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순군지사 운암 정두흠의 손명사를 100년만에 학계에 공개하다
구한말 순군지사 운암 정두흠의 손명사를 100년만에 학계에 공개하다
  • 김선욱
  • 승인 2021.12.0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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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정두흠 선생 초상
망화대비
운암집(후손 정환기 소장본)

 

 

 

 

 

 

 

 

 

 

운암선생 묘소참배
학술회의 장면

정두흠(鄭斗欽:1832~1910)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출신으로 경술년(1910년) 한일합병 때 순절한 애국지사이다.

같은 시기에 매천 황현은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곡성에서는 정재건(鄭在楗), 김제에서는 장태수(張泰秀)가 각각 유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운암 정두흠은 <손명사(損命詞)>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손명사’는 “목숨을 버리며 고하다”라는 뜻이다. 순절 당시의 유묵은 확인되지 않고, 그의 문집인 운암집(雲巖集)에 칠언율시 2수만 전한다.

운암 정두흠의 순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 지은 <손명사>는 매천 황현의 <절명시>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손명사>의 제4구에 2자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장흥문화원의 고전국역사업 일환으로 운암집 국역을 위촉받은 홍순석 명예교수(강남대, 한문학전공)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증 결과를 지난 11월 25일 장흥통합의학컨벤션센터에서 「순국지사 운암 정두흠의 생애와 <손명사>」란 주제로 발표하였다.

운암집에 수록된 <손명사>는 7언시인데 제4구는 「閉戶白日天」 5자만 기록되어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쓴 묘갈명에는 “경술년 변고에 문을 닫고 대낮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다(庚戌之變 閉戶不見天日)”고 하였다.

이를 통해 「不見」이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운암집 권3에 수록된 연보 경술년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묘갈명> <연보>의 기록을 통해 <손명사> 제4구의 결자는 「不見」임이 분명해진다. 결자 부분을 복원한 첫 번째 시를 정리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有客來傳無國報 어떤 객이 전하길 나라가 없어졌다 하기에

癲狂心事淚悽然 미칠듯한 심사에 눈물 흘리며 처참해지네

擧跟寧蹈靑山土 발꿈치 들고 어찌 청산의 흙을 밟으랴

閉戶不見白日天 문 걸어 닫고 대낮의 하늘을 보지 않네

負帝貞忠慚陸秀 황제를 업고 죽은 육수부의 정충에 부끄럽고

攘秦大義憶齊連 진나라 물리친 제나라 노중련의 대의를 생각하네

國破難容無救罪 나라가 망함은 용납이 어렵고 구제할 수 없는 죄이니

莫如身死逐先賢 이 몸 죽어 선현을 따르니만 못하리라

운암집에는 을사년(1905) 조약 때 순절한 신헌‧조병세‧민영환‧송병선‧홍만식‧김봉학 등 6명의 충절을 애도하는 만사가 있다. 1906년에 순절한 최익현을 애도하는 시편도 있다.

홍교수는 지난해 12월에 회은 위원량의 수리봉 ‘망곡서(望哭書)’ 암각문을 공개하여 주목을 받았다. 회은 위원량이 경술년 가을에 암각문을 남긴 것과 운암 정두흠이 경술년 10월에 순절한 역사적 사실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송사 기우만은 정두흠의 묘갈명에서 경술년에 호남에서 순절한 사람이 셋인데 정재건‧장태수, 그리고 한 사람, 사헌부 지평 정두흠이라 하였다.

같은 시기에 호남에서 순절한 애국지사인데 정재건 선생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장태수 선생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운암 정두흠은 <손명사>가 문집에 전하고 있음에도 아직 추서를 받지 못한 상태이다.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과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적 심사위원인 박민영 교수는 조속히 운암의 사적을 정리해서 건국훈장을 추서함이 마땅할 것이다고 하였다.

운암 정두흠의 문집인 운암집은 4권 2책으로, 1919년도에 장자인 정제하(鄭濟夏)에 의해 간행되었다.

노사(老沙) 기정진(奇正鎭)의 제자인 정의림(鄭義林:1815~1910)이 서문과 <운암재기(雲巖齋記)> <망화대기(望華臺記)>를 썼다.

그리고 기우만(奇宇萬)이 <묘갈명>을 썼다.

운암 정두흠은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경학을 수학한 문인이다.

부친과 형님의 강권으로 48세 되던 1879년(고종16)에 출사하여 권지승문원정자‧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을 거쳐 56세 사헌부 지평에 오른 문신이다.

세 차례 대성(臺省)에 오르고, 사간원을 출입하면서 불의를 만나면 곧바로 간쟁하고, 잘못을 보면 반드시 탄핵하였다.

재임 중 <청색천변소(請塞天變疏)> <청엄방헌소(請嚴邦憲疏)> <만언소(萬言疏)> <청파매관소(請罷賣官疏)> <청납직언소(請納直言疏)>를 올렸다.

스스로 ‘상소에 미친 사람[疏狂]’이라 할 정도로 강직했던 인물이다.

10개 조목으로 구성된 <만언사>는 당시의 정황을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운암집에는 구한말 쇠국기에 순국한 신헌‧민영환‧조병세‧‧송병선‧홍만식‧김봉학 등 6명의 충절을 애도하는 만사가 있다.

1906년에 순절한 최익현을 애도하는 시편도 있다.

<임오군란을 탄식함(嘆壬午軍擾)> <의장 개제를 탄식하며(歎衣章改制)> <의병을 일으킴에 감회가 있어 읊다(倡義感吟)> 등 당시의 정황을 개탄하며 지은 시도 적지 않다.

특히 운암 정두흠의 부인인 청주한씨도 “나라 망하고 남편이 죽었으니 홀로 살 수 없다.”고 하며, 운암의 1주기를 제사를 지내고 조용히 따라 죽었다.

이같은 우국충정과 정절에도 불구하고, 운암 정두흠의 사적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그가 살았던 집터는 도로가 횡단하였고, 망화대(望華臺) 표석만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망화대 표석은 후손의 안내로 지난 9월 7일 장흥문화원 조사팀(고영천 원장, 위종만 사무국장, 문충선 이사 외)에 의해 확인되었다.

훼손이 심하여 판독이 어려우나 우측면에 「崇禎五辛酉 十二月 日 濟夏 海鵬 竪」라는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어 1921년 12월에 아들 제하, 해붕이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운암 정두흠과 같은 시기에 곡성에서 순절한 정재건(鄭在楗)선생은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제에서 순절한 장태수(張泰秀)선생은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구한말의 순국지사는 대부분 1962~1963년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운암 정두흠이 같은 시기에 <손명사>를 남기고 순절하였음에도 아직도 그의 우국충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향후의 과제로 산일된 운암 정두흠의 유적과 유물 조사를 통해 다른 순국지사처럼 선양되어 추서되어야 할 것이다.

홍순석 교수는 학술회의 다음 날인 26일에 장흥문화원의 고영천 원장, 문충선 이사, 위종만 사무국장, 그리고 독립기념관의 김건실 연구원, 양동철 전남서남부 광복회장,서선미 운영위원, 정환기 후손 등과 함께 운암리 운월마을에 있는 운암선생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에는 장흥문화회관에서 「우국지사 회은 위원량의 생애와 망곡서 암각문」을 발표한다.

이날에는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도 「구한말 의병 우국지사 활동 조사 현황 및 향후 추진 계획」이란 주제로 기조강연을 한다.

한시준 관장은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탐방하며, 안중근 의사를 모신 해동사를 참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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