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사람들/국회의원 3선 이영권 전 의원
■장흥사람들/국회의원 3선 이영권 전 의원
  • 김선욱
  • 승인 2021.11.17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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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 정치 활동의 정치인·교육자로 한 생 불살라
20여년 전 유치 봉덕리로 귀향 - ‘지역의 큰 어른’으로 역할
현 88세 노구에도 항일운동등 장흥 현대사 재조명에 앞장 서

장흥 인근지역에서 유일하게 장흥을 부러워한 부분이 있다. 중앙무대에서 활동하였던 명사들이 귀향, 지역의 대표적 원로로서 지역 갈등을 조정하거나 지역의 비전 등에 대한 주요 현안들을 지역 원로들이며 선후배들과 교우·교육·공유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손수익 전 교통부 장관이 ‘장흥학당’을 개설해 운영해온 전력도 그렇고, 김인규 전 장흥 군수며 이영권 전 국회의원이 고향에 정착하여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등 지역의 큰 어르신으로 조용히 지역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들에서 그 실례를 들기도 한다. 즉 장흥군의 경우, 중앙무대 명사 출신의 지역 원로들이 ‘큰 어른들’로서 어느 만큼 중심을 잡고 지역사회 어른역할을 해 오고 있다는 점이 부럽다는 것이다.

이영권(李李權, 1934∼.) 전 국회의원도 장흥 지역사회에서 가장 큰 어른의 한 분이다.

부친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정치인 꿈 키워

인천이씨(李) 공도공파 37세인 이영권 전 국회의원은 호적등의 기록으론 1936년 6월 3일생이지만 실제적으로 1934년생이다. (‘인천이씨대동보’에는 1934년 1월 19일 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아호는 우산(友山).

이영권 전 의원의 태생지는 용산면 접정리와 함께 인천 이씨 집성촌인 용산면 어산리 어서마을이다. 아버지는 이삼섭(李三燮, 족보 명 이경종李璟鍾), 일명 이유섭(李有燮)과 어머니 영광 정씨 정진수(丁璡壽)의 여식 오금련 씨 슬하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용산초‧장흥중을 졸업하고 목포공업고등학교(고등학교 때 권투선수로 활동하였다)를 거쳐 조선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이영권 전 의원이었다. 기실 이 전 의원이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집에 안중근 의사 초상화를 벽에 내걸어놓고 ‘안중근 의사처럼 살아라’라고 가르쳤던 부친 이삼섭 옹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 주재소(파출소)에 끌려가 모진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을 만큼 촌부임에도 민족정신은 누구보다 투철했던 분이었다고 한다. (현재 장흥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까지 장흥지역에서 22명의 독립투사를 새로이 발굴해 독립유공자로 인증받게 했는데, 현재 이영권 전 의원의 부친 이삼섭 씨의 경우, 독립유공자 추서를 추진했고 국가보훈처에서도 현지 실사를 마쳐 내년에는 독립유공자로 인증받을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런 부친의 영향 탓인지 어려서부터 비리 부정에 대해 참지 못하였고, 정의 실현에 누구보다 앞장서기를 주저치 않았다고 한다. 혹자는 이영권 전 의원의 정치가 활동은 실제적으로 장흥동학 혁명을 주도했던 장흥 인천이씨 선인들의 그 의기(意氣)의 혈맥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장흥동학혁명을 주도했던 장흥의 인천이씨 선인들로 이방언李芳彦·이사경李仕京·이인환李仁煥 대접주, 이소사 등이 있어 사실상 장흥동학명의 주도 세력은 장흥 인천이 씨들이었다.)

그러나 궁핍한 가정형편이 학교 진학에 발목이 됐다. 그 때문에 고교 진학도 인문계고교가 아닌 취업이 보장된 공고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후에야 간신히 조선대학교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시험도 준비하며 정치인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36세까지 고시 공부를 한 이 전 의원은 매번 사시에서 1차는 5번이나 합격했으나 2차는 매번 불합격했다. 행정고시도 1차는 한 번 합격했으나 역시 2차는 불합격했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돌려, 1970년 후반부터 광운공과대학(현 광운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 입후보

12대∼4대 국회의원 3선의원

엄혹했던 1980년대 초, 당시 전국의 대학가는 민주화 열기로 들끓었다. 당시 광운공과대학 교수였던 이영권 전 의원은 숱한 젊은이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되는 모습을 보고는 ‘더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이제는 정치에 입문해 보자’는 생각으로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정치에 본격적으로 몸을 던진다. 그때가 1981년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 전 의원에게는 기탁금(무소속 1천5백만 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변호사로 있는 친구가 선거운동에 쓰라면서 조건 없이 예금통장을 건네주어 해결했다. 아내에게도 후보등록한 후에 출마사실을 말했다. 선거 결과, 강진 출신의 민주정의당 김식 후보와 영암의 민주한국당 류재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러나 이 전 의원은 돈도 조직도 없었지만 2만 5천여 표를 득표, 나름대로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정치인 이영권’을 장흥지역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는 1973년 제9대 때부터 1985년 12대까지는 장흥‧영암군이 인근 지역인 강진‧완도군과 함께 묶여진 복합선거구로 치러지며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그 이후 1988년 제13대와 1992년 제14대 선거는 소선구제로 전환되었고 각 지자체별 단독 선거구로 치러지며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된다.)

11대 선거 때는 장흥 출신으로는 이영권 전 의원 말고도 백정기 씨(육사 8기 출신으로 길전식씨와 동기)가 출마했고 전체적으로 7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이 선거에서 이영권 후보가 낙선함으로써, 장흥은 역대 국회의원 선거 사상 처음으로 지역 출신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1대 김중기, 2‧5대 고영완, 3대‧4대 손석두, 6대〜10대 길전식).

이영권 전 의원은 11대 선거에서 패한 이후 군소정당인 민권당에 입당해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한편으로 5.18 민주화운동 4주년이던 1984년 5월 18일, 동교동계(DJ)와 상도동계(YS)가 참여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에 산파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야당은 전두환 정권의 눈치를 살피던 때였으나, 1982년 이 전 의원은 정부의 5․18 2주기 성명을 강도 높게 발표해 안기부에 연행되기도 했다.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재도전한다.

12대 때도 복합 선거구인 ‘전남 제9선거구(완도군‧강진군‧영암군‧장흥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출마, 민주정의당 김식 후보와 동반 당선되며 전남 유일의 초선으로 국회에 등원하게 된다.

이후 동교동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87년 4월 8일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1987년 5월 1일 통일민주당 창단 때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다시 통일민주당을 탈당(1987.10.29.)하고 1987년 11월 12일 평화민주당 창당 때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단독 선거구 ‘장흥군 선거구’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단독 선거구 ‘장흥군 선거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각각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된다.

그리고 3선 의원이던 제14대 후반기 국회(1994∼1996)에서 국회 교육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 전 의원은 1995년 김대중이 정계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기에 이르자 이에 따라갔지만,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대중 총재의 측근 김옥두에게 밀려 공천에서 탈락하며 ‘3선 국회의원’으로 정치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전 의원은 공천을 배제한 DJ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이 전 의원은 14대 국회 임기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부터 한양대 교수로 간 이후, 전남도립대학인 장흥대학 초대 학장과 수원 동남보건대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지역 현안, 지역발전에 열정적으로 기여

이영권 전 의원은 국회의원 때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됐던 고향 장흥 발전에 유독 큰 애정을 쏟았다. 보림사 복원‧재건을 위한 예산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고, 당시 홍수피해가 심했던 탐진강 제방 축조와 예양교 건설 재원을 지원했으며, 탐진강 종합개발도 적극 추진하였다. 장흥다목적댐도 설계 당시는 큰 저수지 정도였지만,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예산을 투입하여 당초 규모보다 10배 정도 커진 지금의 장흥댐이 축조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탐진강변 개발 사업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오늘날 장흥 물 축제 개최지의 장흥읍 탐진강 천변 개발로 이어지게 하는 등 장흥 발전의 토대 구축에 기여하였다.

이영권은 특히 제14대국회에서 교육위원장으로서 최초로 민족 통일교육을 주창했으며 해외동포 교육이라는 불모지를 개척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교육개혁 실현을 위하여 교육재정 확보를 적극적으로 추진, GNP 대비 5%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교육 예산이 국방 예산을 넘어서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장흥대학 초대 학장 역임

최초 장흥동학 학술세미나- 장흥동학 재조명 단초 마련

또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장흥대학장을 역임할 때는 장흥에서 최초로 지역신문(장흥신문)과 함께 장흥동학 학술세미나를 개최했으며, 동학농민혁명기념탑 건립과 영회당 리모델링 사업, 향교 복원사업 추진에도 앞장서며 지역민 통합에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 지역신문과 공동으로 개최한 장흥동학 학술세미나는 장흥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동학군‧관군 후예들의 반목과 갈등을 조율하며 화합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장흥동학 혁명 때 관군 측 후예들은 ‘영회당’이란 사당을 짓고 해마다 그 뜻을 기려왔으며 지금도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15일 추모제를 지내왔지만, 동학 농민군 후예들은 거의가 붙잡혀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처형당했으며 그 후손들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갖은 핍박과 질곡 속에 삶을 이어왔으니 그 세월이 1백여 년이었다.

1980년대 들어 동학 재조명 움직임이 일면서 장흥의 분위기도 비로소 점차 바뀌면서 장흥 동학 최후 전투였던 ‘석대들 전투’를 기념하는 탑을 세워야한다는 사회 여론이 일었고, 국가에서도 이영권 전 의원 등의 노력으로 이를 인정하여 국비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관군 후예들인 영회당 측은 동학기념탑 건립에 반대해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끝내 탑은 건립됐다. 하지만 영회당 측의 반발로 제막식만큼은 무산됐다.

이에 이영권 전 의원을 비롯한 뜻있는 지역 인사들은 이같은 동학 후예간의 갈등에 대해 ‘이제는 양측이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 안을 때가 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었고, 이 와중에 지역신문인 장흥신문과 장흥대학이 장흥동학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 장흥대학 학장이었던 이영권 전 의원은 ‘장흥동학 혁명 당시 관군은 ‘충(忠)’으로, 농민군은 ‘의(義)’로 정의하면서 두 세력 후예들간의 화합을 강조했으며, 사실상 이것이 모티브가 되며 장흥동학에 대한 재조명 운동도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계를 떠난 이후 이 전 의원은 대학교수와 학장, 전남도립대학교 총장(1998〜2001, 전남도립대학교 초대 학장·총장) 등을 거치며 후학양성에 힘써 왔다.

이 전 의원은 2000년대에 이르러, 유치면 봉덕리로 귀촌해 여생을 보내고 있다.

올해로 연세가 88세, 귀가 좀 먼 것을 빼면 여태 건강한 편이지만, 그 노구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사회와 장흥의 현안’에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모임인 인동초민주동지회장을 맡으며 ‘민주 통일 비’ 세우기에 앞장서기도 했고 특히 고향으로 귀촌한 이래, 장흥문화예술인대회‧장흥 물 축제‧한국문학특구포럼 등 지역의 중요한 대소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고 있다.

또 지난 2020년부터 장흥군이 추진해오고 있는 항일역사 재조명·독립투사 재발굴 작업인 ‘장흥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상임 대표를 맡아 ‘장흥의 현대사 재조명’ 운동에도 앞장서 오고 있다.

최근에는 당신의 정치 인생을 회고하는 회고록 발간을 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화시대에서 지역 발전의 핵심은 지역민의 화합이다. 지역민이 한 마음으로 화합한 가운데 ‘머지않아 소멸될지 모르는 장흥의 불투명한 미래’의 극복을 위해선, 지역민이 공감‧공유하는 비전을 창출해 지속 가능한 장흥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 또 장흥은 전통적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그 위대한 승리 신화에 가장 크게 기여했으며, 장흥동학이라는 민중운동의 향맥을 이어 온 대표적인 의향이었는데도, 오늘날 그 장흥 의향에 대한 관심이나 조명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이제부터라도 장흥의 지도층이 장흥의 찬란한 전통과 문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계승하고 이를 재현한 기반 위에서 장흥고유의 신문화를 창출해야 ‘길이 흥하고 빛나는 장흥’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영권 전 의원의 장흥 지도층에게 보내는 강한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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