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고문학/산문1/보조선사 창성탑비(3)
장흥의 고문학/산문1/보조선사 창성탑비(3)
  • 김선욱
  • 승인 2021.11.2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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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문학 첫 장을 연 ‘보조선사 창성탑 비문’
당대 명 문장가 신라 당 관리 겸직한 문장가 김영이 찬술
선종 조사 승계 정리, 신라선종 종찰로서 보림사 위상 제고
김선욱/시인, 본지 편집인

 

 

 

 

 

 

 

 

 

보림사 전경
보조선사 체징 영정
보조선사 창성탑

 

 

 

 

 

 

 

 

 

 

 

개성 2년 정사에 동학인 정육(貞育)·허회(虛懷) 등과 함께 바닷길로 서쪽 중국에 들어갔다. 선지식을 찾아 삼오주를 편력하면서 온 누리가 좋아하고 하고자 함이 같으며 성상(性相)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우리 조사께서 말씀하신 바에 더할 것이 없는데 어찌 수고로이 멀리 가겠는가”라고 이르며, (구법의) 발길을 멈추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至開成二年丁巳, 與同學貞56)育虗懷等, 路出滄波, 西入華夏. 叅善知識, 歷三五州, 知其法界, 嗜欲共同, 性相無異. 乃曰, “我祖師所說, 無以爲加, 何勞遠適.” 止足意興.

*개성(開成) 2년:희강왕(僖康王) 2년(837).

* 삼오주(三五州):『신당서新唐書』(권37 “지志’ 27지리(地理)1)에 따르면, 당나라가 일어나면서 고조(高祖)가 군(郡)을 주(州)로, 태수(太守)를 자사(刺史)로 고치고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전국을 다스렸다. 그 후 태종원년(627)에 전국을 10도(道)로 나누었으며, 경운(景雲) 2년(711)에 천하를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24 도독부를 설치했다. 개원(開元) 21년(733)에는 전국을 다시 15도로 나누고 각 도에 채방사(採訪使)를 두었으며 건원년간(乾元年間 758~759) 이후에 각지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이를 폐지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본 비문에서 체징이 편력했다는 삼오주란 중국전역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신라의 ‘9주’와 같은 의미의 ‘15도’를 일컫는 것으로 풀이된다.

5년 봄 2월에 평노사(平盧使)를 따라 신라에 돌아와 고향을 교화했다.

이에 단월들이 마음을 불교에 기울여 발길을 잇는 것이, 수백의 내가 오학에 모이듯 수많은 계곡과 산들이 영취산을 우러르듯 했다고 이르더라도 충분한 비유가 아니될 정도였다. 드디어 무주 황학(黃壑)의 난야(蘭若)에 머무르니 때는 대중 13년59) 용이 석목의 진60)에 모인 무인년 헌안대왕 즉위 이듬해였다.

五年春二月, 隨平盧61)使, 歸舊國, 化故鄕. 於是檀越, 傾心釋敎, 繼踵百川之朝, 鼇壑群嶺之宗, 鷲山未足爲喩也. 遂次武州黃壑蘭若, 時大中十三 , 龍集于析62)木之津, 憲安大王卽位之後年也.

*개성 5년:문성왕(文聖王) 2년(840).

*오학(鼇壑):오산(鼇山)과 같은 말. 큰 바다 거북이 떠받치고 있는 바다 가운데의 산으로 신선들이 거처하고 있는 곳인데,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발해(渤海)의 동쪽에 대학(大壑)이 있어 그 가운데 오산(五山)이 있다. 오산의 밑둥지는 서로 연결되어 지탱하는 곳이 없는 까닭에 파도에 따라 오르내리는데, 천제(天帝)가 서쪽 끝으로 떠내려 갈 것을 염려하여 15마리의 큰 거북으로 이를 떠받치게 했다”고 이르고 있어, 오산 아래의 대학을 가리키는 듯하다.

* 대중(大中) 13년:헌안왕(憲安王) 2년(858).

*석목지진(析木之津):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의 인마궁(人馬宮), 곧 미수(尾宿)를 가리키며 12지(支)의 인(寅)에 해당한다.

대왕이 소문을 듣고 도를 우러러 꿈속에서조차 사모하여, 선문을 열고자 선사에게 서울로 들어오기를 청했다. 여름 6월에 장사현 부수 김언경을 보내어 차와 약을 가지고 가서 맞이하게 했다. 선사는 구름과 바위를 벗삼아 지내는 것을 편안히 여겼고, 또 결계의 달이었으므로 정명의 병을 핑계대고 육조(六祖)처럼 사양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다시 명을 내려 스님과 속인 사신인 영암군 승정 연훈법사와 교지[宸]를 받든 풍선(馮瑄)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해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거처할 것을 청했다. 드디어 마지못해 석장을 날려 가지산문(迦智山門)으로 옮겨 들어가니, 그 산은 곧 원표대덕이 옛날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원표대덕은 법력으로써 정사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건원 2년 왕이 특별히 명하여 장생표 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그 표주(標柱)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大王聆風仰道, 勞于夢魂, 願闢禪扉, 請入京轂. 夏六月, 敎遣長沙縣副守金彥卿, 賷茶藥迎之. 師以處雲巖之安, 兼屬結戒之月, 託淨名之病, 陳六祖之辭. 冬十月, 敎又遣道俗使, 靈巖郡僧正連訓法師, 奉宸馮瑄等, 宣諭74)綸旨, 請移居迦智山寺, 遂飛金錫, 遷入山門. 其山則元表大德之舊居也. 表德以法力, 施于有政, 是以, 乾元二年, 特敎植長生標柱, 至今存焉.

*장사현(長沙縣):오늘날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茂長) 일대

*김언경(金彦卿):헌덕왕 13년(821) 신라인으로서 최초로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김운경(金雲卿)과 같은 사람으로 추측하기도 한다.(신형식,‘숙위학생고’ 『역사교육』11·12, 1969,pp.70~72.)

*결계지월(結戒之月):계율을 결성하고 수행하는 하안거(夏安居)의 기간을 가리킨다. 매년 4월 16일부터 7월 15일에 이르는 대중수행 기간을 말한다. 인도의 우기(雨期)에 당하여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정진하던 기간에서 유래했다. 경계를 정하여 출입을 자제하고 공동의 규범을 준수하는 기간으로 결계(結界)라고도 한다.

*정명지병(淨名之病):유마거사(維摩居士)는 인도 비야리성에 살았던 장자(長者)로서 재가에 있으면서 보살행을 닦았다. ‘정명淨名’이란 유마힐(維摩詰)을 의역한 이름이다. 그는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불법을 가르칠 방편(方便)으로 거짓으로 병을 앓으며 문병차 온 사람들을 상대로 설법하였으니, ‘정명의 병’은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육조지사(六祖之辭):당나라 무태후가 효화황제의 글을 보내어 육조혜능을 초청했으나 혜능이 병을 핑계로 사양한 고사이다.

*연훈법사(連訓法師):‘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黃龍寺九層塔刹柱本記’ ‘도감전道監典’에 보이는 황룡사 상좌승(上座僧) 연훈(然訓)과 같은 사람으로 추측된다.

*원표대덕(元表大德):『송고승전宋高僧傳』권30 ‘당고려국원표전唐高麗國元表傳’(대정장50, p.895b5)에 따르면, 그는 본래 삼한인(三韓人)으로 천보년간(天寶年間 742~756)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인도를 순례하고 『화엄경』80권을 가지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데, 회창년간(會昌年間:841~846)의 훼불(毀佛) 때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것처럼 나타나 있어 그 내용이 자못 의심스러우며, 본비에 보이는 원표(元表)의 행적은 759년 경에 신라에서 활동하였음을 말해준다.

*건원(乾元) 2년:경덕왕(景德王) 18년(759).

*장생표(長生標):사격(寺格)을 정하거나 사령(寺領)의 사계(四界)를 표지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림사의 장생표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고려시대 사원의 장생고(長生庫)에 딸린 사전(寺田)의 표지를 이른다.(김삼수,‘삼국유사에 나타난 소유권 사례에 관한 고찰’ 『숙명여대논문집』19, 1979, p.68.)

*지금존언(至今存焉):6·25 동란 때 보림사가 전소하였으니 이 장생표(長生標)도 함께 타 사라졌다.

선제 14년 2월에 부수 김언경이 일찍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선사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청봉(淸俸)을 덜고 개인의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선사가 거처하는 절을 장엄했다. 또 왕이 망수택·이남택 등에게 금 160분, 조 2,000곡을 내게 하여 절을 장식하는 공덕의 비용에 충당토록 하고 사찰을 선교성77)에 예속시켰다. 함통 신사년에는 시방에서 시주한 재물로써 절을 넓히고 그 낙성일에 선사가 사찰에 이르니, 암수무지개가 법당 안으로 뚫고 들어와 갈라진 빛이 방안을 비추고 반짝이는 빛이 사람을 비추었다. 이는 견뢰)와 사가가 상서로움을 알려 표하는 것이었다.

宣帝十四年仲春, 副守金彦卿, 夙陳81)弟子之禮, 嘗爲入室之賓, 減淸俸, 出私財, 市鐵二千五百斤鑄盧舍那佛一軀, 以莊禪師所居梵宇. 敎下望水里南等宅, 共出金一百六十分, 租二千斛, 助充裝功德, 寺隸宣敎省. 咸通辛巳歲, 以十方施資, 廣其禪宇, 慶畢功日, 禪師莅焉, 虹之與蜺, 貫徹堂內, 分輝耀室, 渥彩燭人. 此乃堅牢告祥, 娑迦表瑞也.

*선제(宣帝) 14년:헌안왕(憲安王) 4년(860).

*망수택·이남택(望水宅里南宅) 『삼국유사三國遺事』권1’기이紀異’ 진한(辰韓)에 나오는 금입택(金入宅) 가운데 수망택(水望宅)·이남택(里南宅)이 본비의 망수택·이남택이며, 두 금입택에서 기부한 조곡(租穀) 2,000곡(斛)은 답(畓) 1,333결(結)에 해당하며 특히 불사(佛事)의 기용(器用)을 만드는데 금은(金銀) 사용을 금지한 애장왕(哀莊王) 7년(806) 이후에 두 금입택에서 금 160분(分)을 기부한 사실이 주목거리라고 한다. (이기동, ‘신라금입택고’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pp.203~204.)

*선교성(宣敎省):‘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신라편]에도 선교성이 보이는데, 국왕의 교서(敎書;詔書)를 선포하는 국왕 직속의 관부로서 발해(渤海)의 선조성(宣詔省)이나 당(唐)의 문하성(門下省)에 상당한 기구로 추정.

*함통 신사년(咸通辛巳年):경문왕(景文王) 1년(861).

*견뢰(堅牢):낙가라 곧 견뢰지신(堅牢地神)으로 대지(大地)를 담당하는 신(神)을 이른다. 이 신은 능히 대지를 견고하게 하므로 이와 같이 일컬으며, 항상 교법이 유포되는 곳에 나아가 법좌 아래에서 설법하는 이를 호위한다.

*사가(娑迦):사가라(娑迦羅)용왕을 가리킨다. 사가라는 큰 바다란 뜻으로 바다의 용왕을 이른다.

광명 원년85) 3월 9일 여러 제자들에 “나는 현생의 보업(報業)이 다하여 나무가 재가 되듯 사라지려니, 너희들은 마땅히 불법을 잘 지키고 게으르지 말라”고 일렀다. 4월 12일 유시(酉時)부터 술시(戌時)까지 천둥·번개가 온 산을 울렸다. 13일 한밤중에 상방(上房)의 땅이 진동하더니 날이 샐 무렵 오른쪽으로 누운 채로 임종했다. 향년 77세로 승랍 52세였다.

이에 제자 영혜(英惠)·청환(淸奐) 등 800여인은 의리가 어버이를 잃은 듯 깊었고 정이 하늘과 땅에 사무쳐 추모하여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그 달 14일에 왕산송대(王山松臺)에 장사지내고 탑을 쌓아 안치했다.

廣明元年三月九日, 告諸依止曰, “吾今生報業盡, 就木乖成, 汝等, 當善護持, 無至隳怠.” 至孟夏仲旬二日, 雷電一山, 自酉至戌. 十三日子夜, 上方地震, 及天曉, 右脇臥終. 享齡七十有七, 僧臘五十二. 於是, 弟子英惠, 淸奐等, 八百餘人, 義深考妣, 情感乾坤, 追慕攀號, 聲動溪谷. 以其月十四日, 葬於王山松臺, 壘塔安厝.

*광명 원년(廣明元年):헌강왕(憲康王) 6년(880).

오호라, 선사의 이름은 여기에 남아 있건만 혼백은 어느 곳으로 가 태어났는가. 5탁86)을 떠나고 18공87)을 뛰어넘어서, 적멸(寂滅)을 기꺼워하여 돌아오지 않고 법림(法林)을 남겨 길이 빼어났으니, 어찌 오로지 법계에서 생령을 구제했을 뿐이었겠는가. 실로 또한 삼한에서 임금의 교화를 도왔도다. 『예기禮記』에서 “별자(別子)가 조(祖)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강성이 주를 달아 “네가 만일 처음으로 이 나라에 왔다면 후세에 조라 여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달마는 당나라의 제1조이며, 우리 신라에서는 도의대사(道儀大師)가 제1조, 염거선사(廉居禪師)가 제2조, 우리 보조 체징선사가 제3조이다.

嗚乎, 禪師名留於此. 魂魄何之生, 離五濁, 超十八空, 樂寂滅而不歸, 遺法林而永秀, 豈唯濟生靈於沙界. 實亦裨聖化於三韓. 禮云, “別子爲祖.” 康成注云, “子若始來在此國者, 後世以爲祖.” 是以, 達摩爲唐第一祖, 我國則以儀大師, 爲第一祖, 居禪師爲第二祖, 我師第三祖矣.

*오탁(五濁):말세(末世)에 일어나 피하기 어려운 사회적·정신적·생리적인 다섯가지 혼탁함으로 전쟁·질병·기아 등으로 물든 겁탁(劫濁), 사상(思想)의 혼란기인 견탁(見濁), 신체가 허약하고 번뇌가 많아 인간의 자성이 흐려지는 번뇌탁(煩惱濁), 중생(衆生)의 수명이 짧아지는 중생탁(衆生濁), 탐·진·치가 치성하고 악덕이 판을 치는 명탁(命濁) 등이니, 오재(五滓)라고도 한다.

*십팔공(十八空):공(空)을 바탕[體]과 작용[用]으로 관찰하여 구분한 것으로, 내공(內空)·외공(外空)·내외공(內外空)·공공(空空)·대공(大空)·제일의공(第一義空)·유위공(有爲空)·무위공(無爲空)·필경공(畢竟空)·무시공(無始空)·산공(散空)·성공(性空)·자상공(自相空)·제법공(諸法空)·불가득공(不可得空)·무법공(無法空)·유법공(有法空)·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이른다.(『대지도론大智度論』‘권 31’<대정장25, p.285>).

*강성(康成):후한(後漢)의 대표적인 고문학자인 정현(鄭玄:127~200)의 자(字)이다. 북해(北海) 고밀현(高密縣) 사람으로 장공조(張恭祖), 마융(馬融) 등에게 수학하였으며, 『모시毛詩』 『삼예三禮』 『주역周易』 『상서尙書』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을 주석하고 『육예론六藝論』 등을 찬술했다.

*“자약子若 … 위조爲祖”:『예기禮記』‘대전大傳’ 10.

중화 3년 봄 3월 15일에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엮어 멀리 왕경에 나아가 비명을 세워 빛나게 할 것을 청했다. 임금이 진종(眞宗)의 이치를 흠모하고 스승을 높이는 마음을 갸륵히 여겼다. 이에 담당 관사에 명하여 시호를 정하여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 하니, 이는 그 선종을 포상하는 예에서이다. 다음날에 또 미천한 신에게 비문을 지어 뒷날의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명하니, 신이 삼가 두려이 왕명을 받들어 사실대로 글을 짓는다. 다만 왕의 충정을 공손히 받들 뿐이니 문사들의 비웃음을 감히 피할 수 있겠는가. 송사(頌詞)에 이르되,(…)

(이하 송사는 詩文이므로 고대시에서 소개하기로 함)

중화 4년102) 갑진(甲辰) 가을 9월 무오(戊午) 19일 병자(丙子)에 세우다.

제7행 ‘선’자 이하는 제자 전병부시랑(前兵部侍郞) 입조사(入朝使) 전중대감(殿中大監)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김언경이 글을 쓰고, 흥륜사 승 석현창(釋賢暢)이 글을 새기다.

中和四年, 歲次甲辰季秋九月戊午朔, 旬有九日丙子建. 從頭第七行禪字已下, 弟子前兵部侍郞, 入朝使, 殿中大監, 賜紫金魚袋, 金彦卿書, 興輪寺僧, 釋賢暢, 刻字.

*중화(中和) 4년:헌강왕(憲康王) 10년(884).

*흥륜사(興輪寺):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터 가운데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을 베어내고 진흥왕 5년(544)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경주에 있었던 절이다.

<이 비신(碑身)의 높이(高)는 8척2촌(八尺二寸), 폭(幅)은 4척5촌(四尺五寸), 글자의 간격은 8분(八分), 1항부터 7항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이며, 그 이하는 행서(行書)이다. 이수(螭首)와 제액(題額)은 늑멸(泐滅)되었다.>

ⓒ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上, pp.95~105.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上, pp.60~64.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古代, pp.198~20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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