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환(高濟渙)과 장흥민란(長興民亂)(2)
고제환(高濟渙)과 장흥민란(長興民亂)(2)
  • 장흥투데이
  • 승인 2021.10.2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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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지 / 시인. 칼럼니스트

이 글은 장흥읍 평화리 출신 시인 고산지(본명 고영표)의 글로, 200자 원고지 70매 분량의 장문의 글로, 편집상 필자의 양해를 얻어 200자 원고지 40여 매로 축약, 128호에 이어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제 128호에 이어>

[3] 고제환의 1차 옥사獄事

헌종이 승하하자 1849년 8월20일[憲宗 15 己酉] 보성군에 부임한 고제환은 고을 재정財政을 살펴보니 대여貸與 양곡糧穀 8만석 사라지고 없었다. 환곡還穀 8만석의 착복着服 여부를 가리기 위해 군내郡內 부호富豪 38명 명륜당明倫堂에 소집召集한 후 환곡還穀 8만석 대상代償을 강요했다. 이 사건은 보성 유림의 경술복합상소庚戌伏閤上疏로 이어졌다.

보성향교지의 경술복합상언운동에 관한 서술은 사실관계의 왜곡으로 시작된다.

“이조 헌종 15년 [己酉:서기1849] 8월20일에 본군 군수로 부임한 고제환은 철종대왕과 이종姨從간이며 당시 전라관찰사 남병철과 남매간이였다.”

고제환은 헌종을 6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모신 외에는 왕실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고제환과 남병철은 남매간이 아닌 사돈관계였다. 고제환의 큰 사위 유기동柳冀東이 남병철의 매형 유영로柳永魯에게 입양되어 사돈이 되었다.

“이에 격분하여 궐기한 송형순 송헌순 박중혁 조욱승 이진항 안령 이일항 조일승 등 8 의사義士는 동년 3월12일에 상경하여 동 16일에 격쟁격고擊錚擊鼓 거화擧火하고 복합伏閤 상주上奏하였다. 이에 경악한 군수는 남병철 관찰사를 통하여 김대비金大妃 전하에게 변무辨誣 상소上疏를 올려, 동년 4월8일에 김대비로부터 일방의 상소를 전신悛信을 할 수 없으니 그의 진상을 지방장관의 책임 하에 탐사探査하라는 비답批答을 받고 포졸을 동원 어명을 참칭僭稱하고 송형순 조욱승 이진항 안령 등 7가家에 망측한 극악의 적몰가학賊沒苛虐을 감행하는 등 공기는 자못 살벌하였다.”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김대비[순원왕후,순조의 비, 김조순의 딸]에 의해 순조의 아들로 입양된 철종哲宗이 왕위를 계승했다. 남병철의 어머니는 김조순의 딸로 김대비[순원왕후]는 남병철의 이모였다. 철종과 남병철은 이종 사촌이다. 1851년 당시는 김대비의 수렴청정 시기였다. 전라관찰사 남병철은 김대비에게 변무辨誣 상소上疏를 올려 1851년 4월 8일 진상을 지방장관의 책임하에 探査하라는 비답批答을 받았다. 김대비는 보성군의 국세 8만석 포탈사건의 배후에 김문기가 있는 줄을 몰랐다. 보성향교는 김대비의 비답이 곧 어명인데도 어명참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 사건은 국세포탈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법집행이었다. “만약 이속吏屬들이 8만석을 축적蓄積 포탈逋脫했다면, 왜 이속吏屬들에 대한 정죄는 없고, 보성군수 고제환, 전라감사 남병철, 능주목사 김진화 3명만 징벌했을까?” 하는 의문은 불행하게도 보성군이 자랑하고 있는 경술복합상언운동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정략수단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4] 고제환의 2차 옥사 장흥민란長興民亂

부세를 이용한 수탈이 심각해지면서 농민들의 삶은 점차 궁핍해졌다. 관속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횡령한 후 그 횡령분을 농민 부담으로 전가시키려 했는데, 특히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이 주도한 도결都結과 우병사右兵使 백낙신白樂莘이 주도한 통환統還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양곡의 횡령과 취잉[환곡의 이자를 많이 받음], 배호백징[호별로 강제징수하는 세금]과 인징[불법으로 전세를 받는 것]은 진주농민의 봉기로 이어졌다. 1862년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뒤늦게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농민의 분노와 항쟁을 자극해서 민란은 진주에서 삼남 전역으로 번졌다.

1862년[철종13] 5월 13일에 일어난 장흥민란長興民亂은 농민들에게 전세田稅, 대동세大同稅를 부과할 때 상당부분을 추가하여 다른 명목으로 징수한 것이 원인이었다. 장흥의 어민들은 지역적 특성상 바다에 인접한 관계로 대모갑[玳瑁甲:바다거북의 껍데기]을 공납貢納했다. 그러나 대모갑을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대모갑 대신 화폐로 징수하는 대납전代納錢이 등장했다. 1853년 귀양에서 풀러난 고제환이 향리로 돌아오자 읍내의 향유들이 찾아와서 자주 문안인사를 드렸다. 처음에는 40∼50냥 하던 대모갑 대납전代納錢이 해마다 늘더니 3.400냥이 되었다. 향유鄕儒 정방현과 임재성은 고제환을 찾아와서 고을 수령守令과 이서吏胥의 횡포橫暴에 울분을 토로했다.

진주민란晋州民亂을 수습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였으나 농민의 분노와 항쟁은 삼남 전역으로 번졌다. 3월에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농민들이 봉기했고, 4월에는 함평, 5월에는 회덕, 공주, 연산, 청주, 여산, 부안, 금구를 거쳐서 장흥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동헌東軒 앞에 모여든 천여 명의 장흥농민들이 관아官衙를 습격하자고 목청을 높였다. 백성들을 위해 나선 고제환은 흥분한 농민들을 말렸다. 방백[方伯:府使]이 없는 동헌 습격보다는 이방 주찬우 등 오리汚吏를 징계해야 한다고 말한 고제환은 아들 학주鶴柱의 소상[小祥:사후 1년째 첫제사]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다. 농민들은 동헌의 습격을 유보한 백성들은 농민수탈에 앞장섰던 자들의 집을 습격 하리下吏 주신우의 집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전라감사 정헌교가 고제환을 체포해 반란의 괴수로 의금부로 송치送致하자 흥분한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여 공해公廨를 불태웠다. 관군을 이끌고 전라감사 정헌교가 민란을 진압하자 향리鄕吏 이향유가 동원한 관병에 의해 고제환의 가옥이 불에 타 소각되었다.

주동자 고제환은 보성군수를 지낸 양반신분이었다. 조선 조정은 군수출신의 양반이 봉기를 주도한 점에 크게 충격을 받아 고제환을 체포하여 의금부로 압송한 후 곤장 30대를 친 후 경흥부[함경북도]로 유배流配했다. 관아를 불태운데 앞장을 선 정방현鄭邦賢, 임재성任在星은 도신[道臣:전라감사]으로 하여금 죽기까지 한정하여 징치懲治를 하게 하였다. 그 외에 농민수탈에 앞장섰던 자들을 처벌하고 장흥민란은 마무리 되었다. 장흥민란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양반에 의해 봉기된 조선시대의 최초의 민란이란 점과 전후를 살핀 중앙정부의 사건처리가 매우 합리적이란 점에서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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