, 1874년 12월 17일[고종 11년] 65세의 나이로 무산부사茂山府使가 된다. 무산부사가 된 후의 고제환에 대한 기록은 1889년 1월 2일[승정원일기 고종 26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조선 시대에,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관원들의 품계를 올리는 일,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80세가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하였다] 한 후 1889년 1월 27일 내금위장[內禁衛將 무관 종2품]과 동지[同知 중추부 종2품]에 단부單付된다. 이상은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고제환의 이력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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